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채미 Jan 05. 2024

회사와 회사 사이, 5일

이직의 시간치고 짧았던 시간


드디어 모니터에 최종 합격 글씨가 떴다. 그토록 바라던 일이었다. 중간에 수영테스트에서 물을 먹긴 했어도, 홈쇼핑 쇼호스트 공채에 비하면 이렇게 즐거워도 되나 싶은 채용 기간이었다. 노력하면 그 결과가 항상 좋았으니까. 면접, 시험, 테스트. 이런 단어에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던 내가 즐기고 있는 변한 모습이 신기했고, 그래서 합격한 회사에 더 고마웠다. 아무리 노력해도 밝지 못했던 20대를 보냈고 그 끝자락에 갑작스럽지만 이런 변화가 나에겐 꼭 필요한 거라고 확신했다. 사실 시간이 지난 지금 생각해 봐도 그때의 내 이직은 정말 잘한 것 같다.









하지만 너무 갑작스럽긴 했다. 최종합격 발표 후 바로 5일 뒤 입사하라며 날짜가 나왔다. 요즘 말로 환승이직. 회사를 다니며 이직 준비를 했더니 힘들었기에 중간에 조금 쉬고 싶어서 인수인계 문제도 그렇고 개인 사정으로 입사를 연기할 수 있는지 물어보려 했지만, 같이 합격한 스터디 친구가 항공사는 입사 연도와 차수가 중요하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입사하는 것이 좋다고 추천했다. (실제로 입사하고 보니 시니어리티가 제일이었다.) 나는 나이도 많은 편이니 하루라도 빨리 막내가 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해 결국 5일의 간격을 두고 회사를 옮기게 됐다. 











가족들은 나보다 더 갑작스럽게 느꼈다. 대학교 입학부터 워낙 '통보'를 잘하는 성격을 부모님도 아셨지만 내가 항공사의 승무원이 됐다는 사실은 부모님을 많이 놀라게 해 드렸다.





엄마 나 회사 사표 냈어. 이직해 가지고.




어디로? 쇼호스트?



ㅁㅁ항공




네가 거기서 뭐 하는데?




승무원




승무원이라는 대답이 끝나자마자 거기가 어디라고 네가 가냐, 얼마나 힘든지 아냐(사실 엄마도 모름), 잘 다니던 회사를(나름 대기업 이름을 단 화장품 회사였기에) 왜 그만두냐... 평소 승무원의 '승'자도 언급하지 않았던 나이기에 엄마의 놀람은 더 컸을 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쏟아지는 꾸중에 등짝 스매싱에 정신을 못 차릴 정도였지만 이미 사표는 수리됐고 나는 입사할 예정인데 어떡하라고 뭐 이런 태도로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게다가 입사 후 4개월 간 안전, 서비스, 신입 교육이 예정되어 있었기에 쉴 틈 하나 없었다. 5일간의 짧은 휴식이지만 그동안 고생한 나에게 선물을 주고 싶었고, 바다가 보고 싶었기에 가장 가까운 대천으로 향하는 기차를 탔다.




합격 후 바다가 보고 싶어서 간 대천 해수욕장



속이 후련했다. 아무도 없는 대천 앞바다도,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픈 차가운 바람도 모두 지난 홈쇼핑 생활을 다 청산하고 새로운 백지가 되어 승무원이란 직업으로 시작하라고 다독여주는 것 같았다. 








이 날 바다에서 비워도 너무 심하게 비웠던 탓일까. 입사하고 4개월 동안 받는 교육 과정에서 나는 말 그대로 "백지" 아니 "백치미" 있는 승무원이 됐다. 




지금은 승무원 중에 4년제 졸업생을 더 많이 볼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입사했을 땐 2년제 항공운항과 졸업생인 동기들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그 친구들은 2년 내내 학교에서 승무원 관련 내용을 배워서인지 내가 보기엔 모르는 게 하나도 없는 이미 완벽한 승무원 같았다. 흔히 어피라고 부르는 어피어런스가 완벽했고(헤어와 메이크업 등을 승무원스럽게 잘하는 거라고 생각하면 된다), 나는 모르는 비상장비들의 특징도 미리 알고 있었으며 기내 방송문도 (방송하다 온 나보다) 훨씬 잘 읽었다. 뭐 하나 부족함 없이 전문가처럼 해냈다.






