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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ly Jun 07. 2023

연극 <잘 자요 엄마>

연극 '잘자요 엄마' 중에서



희곡 ‘잘자요, 엄마’의 배경은 미국 남부의 어느 시골집이다. 이 집에는 노년기에 접어든 엄마와 중년기에 접어든 딸이 살고 있다. 저녁 8시 15분이 되자 딸은 어머니에게 자살할 거라고 선언한다. 이후 90분 동안 관객들은 딸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아무것도 그녀의 결심을 돌이키지는 못했다. 90분 뒤 총소리가 울려 퍼지고 연극은 막을 내린다.


모녀는 평소때와 같은 토요일을 보내려던 참이었다. 어머니의 손톱에 매니큐어를 칠해주고 사탕 그릇을 채워 놓는 평범한 토요일. 딸 제씨는 사다리를 타고 다락에 올라가 아버지의 유품인 권총을 꺼내온다. 어머니 델마는 딸이 강도를 대비해서 총을 꺼낸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제씨는 그 총으로 자살하겠다고 선언한다.


처음에 어머니는 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대화를 거듭할수록 딸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델마는 딸의 마음을 돌려놓기 위해 화를 내보기도 하고 감언이설을 늘어놓기도 하지만 제씨는 식료품은 어떻게 주문하고 빨래는 어떻게 하면 되는지 등 미리 작성해둔 목록을 체크하면서 어머니를 교육시킬 뿐이다. 90분 동안 제씨는 냉장고 청소를 하고 코코아를 만들어 먹고 소파커버를 씌우면서 분주하게 움직인다.


제씨는 도대체 왜 자살하려는 걸까. 그녀가 내뱉는 무미건조한 대사를 듣다 보면 자살의 동기를 파악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느껴진다. 오히려 왜 죽으면 안 되는지를 관객들에게 스스로 자문해보게 만든다. 그래도 그들의 대화를 듣다 보면 제씨가 현재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대략 짐작해볼 수 있다.


엄마  릭키 때문에 이러니? 아니면 쎄실? 아니면 간질병 때문에? 아니면 머리칼이 자꾸 빠져서 그러니? 아니면 커피를 너무 많이 마신 탓이냐? 그도 아니면 허구헌날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자니 지겨워서 그래? 얘, 도대체 왜이러는 거냐, 응?


제씨는 간질병 환자다. 직업이나 사교활동 없이 집에만 틀어박혀 지내며 릭키는 가출한 제씨의 아들이고 쎄실은 그녀와 릭키를 버리고 간 남편이다.


엄마  (쎄실은) 마누라와 제 새끼를 버리고 떠난 놈이야. 남편과 애비의 도리를 저버린 놈이라구.


간질 발작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제씨는 어머니에게 묻는다.


제씨  근데 내가 어떻게 침대에 누워 있지?

엄마  글쎄다, 네 생각은 어떠니?

제씨  엄마가 도저히 날 들어올릴 순 없을테구. 어떻게 한 거야?

엄마  네 오빠야. 하지만 언제나 걔가 오기 전에 널 싹 씻겨놓고, 또 네가 깨어나기 전에 돌려보냈다.

제씨  그냥 바닥에 놔둬두 되잖아.

엄마  그건 네가 좀더 좋은데서 깨어나길 바랬기 때문이야, 됐니?


델마와 제씨는 부모 자식이자 일종의 공생관계라고 볼 수 있다. 간질병이 있는 내성적이고 비사교적인 딸이 남편에게 버림받고 번번한 직업도 갖지 못하자 어머니는 그녀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온다. 그게 딸을 위한 것이든 자신을 위한 것이든 일종의 공생관계인 것만은 사실이다. 두 사람이 딱히 적대적인 사이인 것은 아니다. 대사를 통해 델마는 제씨가 간질 발작을 일으킬 때마다 그녀의 오빠와 같이 제씨를 보살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델마는 자살하려는 딸을 회유하기 위해 생일 선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엄마  제씨야, 얼마 안 있으면 네 생일이야. 우리가 널 위해 어떤 선물을 준비했는지 궁금하지 않니?

제씨 엄만 더스팅 파우더, 올케 언니는 분홍색 실내복, 그리고 도슨 오빠는 슬리퍼... 올케언니가 산 옷과 잘 어울릴 거라고 하겠지. 어차피 작아서 신지두 못할 테지만.


도슨은 제씨의 오빠인데 매년 동생의 생일 선물을 챙겨주는 성의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 도슨의 선물은 매년 똑같은 것이며 그의 아내 로레타의 발에나 맞는 치수이기 때문에 제씨에게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즉, 도슨의 관심과 애정은 이처럼 관례적인 반복행위를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델마도 마찬가지다.


