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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ly Jun 09. 2023

딕테 - 테레사 학경 차



딕테의 저자 차학경은 1951년 한국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그 뒤 31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괴한에게 살해당하기 전까지 버클리대학에서 두 개의 학사학위(비교문학, 미술)와 두 개의 석사학위(예술, 미술)를 받았고 파리의 미국영화연구원에서 공부하기도 했다. 제작자, 감독, 연기자, 비디오/영화 작가, 공간 설치 예술가, 공연/출판 문학가로 불꽃처럼 활약하였으며 여자 ‘이상’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천재 작가로 명성을 떨쳤다.     


딕테는 그녀의 대표 작품 가운데 하나다. 그녀는 이 작품에서 불어, 영어, 라틴어, 한자, 한국어 등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여 언어유희, 단어의 분해, 의미의 연쇄 변화 등 방대한 언어적 실험을 구사하였다. 또 영화 대본 같은 현재형 묘사, 시제 부정의 원형 동사 등을 사용하여 글을 읽는다기보다는 영화를 관람하는 듯한 효과를 주기도 했다. 책을 번역한 김경년 교수는 이와 같은 현재형의 묘사가 시공간의 없음, 즉 시공을 초월한 영원성을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가끔 영어문장으로는 서툴게 느껴지지만 한국어로 대체시켜보면 자연스러워지는 문장들이 있는데 이는 이방인의 시선을 견지하며 영어를 의도적으로 낯설게 한 결과물인 듯하다. 반대로 이 책에 여러 언어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영어로 써졌기 때문에 번역을 거치면서 그 특유의 언어적인 맛이 손상됨은 어쩔 수 없는 듯하다. 더할 나위 없이 세심하고 아름다운 번역이지만 번역 작업 특유의 태생적 한계성 때문이다.     


딕테는 총 1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장은 그리스 신화의 10명의 뮤즈와 그 뮤즈가 주관하는 학문에서 소제목을 따왔다. 그 속에는 역사적 여성들(유관순, 저자의 어머니, 성녀 테레사 등)의 사진 같은 흑백의 이미지가 실려 있다. 책의 문체는 대부분 시의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산문 역시 산문시형으로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하나의 커다란 줄거리 없이 한 장면에서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는데 이는 한 편의 전위적인 영화를 감상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에라토 – 연애시’에서는 관객이 극장 안에 들어서고 스크린 안에서 내용이 펼쳐지기도 한다. 즉 ‘텍스트를 받아쓰는’ 행위와 유사하게 ‘영상을 목격하는’ 행위가 묘사되어 있는 셈이다.     


성녀 테레사, 잔다르크, 유관순, 사포 같은 위대한 여성 선구자들의 말을 받아쓰면서, 저자는 마지막에 이르러 스스로 말하는 여자(diseuse - 화술가, 운명을 말하는 사람의 여성명사)가 된다. 유관순의 생애를 묘사할 때는 일제강점기 때 짓밟혔던 조국의 역사를, 어머니의 생애를 묘사할 때는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전반적으로 소외된 이방인으로서의 의식을 견지하고 있으며 시공을 초월한 신비한 의식을 통해 기억을 불러내고 재생시키는데 이는 똑같은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다.           



책의 첫머리는 여류 시인 사포의 시 구절에서부터 시작된다.      


육신보다 더 적나라하고, 뼈대보다 더 강하며, 근육보다 더 탄력 있고, 신경보다 더 예민한 이야기를 쓸 수 있기를......


사포


이어서 받아쓰기 형식으로 된 불어의 문단과 그것을 영역한(내용이 꼭 같지만은 않은) 문단이 등장한다.     


문단 열고  그날은 첫날이었다  마침표  그녀는 먼 곳으로부터 왔다  마침표  오늘 저녁 식사 때 쉼표 가족들은 물을 것이다  쉼표  따옴표 열고  첫날이 어땠지  물음표  따옴표 닫을 것 적어도 가능한 한 최소의 말을 하기 위해  쉼표  대답은 이럴 것이다  따옴표 열고  한 가지 밖에 없어요  마침표  어떤 사람이 있어요  마침표  멀리서  온  마침표  따옴표 닫고     


DISEUSE     


속에서 웅얼거린다. 웅얼웅얼한다. 속에는 말의 고통, 말하려는 고통이 있다. 그보다 큰 것이 있다. 더 거대한 것은 말하지 않으려는 고통이다. 말하지 않는다는 것. 말하려는 고통에 대하여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속에서 들끓는다. 상처, 액체, 먼지, 터뜨려야 한다. 배설해야 한다.     


