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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미 Nov 29. 2023

여기가 승무원 면접장이야, 기상캐스터 면접장이야?

지금까지 ㅁㅁ날씨, 채미였습니다!


찰떡같은 답변을 했다며 스스로 신나 흥이 돋았을 때, 찬물을 끼얹는 당황스러운 개별 질문이 이어졌다. 이번엔 반대 순서로 개별 질문을 하겠다며 그럼 이제 내 순서로구나 생각하는 그 찰나에, 세 분의 임원 중에서 가운데 앉은 분이 말함과 동시에.






본인은 본래 면접에서 어려운 질문을 하는 사람입니다. 참고하시고...
채미 씨는... 이렇게 보니 방송 경력이 꽤 많으시네요? 교통, 스포츠, 날씨...
그렇다면 지금 이 상황을 한번 기상캐스터 처럼 해보시겠어요?




순간 앞이 번쩍했다. 홈쇼핑 공채에서도 이런 장기자랑을 해 본 적이 없는데, 승무원 면접에서 라니. 심지어 앞엔 카메라도 없고(면접과 눈 대신 카메라 렌즈라도 보면 덜 떨린 텐데...) 내 옆에는 같이 지원한 면접자들 4명이 줄 맞춰 서 있었다. (혼자 해도 떨리는 데 같은 지원자들이 보고 있다니!)









홈쇼핑 공채 준비를 하면 일명  PT 준비라는 것을 수십, 수백 번 반복한다. 기승전결의 흐름으로 오프닝, 소구포인트 1 혹은 2, 클로징. 여기에서 오프닝은 '시선을 잡아끌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클로징은 '여운을 남겨야 한다는 것!' 이게 항상 만족할 만큼 되진 않지만, 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목소리의 톤과 분위기로 여유 있어 보이고 자신감 있어 보기에 하는 방법을 항상 연습해 왔다. 몸에 체득한 이 시간들을 여기에서 신나게 보여줘야겠다 생각했다.









네~ ㅁㅁ날씹니다. 채미 지원자는 어제 새벽 두 시에 막방으로 인해서 체력적으로는 살짝 떨어져 있는 상태인데요, (기상 캐스터처럼 손으로 짚는 걸 상상해 보세요!)
하지만 분당 2000만 원 기네스 매출을 달성하면서 정신적으로는 상승세를 타고 있습니다. 오늘 면접 결과도 이 흐름이 이어지며 좋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지금까지 ㅁㅁ날씨의 채미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렁찬 박수소리가 이어졌다. 이때의 소리와 분위기, 감정을 잊을 수 없다. 옆의 지원자들의 우와~ 소리와 함께 내 앞의 임원분들의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고 나니 실감이 났다. 어안이 벙벙했다. 장기자랑을 신나게 끝내고 이제야 부끄러운 기분이라면 알랑가. MBTI가 INFJ 인 나는 항상 나를 '내적관종'이라고 표현하는 데, 그 말대로 신나게 깔아놓은 멍석에서 장기자랑을 하고 나니 갑자기 민망해졌다. 하지만 그 부끄러움도 잠시, 이제야 내 무대에 내가 주인공이란 생각이 들었다. 기분이 정말 상쾌했고 몸도 가벼웠다. 뭔진 모르지만 아드레날린, 도파민, 엔도르핀 아무튼 내 몸의 뭔가가 폭발하는 느낌이었다.





 






입었던 유니폼을 갈아입고 반납하니 이제야 좀 가라앉았다. 긴장이 풀리며 커피로 억지로 깬 잠이 솔솔 오려는 찰나, 복도를 걸어가는데 방금 전 면접에 들어오셨던 임원분들을 마주쳤다. 어려운 질문을 한다고 말씀하신 분 얼굴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자연스럽게 꾸벅 인사를 드리니 가까이 와서 토닥여주셨다.






아주 잘했어. 아주. 면접 정~말 잘했어요.




대충 이런 짧은 말을 전해주셨던 것 같다. 그때부터 콩닥이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나 스스로도 만족한 면접이었지만 면접관 분이 칭찬해 주시니 더 마음이 편안해졌다. 피곤하고 졸리던 건 다 사라지고 최종 면접을 준비해야겠다 다시 계획을 세웠다. 최종 면접과 체력 테스트 일정을 내 방송 스케줄과 비교해 보며 이제는 정말 수영 연습을 시작해야겠다 싶었다.