엄마  그리구 아빠 총도 안돼. 그것두 결국 내꺼니까. 게다가 여긴 내집이야. 내집에선 절대로 안돼.

제씨  엄마, 왜 이래?

엄마  하여튼 안돼. 절대로 그렇겐 안돼. 내 그냥 내버려둘줄 알아? 이 집은 엄연히 내 앞으로 돼 있어.

제씨  방에 들어간 다음엔 문을 잠글거야. 엄마가 의심받지 않게. 물론 경찰이 조사를 할테지만 엄만 문제 없을거야.

엄마  글쎄 내 집에선 안된다니까!


(...)


엄마  제씨야, 너없이 날보구 어떻게 살아가란 말이냐? (...) 집안에 문단속을 해주고, 아침이면 먼저 일어나 커피물을 올려놓구 그렇게 하루하루 내 늙어가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봐 줘야 돼. 그러다 때가 되면 내가 죽는 걸 도와줘야지. 나 혼자선 못해. 제씨야, 난 너하곤 틀려. 난 조용한 것두 질색이고, 죽고 싶지두 않을뿐더러 네가 가는 것두 싫어 제씨야. 어떻게 내가...


두 사람의 대화로 짐작해보건데 이 둘의 관계는 진정한 소통이나 이해가 부재하는 미지근하고 냉랭한 모녀관계에 가까운 듯하다. 오빠인 도슨과 마찬가지로 델마의 태도에도 관습적이고 상투적인 면모가 있다.


엄마  난 무슨 일이건 생각하는 따윈 흥미 없어. 되는대루 사는 게 좋아.


(...)


엄마  내가 뭐땜에 사는진 나 역시 모르겠지만, 그런건 생각하구 싶지두 않다.


(...)


엄마  정확히 무슨 생각을 했다구 말한 적은 없다. 아니, 이 외딴 곳에 쳐박혀 사는 내가 뭘 생각하구 뭘 배울 게 있었겠니? 그리구 이때까지 뭘 알구 생각하며 한 일은 절반도 채 안 돼. 일은 늘 생기지. 닥치는 대로 해결하고 다음 일을 기다리는 수밖에.


델마는 스스로 인정하듯이 단순한 사고의 소유자이다. 그녀는 생각하기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모녀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죽음이란 공포영화처럼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엄마  그런데 그놈이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또 어떤 소릴 내는지 알 수가 없으니 어떻게 날 보호해야 하는 거지? 그럴 수 있다손 치더라두 몹시 아프게 한다거나, 단번에 끝내지 않구 질질 끈다든지, 아니면 미처 준비도 돼 있기 전에 찾아들면 난 어쩌면 좋지?


델마는 제씨와는 달리 죽고 싶어 하지 않는다. 죽음은 너무 무겁고 깊은 문제이기 때문이다. 제씨는 이처럼 상투적인 성격의 델마와 강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제씨에게 이와 같은 비사교성과 사색가로서의 면모를 물려준 사람은 고인이 된 그녀의 아버지다.


엄마  (너희) 아빠가 의자에 앉아있을 때면 마치 그 “낚시가고 없음”이란 간판을 목에 걸구 있는 것 같았지. 낚실 가서두 아빤 그저 멍하니 강물 저편을 쳐다보구만 있었어. 구름이 몰려가는 모습을. 아빠 배가 보이는 곳까지 직접 가 봤었지. 넌, 그래 넌 분명 아빠가 맨날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는지 알구 있을 거야. 그게 뭐지?


(...)


엄마  너두 알겠지만 아빤 정말로 낚시를 간 적이 없어. 단 한번두. 정작 낚시도구함에는 담배만 잔뜩 들어차 있었구. 강가에 차를 세우고는 차 안에 마냥 앉아 있는 게 고작이었어.


(...)


엄마  허구헌 날 혼자 멍하니 앉아 있게 내버려 뒀어야 했다는 말이냐? 네 아빠처럼? 평생 멍하니 앉아 있게?


제씨  난 아빠가 앉아있는 모습이 참 좋았어. 덩치는 크지만 늙고 시들어버린 우울한 아빠의 모습. 참 조용했어.


덩치는 크지만 늙고 시들어버린 우울한 아빠는 삶에 애착을 잃은 제씨의 모습과 일맥상통한다. 자신과 비슷한 성향을 가졌기 때문에 제씨는 아빠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좋아했던 것 같다.


제씨  나한테 변함없이 진실한 건 담배밖에 없어. 내가 찾을 땐 늘 곁에 있어 주거든. 아무 말없이 조용하게.