말하려는 욕망 못지않게 말하지 않으려는 욕망도 크다. 말은 소통을 전제로 하는데 말해도 소통이 되지 않거나 의견의 불일치로 더 큰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말해서는 안 된다는, 말하지 않으려는 욕망 역시 말하려는 욕망만큼이나 크다.     


오 뮤즈여, 나에게 이야기해주소서

이 모든 것들에 대하여, 오 여신이여, 제우스의 딸이여

당신이 원하는 어디에서든 시작해, 우리에게까지도

이야기해주십시오.     


차학경은 이렇게 뮤즈에게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간청한다.          

 


둘째 장은 ‘클리오-역사’이며 이 장에서는 유관순의 생애와 3.1운동, 하와이 한인 동포들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탄원서, 그리고 십자가에 매달려 총살당하는 한국인들의 사진이 실려 있다.     


왜 지금 그 모든 것을 부활시키는가. 과거로부터, 역사를, 그 오랜 상처를, 지난 감정을 온통 또다시, 그것은 똑같은 어리석음을 다시 사는 것을 고백하기 위해서이다. 지금 그것을 불러일으켜 잊혀진 역사를 망각 속에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말과 영상 속에서 또다른 말과 영상을 조각조각 끄집어내어, 잊혀진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대답을 끄집어내기 위해서다.      


어떤 사람들은 나이를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 시간이 멎는다. 시간은 어떤 사람들을 위해서는 멈추어준다. 그들을 위해 특별히, 영원의 시간, 나이가 없는, 시간은 일부 사람들을 위해 고정된다. 그들의 영상, 그들의 기억은 부패되지 않는다. 자신을 재생산과 번식으로, 영혼으로부터 추출된 고정적 이미지와는 달리, 그들의 면모는 성스러운 아름다움, 피할 수 없는 것이나, 죽음도 아니고 죽는 – 것 자체를 환기시킨다.     


기억과 정면으로 마주대보면, 그것은 빠져 있다. 그것이 빠져 있다. 여전히, 시간은 어떠한가. 움직이지 않는다. 거기에 머물러 있다. 아무것도 빠뜨리지 않는다. 시간이 말이다. 나머지 모든 것. 모든 나머지 것들. 모든 다른 것은 시간에 지배된다. 시간에 대답해야 한다, 다만. 사산된, 무산된. 겨우, 영아. 씨, 싹, 새싹, 그보다도 못한. 잠자고 있는, 정체되어 있는, 사라져버린.    

 

목이 잘려진 형상들. 낡은, 흉진, 이전의 형상의 과거의 기록, 현재의 형상은 정면으로 대면해보면 빠진 것, 없는 것을 드러낸다. 나머지라고 말-해-질, 기억. 그러나 나머지가 전부다.          



세 번째 장은 ‘칼리오페 –서사시’로 만주 용정에서 태어난 저자 어머니의 생애와 천주교 미사, 예수의 고난, 그리고 저자 자신의 18년 만의 귀국 경험 등으로 엮여 있다. 이 세 번째 장은 ‘어머니, 당신은 열여덟 살입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당신은 어둠 속에서 말합니다. 비밀 속에서. 바로 당신의 언어를 말입니다. 당신 자신의 언어. 당신은 아주 부드럽게, 속삭여 말합니다. 어둠 속에서, 비밀스럽게. 모국어는 당신의 안식처입니다. 당신의 고향입니다. 당신의 존재 그 자체입니다. 진정으로 말한다는 것은 당신을 슬프게 합니다. 그리움. 말 한마디를 발설하는 것은 죽음을 무릅쓰는 특권입니다. 당신뿐만 아니라 모두의 죽음을. 법으로 혀가 묶이고 말이 금지된 당신들 모두 하나. 당신은 마음 한가운데에 위는 붉고 아래는 푸른색인, 하늘과 땅을 의미하는 태극; 타이치t’ai-chi 마크를 가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상징입니다. 속한다는 상징. 목적의 상징. 다시 찾을 수 있다는 상징. 탄생에 의한. 죽음에 의한. 피에 의한. 당신은 그 상징을 당신의 가슴 속에, 당신의 마-음 속에, 당신의 마-음 속에, 당신의 영-혼 속에 가지고 다닙니다. 