같이 공부하던 스터디 친구들에게 당시 면접 내용은 말했었지만, 사실 이렇게 임원분이 직접 칭찬해 주신 에피소드는 말하지 못했다. 나는 워낙 무슨 일이 다 결정 나고 끝나기 전 까지는 가족에게도 말을 아끼는 편이고 혹여라도 같이 면접 본 친구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주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꼭꼭 숨겨 혼자만의 일기장에 적어놓았다.








그 마음을 일기에 꾹꾹 눌러 적는 데 바로 며칠 전 쓴 일기가 내 눈에 들어왔다. 친구와 걸어가는 게 더 빠를 것 같은 느릿느릿 기차를 타고 두어 시간 간 아유타야란 곳에서 우연히 한 대만 커플을 만나 점괘를 뽑았다는 글이었다.






아유타야는 꽤 넓은 마을이다. 방콕이 태국의 수도가 되기 전 번성 했던 곳이라 불교사원 유적이 많은 동네인데, 도시 자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어 다 보려고 걸어 다니기엔 힘들어 툭툭이나 자전거로 이동해야 하는 곳. 그래서 나와 친구는 자전거를 빌렸더랬다. 하지만 달리다가 바퀴 체인에 빨려 들어간 내 자전거의 자물쇠가 고장 나버렸다.





각 특징이 있는 사원이 여러 개였기 때문에 모두 멈춰서 보고 싶은데 자전거 자물쇠가 고장 나서 한 명은 두 개의 자전거를 지켜야 했다. 이미 지도에 나온 유적지 중 절반 이상은 봤기 때문에 (또 대부분 거의 비슷비슷한 불교 유적이었기에) 이제 그만보고 다른 곳으로 가자는 내 의견과 달리 친구는 이 사원에 꼭 가자고 했다. 지치기도 했고 어차피 다 비슷비슷할 것 같아서 금방 보고 나올 거라 말하며 내가 먼저 사원 안으로 들어갔다.





기억에 이 사원은 정말 반짝이는 금색 불상이 있는 높은 천장이 있는 사원이었다. 그 웅장함에 놀라 여행객다운 모습으로 어리바리하게 돌아다닐 때, 한 대만 커플이 영어로 말을 걸었다.


"너 혹시 한국 사람이니?"


맞다는 내 말에 한국을 좋아한다는 이 커플은 나에게 이것저것 알려주기 시작했다. 여기서 신발을 벗고, 이건 이런 의미야. 사실 이미 많은 사원을 돌아다녀서 대충 다 알았기에 나에게 말을 걸고 싶었구나 생각하며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이런 거 해봤니?"

 

대나무 통을 흔들어 나오는 기다란 막대기를 하나 뽑아 점을 볼 수 있는 곳을 가리켰다. 한국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대만에도 있다니. 천주교지만 이러한 것에 거부감이 없는 나는(휴가로 혼자 템플스테이 가는 걸 좋아한다) 재미 삼아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현금으로 내야 했던 것. 가방을 다 친구에게 맡기고 와서 돈이 없던 나는 괜찮다며 사양했는데, 이런 내 상황을 눈치챘던 지 본인들이 내준다고 하며 당시 우리나라 돈으로 2,000원 정도를 그 커플이 내주며 나를 이끌었다.  







속으로 소원을 빌고 대나무통을 탁탁 털며 하나의 점괘를 뽑는 일. 당시 한국에 도착해서 임원면접이 예정되어 있었기에 꼭 붙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남자친구가 생겼으면 좋겠다. 딱 이렇게 두 가지만 빌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딱 두 가지에 대한 점괘가 나왔다.



일은 이뤄질 것이다. 그렇지만 사랑은 성공적이지 못하다.


아유타야에서 본 점괘



Your plans will be accomplished.


Sickness will get recovered. Debt will be paid back.


Love is not successful. Good luck and fortune is far to reach.








임원면접을 마치고 집에서 일기를 적는 데 이 상황이 머릿속에 영화처럼 그려졌다. 웃음도 나왔다. 누군가에겐 그냥 재미 삼아 보는 점일 수 있겠지만, 이때의 나에겐 적어도 큰 의미로 다가왔다.





그래 사랑은 지금 못 이루면 어때,
나는 진짜 이직하고 싶고 ㅇㅇ항공에 꼭 들어가고 싶어.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으며 일기장을 덮었다. 이제 또 다른 시작이다. 앞으로 있을 체력 테스트 준비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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