제씨가 죽음이나 담배처럼 조용한 것을 선호하고 세상과는 담을 쌓고 사는 이유는 그녀가 자신의 어머니와 같은 피상적인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생명활동을 지속하려 하고 죽음은 회피하려 든다. 또 인간은 사교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타인과의 소통을 거부하고 혼자 멍하니 앉아있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아빠가 목에 걸고 있는 “낚시가고 없음” 팻말은 그의 영혼이 현재 이 세계에 있지 않다는 부재의 표현임과 동시에 일체의 소통을 거부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제씨나 그녀의 아버지는 인간으로서의 본능을 거스르고 있는데 이는 델마가 가지고 있는 인간 특유의 상투성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그런데 제씨는 왜 이토록 삶을 부정하는 것일까. 제씨는 자기 아들 리키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제씨  얼굴만 봐두 알 수 있어. 목소릴 들어두 그렇구. 우린 생각하는 것까지 똑같애. 세상은 불공평하다는 거지. 한 가지 다른 게 있다면 난 가만히 틀어박혀 있구, 걘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어떻게든 그런 세상에게 복수를 하려구 발버둥치구 있다는 것 뿐이야. 그리구 걘 자기 외엔 누구도 믿어선 안 된다는 걸 잘 알구 있어. 나한테서 배운 거지. 바둥거리며 일자리를 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두. 그렇게 썩은 마루바닥을 걷듯 떠돌고 있는 거야. 그 마루바닥을 깐 게 누군 줄 알아? 바루 나야.


제씨는 세상에 대한 신뢰감을 상실한지 오래다. 신뢰감의 상실은 세상의 부당함에 기초하고 있다.


엄마  넌 직업을 가질 수도 있어!

제씨  그럼, 근데 언젠가 전화기 판매사원을 했을 땐 그 일 해서 전화요금조차 못 냈구, 병원 구내 선물코너에 있을 땐 애써 웃을수록 사람들이 슬금슬금 날 피했었지 아마.


제씨의 노력은 매번 반대되는 결과만을 초래했다. 전화기 판매원을 할 때는 자기 전화요금을 낼만큼도 벌지 못했고 병원의 선물 코너에서 일할 때는 자신의 웃는 모습에 손님들이 불쾌감을 느낀다. 세상은 그녀에게 친절하지 않다. 이와 같은 경험들이 쌓이고 쌓여 완전히 무기력해져 버렸는지도 모른다.


제씨  내가 정말루 좋아하는게 있었다면 어땠을까. 예를 들어 아침으로 먹는 라이스 푸딩이나 콘플레이크라도 정말 좋아했더라면 어쩜 견딜만 하지 않았을까 하구.


믿음이 없이는 무언가를 좋아하는 것도, 사랑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델마는 쎄실이 아내와 자식을 버린 놈이라고 욕하지만 제씨는 남편이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고 이야기한다.


제씨  쎄실은 자기랑 담배 중에서 내가 담배를 선택했기 때문에 떠난 거구.


남편이 자기를 떠난 이유는 남편과의 삶보다 담배를 택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말은 남편인 쎄실도 그녀를 버렸지만 그녀 스스로도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녀의 신뢰감 상실과 절망의 깊이는 그런 노력이 무의미하다는 걸 깨달을 만큼 깊은 것이었기 때문에 애초에 결혼생활에 큰 기대조차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제씨는 쎄실보다 진실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고, 그런 이유로 그가 자신을 떠나도록 내버려두었다.


제씨  내가 쎄실을 사랑한다구 늘 말해왔지만, 그때 난 알았어. 내가 사랑한 건 바로 내 자신이었다는 걸. 그런데 쎄실 역시 그걸 알구 있었언 거야.


(...)


제씨  엄마, 푹푹 찌는 여름에 만원번스를 타 본 적이 있을 거야. 버스 안은 찜통 같은데다, 콩나물 시루처럼 들어찬 사람들은 또 어찌나 시끄럽고 북적대는지 당장 내려버리고 싶은 마음 뿐일 거야. 하지만 그대로 내려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엄마가 내려야 할 곳이 아직 50블럭이나 남았기 때문 아냐? 하지만 난 달라. 난 당장에 내려버릴 수 있어. 왜냐하면 그렇게 50블럭을 더 가서 내린대야 어차피 내려서는 곳은 마찬가질 테니까. 마음만 내키면 난 언제든 내릴 수 있어. 이만하면 충분하다 싶을 때가 바로 내 정류장이 되는 거야. 그리구 이제 모든 게 충분해.


(...)


제씨  엄마가 구해주길 바란 게 아니었으니까. 그냥 엄마한테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야.


제씨는 자신의 힘듦을 알아달라고 자살하겠다는 결심을 털어놓은 것이 아니다. 자살만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행사하는 유일하고 최종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녀는 주저 없이 방아쇠를 당긴다. 총소리가 울려 퍼지고 델마는 제씨가 일러준 대로 도슨에게 전화를 건다. 이로써 90분간의 긴장감 넘치는 연극이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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