당신은 노래합니다.     

울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 필 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그리고 나서 저자는 역사를 쓰고 말하려고 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묘사한다.     


한 입에서 다른 입으로 전해져, 한 사람이 읽고 다른 사람이 받아 읽으면서 그 말들은 온전한 의미를 실현하게 됩니다. 바람. 여명 또는 황혼에 진흙의 땅과 철새들 남쪽으로 향하는 철새들은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귀신의 베일을 쓴 대변자들입니다. 통신. 말을 전파하기 위한.          



네 번째 장은 ‘우라니아–천문학’이며 다섯 번째 장은 ‘멜포메네-비극’이다. 이 장에서는 마침내 일제로부터 해방되었으나 6.25에 이어 4.19까지 겪으면서 끝나지 않고 반복되는 민족의 비극에 대해 이야기한다.     


4월 19일

한국, 서울     

어머니께     


4.19. 사 십구, 4월 19일, 18년이 지난 후. 아무것도 변한 것은 없고, 우리는 정지 상태입니다. 나는 이제 다른 언어, 제2의 외국어를 말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우리는 떠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정지 상태일 뿐.

6. 25가 아닙니다. 육 이십오. 1950년 6월 25일. 오늘은 아닙니다. 이날은 아닙니다. 어머니가 묘사하셨던 폭탄은 없습니다. 하나씩 하나씩 하나 다음에 하나씩, 곤충처럼 번쩍이는 갈색의 금속 덩어리, 그것은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북쪽 앞에 선 사람 남쪽 앞에 선 사람에게는 봄에는 북쪽 겨울에는 남쪽으로 이주하는 모든 새가 귀환을 동경하는 심정을 비유한다. 목적지. 고향.     

목적지는 없다. 또 다른 전쟁으로부터 또 다른 피난처를 향하는 것 외에는. 목적지를 향한 여러 세대의 교체와 역사의 행보에는 많은 기만들이 있다.     


어머니는 그것이 헛되지 않을 것임을 알았습니다. 삼십육 년간의 유배. 삼십육 년을 삼백육십오일로 곱한 것. 그 어느 날 어머니의 나라가 어머니 자신의 것이 되리라는 것을. 그날은 드디어 왔습니다. 일본은 세계대전에서 패배했고 몰락하여 자기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어머니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남쪽으로 내려왔습니다. 단 한 가지도 가지고 온 것 없이, 사진 한 장, 기억을 회상시킬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이, 어머니의 나라가 해방되는 것을 보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버렸습니다.     


또 하나의 서사시로부터 또 하나의 다른 역사. 빠져 있는 이야기로부터. 수많은 이야기들로부터. 상실. 역사의 기록들로부터, 또 하나의 다른 이야기를 하기 위한, 또 다른 낭송들을 위한.    

 

우리의 목적지는 찾기를 위한 끊임없는 몸짓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것의 영구한 유배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여기 이제 열어덟 해 만에 돌아온 지금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똑같은 전쟁과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똑같은 고투 속에서 똑같은 목적지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둘로 잘려졌습니다. 해방자라는 이름을 가진 추상적인 적, 보이지 않는 적에 의해. 그들은 이 갈림을 편리할 대로 내란이라고 불렀습니다. 냉전. 막다른 궁지.

나는 똑같은 군중, 똑같은 반란, 똑같은 항거 속에 갇혀 그 움직임에 따라 운반됩니다.      


그리고 시위에 참여하려는 오빠와 그런 오빠를 필사적으로 말리는 어머니, 시위 끝에 목숨을 잃은 오빠에 대한 묘사가 이어진다.     


