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나 드라마에 원작 소설이 있는 경우 영상 매체가 원작보다 좋다고 느낀 적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 소설이 훨씬 좋았는데 이 드라마는 원작 이상으로 좋았던 기억이 난다. 굉장히 어렸을 때 본 드라마인데 기존 드라마와는 결이 좀 다른 느낌이었다. 인물들 간의 대사를 통해 서사가 진행되는 일반적인 드라마와는 달리 성우가 내레이션을 통해 주인공의 머릿속 상념들을 읊어주곤 했다. 주인공이 장님이고 내면의 심리 변화가 드라마의 주된 테마였기 때문인 듯하다. 원작은 ‘롤리타’로 유명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어둠 속의 웃음소리’다.
남자 주인공(배우는 권인하)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부모가 물려준 유산은 쓰고도 남을 정도였고 평론가라는 그럴듯한 직업과 단란한 가족도 있었다.
그런 그에게도 트라우마가 있었다. 어렸을 때 나무 위에서 놀다가 아버지가 다른 여자와 내연 관계를 맺는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다. 충격을 받은 그는 나무에서 떨어졌다. 놀란 어머니가 달려 나오다가 남편의 외도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부부 싸움을 하게 되었고 아버지는 화를 내며 차를 몰고 나가 버렸다. 운 나쁘게도 아버지는 교통사고를 일으키고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어른이 된 그는 아버지의 유산을 상속 받아 부자가 되었다.
이제 한 가족의 가장이 된 그는 짓궂게도 아버지의 전철을 그대로 밟게 된다. 우연히 마주친 어떤 여자(배우는 이미연)에게 반해서 불륜을 저지르게 되었던 것이다. 갑작스러운 사고를 당해서 장님이 되어버린 그는 그 여자와 둘이서 고립된 삶을 살기 시작한다. 집안에는 분명 두 사람밖에 없는데 어디선가 다른 사람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때부터 그의 번뇌가 시작되었다. 이 집에 너와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있냐고 물어보면 여자는 그럴 리가 없다면서 그를 안심시켰다. 아마 환청을 들은 걸 거라고. 남자는 여자의 말을 믿기로 결심했다. 마음의 평화를 위해 그는 그녀가 하는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도 웃음소리는 점점 더 커져 가고 점점 더 노골적이 되어 갔다. 따라 웃는 그 여자의 웃음소리도 점점 더 비웃음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밥을 먹기 위해 식탁에 앉아 있을 때 그는 옆자리에 여자 외에 다른 누군가가 있는 것을 '느낀다.' 서재에서도 거실에서도 끊임없이 다른 사람의 존재가 느껴졌다. 그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여자가 왜 다른 남자를 끌어들여서 자신을 괴롭히려 드는지를. 그러나 그가 미치지 않았다면 그는 분명 다른 남자의 웃음소리를 들은 것이었다.
잃어버린 시각 대신 육감이 발달할수록 다른 남자의 존재는 더욱 또렷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여자를 의심한다는 것은 시력을 잃은 그가 마음까지 병들어가고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씩 변하는 자기 마음을 그는 지옥 들여다보듯이 들여다보았다.
웃음소리는 더 이상 자신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았다. 여자와 웃음소리의 주인공은 어린아이가 힘없는 곤충을 괴롭히듯이 그의 무기력함과 신체적 결함, 좌절을 관찰하면서 가학적인 쾌감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는 그들의 인형, 바보, 광대로 전락했다.
분노와 배신감, 질투로 이성을 잃지 않게끔 제정신을 유지 시켜 준 달콤한 거짓말은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는 현실을 직시하기로 결심했다. 서재 깊숙이 숨겨둔 권총을 쓰다듬으면서 복수를 계획했다.
한동안 그는 아주 얌전하게 지냈다. 집에 두 사람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혹은 그녀가 불러들인 제 삼의 인물을 암묵적으로 받아들이기로 작정한 것처럼.
마침내 여자가 마음을 놓았을 때 그는 여자에게 총부리를 겨누었다. 여자의 애인인 제 삼의 남자가 나타나서 두 사람은 몸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실랑이 끝에 총알이 발사되었고 그는 자기가 쏜 총알에 맞고 말았다. 흐릿하게 의식을 잃어가는 와중에 그는 생각했다.
편안하다.
드디어 끝났다.
당시에는 너무 어려서 이 드라마가 왜 나를 사로잡았는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진실은 죽음과 맞닿아 있다는 것을 거듭 확인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아이 때부터 나는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세상이 듣고 싶어하는 것은 거짓이다. 사람들은 진실을 혐오한다.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그런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이야기는 죽음과 맞닿아 있다’는 글이었다. 이발사는 임금님 귀가 당나귀 귀라는 사실을 발설할 경우 죽임을 당하게 되어 있었다. 그는 진실을 말하고픈 욕구를 대나무밭에서 소리를 지르는 것으로 일정 부분 해소한다. 반면에 아라비안나이트의 세헤라자드는 자신에게 예정되어 있는 죽음을 이야기를 통해 지연 시킨다. 세헤라자드의 이야기는 있는 그대로의 진실이 아니라 왕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재미있게 각색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세 가지 길 밖에 없다. 첫 번째는 달콤한 거짓말을 믿고 장님인 척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두 번째는 고통스럽고 뒤틀린 진실을 직면하는 것이며 세 번째는 진실을 직면하되,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정말 진실한 말은 발설하는 순간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그가 겨눈 총알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