방송을 하며 항상 쌤들의 손길로 헤어와 메이크업을 받던 나는, 스스로 화장을 하고 머리를 묶고 한다는 게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릴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진짜 말 그대로 똥머리 헤어번을 돌돌 말아서 올리는 것조차 하지 못했다. 지금이야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에 U자핀 꽂는 법, 승무원 머리하는 법 많이 있었지만 8년 전만 하더라도 동기들에게 물어봐서 배우거나 강사님께 배우는 방법밖에 없었는데 매일 안전과 서비스 시험을 보며 머리까지 하기란, 거기에 매일 정장 옷을 입으며 출근하기란 꽤 벅찼다. 









그래서 벌점 12점 가까이 받았다. 14점이 되면 승무원 훈련을 담당하시는 분의 경고장을 받는데 아슬아슬하게 살아남았다. 잔머리가 있다고 1점, 매니큐어가 손질이 잘 안 됐다고 1점, 이런 간단한 것부터 밥 먹으러 본사 식당에 가는 셔틀버스에서 경박스럽게 웃었다고 2점인가 3점, 그리고 이건 진짜 부끄러운데... 미국 대사관에 승무원 동기들과 단체로 비자받으러 가는 날이었다. 당시 해외여행을 몇 번 다녀오긴 했지만 다 방송을 하며 잠깐씩 다녀오던 동남아 위주라 비자를 받을 일이 없었는데, 비자라는 걸 여권에 받는 줄 모르고 난 승무원이니까 새로 받은 승무원등록증에 받아와야지 하는 마음으로 승무원등록증만 매고 가서 마이너스 3점. (경위서도 두 장이나 썼다.) 다행인 건 제주도에 살며 리포터 경력이 있는 나이가 비슷한 동기도 여권에 비자받는 걸 몰라서 둘 다 안 들고 왔기에 나만 모르는 게 아니란 사실이 됐다. 위안이 됐다. 





지금 보니 엉망진창이지만 그래도 열심히 했다. 20대 후반의 나이에 21살 내 동생보다도 어린 친구랑 짝꿍이 되어 시험문제를 풀고, 구술 테스트를 하기 위해 밤새 외우고 한 그 시간들이 행복했다. 공부도 할 수 있는데 월급도 주니 얼마나 감사했던지. 다시 여고생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으로 힘든 줄 몰라가며 커피와 초콜릿을 친구 삼아 그렇게 공부했다. 









좋은 결과가 주어졌다. 매 달 회사에서는 교육받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성적우수자를 뽑았다. 4개월의 훈련을 마치고 마지막 달에 전사 통틀어 대여섯 명 정도 뽑혔는데 그중 한 명에 내가 뽑혔다. 교육 과정 내내 아무것도 몰라서 동기들의 '바보언니'로 불리며, 도움 받고 손 많이 가는 언니였는데 마지막 달엔 사장표창을 받으며 인정받았단 사실이 행복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홈쇼핑에서 하던 노력의 절반, 아니 십분의 일도 다 안 하는 것 같은데 결과가 계속 좋으니 신기하고 재밌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 가끔 아닌 적도 있었지만 추억은 미화된다고. 여긴 참 정이 넘치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구나 하고 느끼게 된다. 그 안에서 행복도, 슬픔도, 즐거움도, 그리움도 가득하다. 






승무원들은 짧은 시간에도 말을 참 잘한다. 다들 스케줄 근무를 하다 보니 시간을 맞춰 얼굴 보기가 힘들고, 출근은 또 자주 하다 보니 회사에서 오며 가며 동기들을 만날 때 너무 반가워서 그 찰나의 시간에 많은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최근 비행에서 이런 일이 있었어하고 서로 안부를 물으며 수다 떠는 날이면 "언니 비행이야기는 시트콤 같아. 무슨 에피소드가 이렇게 많아."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생각해 보니 시트콤 같기도, 드라마 같기도 한 일들이 꽤 많았다. 남들보다 적당히 예민하고 꽤나 세심한 나는 이런 일들이 그림처럼 하나하나 다 기억에 남는다. 그 색깔이 바래지기 전에 기억해 보고자 이렇게 또 글을 남긴다.






입사 후 비자 발급을 위해 새로 찍은 여권사진






이전 09화 죽을 둥 살 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