18년이 지났습니다. 18년 만에 처음으로 나는 여기 왔습니다, 어머니. 우리는 이 기억이 아직 생생할 때, 여전히 새로울 때, 이곳을 떠났습니다. 나는 다른 나라의 언어, 제2의 언어로 말합니다. 이것이 내가 얼마나 멀리 있나를 나타냅니다. 그때로부터. 그 시간으로부터. 나는 그때로 돌아가 지금 아주 정확하게 그 시간, 그 날짜, 그 계절, 그 연기 안개, 가랑비 속으로 정확하게 다시 돌아갑니다. 나는 모퉁이를 돌아서고 그곳엔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무도 나와 마주치지 않았습니다. 도로엔 온통 돌조각들. 눈을 비비려고 손바닥을 눈에 대자 눈물이 마구 흘러내립니다. 책가방을 맨 두 학동이 서로 팔짱을 끼고 난데없이 나타납니다. 그들의 하얀 스카프, 그들의 하얀 교복 셔츠, 하얀 가스의 잔여물 속으로, 울고 있습니다.     


차학경은 의식을 벌이면서 시간의 바깥에 있는 죽은 존재들과 이름 없는 존재들의 한을 받아쓰기하고자 한다.     

그뿐 아니다. 버려져서

망각으로 해체되기를 거부한다.

그 기억으로부터 먼지가 빠져나오고 아직도 티끌이

아직도 물질이, 그리고 호흡이 움직인다. 죽은 공기

썩은 물이, 아직도 안개를 뿜어낸다. 순결한 모험이

반딧불처럼 여린 마찰에도 발화되어 자신을 불태운다, 타버려야 할

손실. 타지 말고, 빛을 발하라. 잃어버림으로써

빛을 비추어라. 잃어버림으로써 빛을 내라.

그래도 그것은 잃는 것이 아니다.

그녀의 이름. 처음에는 이름 전체. 그 다음은 한 음절 한 음절씩 입 속에서 센다. 그 음절들이 떠오르게 한다 입술이 보이지 않도록 하면서 음절은 거듭거듭 떠오른다 그 말을 하려고 입을 열지도 않는다.

단지 이름들 영상도 없는 오직 이름들 그녀의 것이 아닌 오직 그녀

혼자의 것이 아닌 그녀 전체의 것이 아닌 그리고 그 영상조차

온전한 전체가 아닌

존재하는 그녀의 분체 그녀의 병약함이

부싯돌처럼 자의적으로 일어나

타오르기 위한 순결한 모흠 죽은 물질.

무명의 타인들 그녀에게서 떨어져나간 부분들이 그녀를 대체한다.     


자기 몸에 다른 존재의 기억을 불러들이는 과정은 필연적으로 자기를 죽이는 과정을 동반한다. 이는 다음과 같은 구절로 표현된다. ‘스스로를 먹어삼키기, 자기 자신을 삼켜버리는 것. 계속 사라지면서. 자기 짝을 멀어버리는 곤충’. 아홉 번째 장의 ‘테르프시코레-합창 무용’에서도 ‘매듭진 육신의 녹여냄, 당신의 말을 보상금으로’라는 구절을 통해 이와 같은 과정을 강조한다.          



여섯 번째 장은 ‘에라토-연애시’이다. 이전 장에서 한국이라는 약소국의 입장을 받아쓰기했다면 이 장에서는 여성이라는 약자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머니 당신은 아이를 등에서 가슴으로 옮겨 아이에게 당신의 젖가슴을 내줍니다. 당신 아이의 굶주림은 곧 당신 자신의 굶주림, 아이는 양식과 함께 당신의 아픔을 가져갑니다.     


어머니 당신은 남편을 등에서 가슴으로 옮겨 남편에게 당신의 젖가슴을 내줍니다. 당신 남편의 굶주림은 곧 당신 자신의 굶주림, 남편은 그의 양식과 함께 당신의 아픔을 가져갑니다.     


아마도 그녀는 그를 사랑했던 것 같다. 그녀의 남편을. 아마도 끝내는 그를 사랑했을 것이다. 아마도 처음부터 이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처음에는 달랐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랑했을 것이다. 그녀가 그의 아내가 되도록 타의에 의해 선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르는 사람. 그녀에게는 낯선 사람이었다. 그녀가 시집가야 했던 사람은. 그녀에게 결정되어 있었다. 이제 그녀는 그에게 속하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그녀는 그를 사랑하도록 배웠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기정 사실이었다. 그녀는 그가 주는 것은 무엇이든 받았다. 그가 그녀에게 주는 것은 얼마 없었으니까. 어떻게 된 것인지 어떻게 되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하여 아무런 예비 지식도 없이 그녀는 무조건 받고 또 받았다. 그녀에게 주어진 것은 얼마 없었다. 아내니까. 그런 거다. 그래왔다. 여자니까. 질문하지 말라. 주어진 것 외에는 전혀 기대하지 말라. 주어진 것 외에는. 그녀는 그의 아내, 그의 소유물이었고, 아무것도 거절할 수 없는 그, 그녀의 남편, 그 남자에게 속해 있었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그때는 그랬을 것이다. 아마 지금도.       

