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로 물속에서 안 나올 각오로
최종면접도 아직 붙지 않았지만, 체력테스트를 미리 준비하기로 결정했다. 솔직히 말하면 수영을 해도 해도 너무 못했다. 부끄럽지만 아직도 잘하는 편은 아니다. 노력을 안 해왔던 건 더더욱 아니다.
대학교 2학년 즈음, 휴학을 하고 본격적으로 집 근처 수영장에서 새벽수영을 시작했다. 휴학의 이유는 본격적으로 자소서와 이력서를 쓰면서 나를 위한 시간을 보내보고자였다. 사실 이때 학교에서 교환학생 갈 성적이 안됐기에 방문학생이라고 꽤 큰 돈을 주고 미국에 가는 프로그램을 신청했었다.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었지만 이런 경험을 (부모님의) 큰돈으로 하고 돌아오는 게 과연 내가 하고자 하는 홈쇼핑과 상관이 있을까 오래 고민해 보니 그렇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고, 본격 방송인이 되고자 쉬어가는 시간으로 잡았다. (친한 학교 친구들은 이때 남자는 군대, 여자는 어학연수를 가는 경우가 많았어서 나도 자연스레 휴학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결심한 건 내 한계를 이겨내 보기. 평소 하지 못한 것들을 극복하기로 마음먹었고 그중 하나가 수영이었다. 이유를 모르는 물에 대한 공포심으로 안전장비 없이 물속에 들어가는 걸 두려워했기에 우선 초급반부터 시작했다. 초급반만 세 달을 다녔다. 키판이 있으면 무한 자유형을 할 수 있지만 없으면 레인 절반도 못 가서 땅에 발을 딛고 마는 나.
결국엔 담당 선생님의 권유로 자유형을 다 배우지 못한 채 중급반으로 갔는데 평영에서 또 한계를 느꼈다. 그러는 사이 한 학기 휴학은 거의 다 지나가버렸고, 절반의 성공을 한 채 다시 학교로 돌아오게 됐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최종 면접 이후 수영테스트가 제일 걱정되기 시작했다. 방송이 있는 날은 유동적으로 출퇴근을 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대부분 나인 투 식스 일반적인 직장인과 다를 바 없었기에 퇴근 후 한 시간씩 혼자 연습을 하는 걸로 시간을 채워나갔다. 그나마 주말엔 두세 시간 하는 정도였다.
어차피 최종 면접을 붙어야 수영시험도 볼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조금은 안일한 마음으로 수영과 함께 최종 면접을 준비했다. 최종 면접은 임원 면접과 정 반대 분위기였다. 우선은 내가 예약해 둔 메이크업 원장님이 당시 해외 출장으로 내가 원하는 날짜에 한국에 없으시다는 사실... 별 차이 있겠어 라며 같은 샵에서 다른 실장님께 받았는데 최종 면접에서의 첫 질문이 바로 이 헤어와 메이크업에 관한 내용이었다.
채미 씨는 지난 임원면접 때와 헤어와 메이크업이 다른데, 무슨 이유가 있나요?
정말 당황했다. 그 찰나의 순간에 혹시 면접장에 CCTV가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노트북의 화면을 보고 질문하신 거 보면 뭔가 코멘트가 있긴 한 건데... 이번 메이크업과 헤어가 내 마음에도 썩 들지는 않지만 진짜 별로인 걸까?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너무 뜸 들이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그냥 솔직하게 말씀드리기로 했다.
원래 제 메이크업을 해 주신 담당 선생님이 계신데, 가수 소녀시대 중국 콘서트 일정 때문에 출장을 가셔서요. 오늘은 다른 분께 헤어와 메이크업을 받고 왔습니다. 지난번과는 조금 다르지만 또 새롭고 다양한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어서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후로도 난감한 질문이 이어졌다. 지금 다니는 회사의 월급 시스템은 어떻게 되는지? 홈쇼핑 완판을 하면 정말 인센티브를 받는지? 비행을 하면 홈쇼핑 보다 월급이 적을 수 있는데 괜찮은지? (억대 연봉 쇼호스트의 기사를 보셔서 아마 그런 질문을 하셨던 듯 하다.) 짧은 시간 안에 똑 부러지게 이 복잡한 시스템을 이해시켜 드려야 한다는 생각에 진짜 답변봇처럼 홈쇼핑을 설명하고만 왔다.
지금에서야 생각해 보면 내가 비행한다고 덥석 와버리곤 불만족해서 다시 돌아가진 않을까 뭐 이런 우려의 마음으로 이것저것 떠보려 질문하신 것 같은데 그때 당시엔 과연 면접자인 나에게 관심이 있으신 걸까? 나를 홈쇼핑 업계에 대해 설명하러 온 사람으로 보시는 건 아닐까? 티는 안 냈지만 시무룩했다.
또다시 회사-집-수영 반복하다 보니 체력테스트 날이 다가왔다. 안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임원면접과 달리 홈쇼핑 이야기만 한 최종 면접이 찝찝해서였을까, 1차 떨어지면 2차에 수영 또 하면 되지라는 내 태도 때문이었을까 첫 번째 수영 테스트에서 바로 탈락하고 말았다.
갑자기 무서워졌다. 지금까지 세 달 가까이 노력해 온 것이 고작 수영 때문에 떨어진다면 나 자신을 너무 원망할 것 같았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심정으로 다음 테스트까지 열흘 남짓 되는 동안 미친 듯이 수영만 해 보기로 결심했다.
출근하기 전 새벽 6시에 집 근처 수영장에서 개인 수영을 하고, 점심에 외부 미팅이 없는 날이면 회사 근처 수영장에서 한 시간 또 수영, 퇴근 후 회사 근처 더 큰 수영장에서 7시부터 한 시간 하고 난 뒤, 다시 집 근처 수영장에서 10시부터 11시까지 개인교습을 받았다. 수영복이 마를 새가 없었다. 아무리 먹어도 살이 빠지기만 했다.
2차 테스트 날 회사 수영장에 도착했다. 지난번에 한 번 왔어서인지 조금은 덜 긴장됐고, 1차에 탈락한 사람이 나뿐만 아니라는 사실이 위안이 됐다. 내가 합격한 회사는 25미터를 35초 안에 발에 땅을 딛지 않고 배영을 제외한 모든 영법으로 가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개헤엄을 치든 잠영을 하든 어찌 됐든 도착만 하면 되는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결국은 이 불안한 마음이 숨을 더 차게 만들어 내가 실패하게 만드니까 억지로라도 몸에 힘을 계속 뺐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시험을 봤을 때가 생생하다. 호루라기 소리와 동시에 다섯 명 정도가 같이 출발하는데 내가 절반정도 왔을 때였나 또 갑자기 숨이 막히며 발을 땅에 디딜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는 절대 안 된다는 생각으로 발만 닿지 않게 조금씩이라도 앞으로 가자고, 여기서 떨어지면 나는 평생 나를 원망할 거라고 숨을 쉬는 게 아닌 물을 먹어가며 그렇게 그냥 팔만 휘저었다. 눈에는 눈물도 나는 것 같았다. 차라리 그냥 이렇게 시험 보다가 기절해 버리면 세 번째 기회를 주겠지? 그러니까 여기서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내 발로는 멈추면 안 된다고 그렇게 울고 또 울었다.
마치 누가 내 멱살을 잡고 끌고 가는 것처럼 힘든 시간이 지나고 벽에 손을 닿은 순간 합격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당시 내 기록은 33초. 나중에 수영 개인교습 선생님께 들은 얘기인데, 25M 레인을 걸어가도 33초보단 빠르다고... 어쩐지 내가 시험 보고 나왔을 땐 내 옆에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수영장을 나오고 나서 샤워하며 펑펑 울었더랬다. 이젠 다 됐다는 안도감이었을까, 힘든 시간을 보낸 내가 가여웠을까. 무튼 그 시간은 아직도 내 머릿속에 그림으로 남아 어떤 일이든 열심히 하지 않을 때면 그때의 치열함을 다시 마음으로 되새겨보는 시간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