   


일곱 번째 장은 ‘엘리테레-서정시’다. 이 장에서 차학경은 의식을 통해 기억을 되살리는 작업에 착수한다.  

   

죽은 시간, 텅 빈 우울이 매장된다, 다시 소생하기에는 박약하고 기억에는 저항한다. 기다린다. Apel. Apellation. 발굴. diseuse(말하는 여자라는 뜻)로 하여금 기억하게 하라. Diseuse de bonne aventure(여성 점술가). 그녀로 하여금 불러내도록 하라. 그녀로 하여금 오래 오래 다시 또다시 내려지는 저주를 깨뜨리도록 하라. 그녀의 목소리로, 땅바닥을 꿰뚫고, 타르타우러스의 벽을 뚫고 우묵한 그릇의 표면을 빙빙 돌며 긁어내게 하라. 밖으로부터 소리가 들어가게 하라. 그릇의 텅 빔 그것의 잠들어 있음에. 그때까지.     


(...)     


죽은 신들. 망각된. 없어져버린. 과거

노출된 층의 먼지를 털어내고

깊은

그 밑의 우물을 드러내라. 죽은 시간. 죽은 神들, 침전.

돌이 된 것. diseuse인 사람으로 하여금

먼지를 털고 우물의 거리(距離)를 불어 없애도록 하라.

diseuse인 그녀로 하여금 돌 위에 9일 낮과 밤을 앉아 있도록 하라. 그럼으로써. 다시 일어서게 하라. 엘레우시스          



여덟 번째 장은 ‘탈리아-희극’이다.     


그녀는 글을 쓸 수만 있다면 계속 살 수 있다고 자신에게 말한다. 그치지 않고 계속 쓸 수만 있다면 하고 자신에게 말한다. 글을 씀으로써 실제의 시간을 폐기할 수 있다면 하고 자신에게 말한다. 그녀는 살 것이다. 그녀 앞에 그것을 전시해놓고 그것의 엿보는 자가 될 수 있다면.     



아홉 번째 장 ‘테르프시코레-합창 무용’에 이어 열 번째 장 ‘폴림니아-성시’에는 한 여성이 우물가에 물을 길으러 갔다가 어린 여자아이를 발견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여자는 어린아이에게 왜 집을 멀리 떠나왔느냐고 묻는다. 여자아이는 앓고 있는 어머니를 위해 이웃 마을에서 약을 구해 가지고 가는 길이었다고 대답한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구니 하나를 건네주었다. 바구니에는 여러 개의 주머니가 들어있었는데 주머니는 검은 끈으로 묶여 있었다. 여자는 주머니를 하나씩 꺼내면서 이것이 그녀의 어머니를 위한 치료제이며 어떻게 약을 준비하는지를 설명해주었다. 이 일화는 아직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인 저자가 여신으로부터 상처받고 소외당한 존재(수난을 겪고 있는 모국 내지는 저자의 어머니 같은 여성)를 치유하는 법을, 여신의 말을 받아쓰기함으로써 그 비법을 전수받는 것을 상징한다.     


엄마 나를 창문으로 올려주세요. 그의 시야로부터 너무 높이 올려다보는 어린아이. 

(...)

암석의 무게에 매여 있는 밧줄들을 풀어주세요. 처음엔 밧줄들, 그리고는 정적을 깨트리기 위하여 나무 위에 긁히는 소리, 종들이 떨어지자 울림이 뒤따른다. 정적을 깨트리기 위하여 무게를 들고 있는 밧줄이 나무에 긁히는 소리를. 종들이 떨어지며 하늘에 소리를(a peal은 또한 appeal-청원하다-로 읽힐 수도 있다) 떨친다.     

그리하여 마침내 받아쓰기를 마친 저자는 말할 수 없다는 고통을 극복하고 스스로 말하는 사람, 청원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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