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휴찬 Sep 15. 2020

내 몸은 적당한 거리를 알고 있었다

몇 해 전, 특별히 아픈 곳은 없는데 컨디션이 한동안 무척 나빴던 적이 있다. 이유 없이 온종일 피로감을 느끼고 조금 일하다 보면 금세 기력이 소진되어 머리가 멍해졌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검진을 받아봤지만, 몸에는 전혀 이상이 없다고 했다. 그러다 우연히 똑같은 증상이 있었다는 지인으로부터 처방을 받았다.


“늘 머리 많이 쓰는 일을 하는 것 같은데, 혹시 커피믹스 자주 마셔? 설탕 들어간 음료 끊고, 정 커피가 마시고 싶으면 아메리카노만 마셔 봐.”


그 얘기를 듣자, 무언가를 간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난 달달한 음료가 끌리지 않는데도, 커피가 마시고 싶지 않은데도, 입버릇처럼 달달한 카페모카를 주문하고 매일 물처럼 마셔댔다. 중간중간 커피믹스도 곁들였다. 하루 평균 카페모카 두 잔과 커피믹스 두세 잔 정도를 집어삼켰다. 당분과 카페인 섭취가 가져다주는 각성효과에 중독돼 있던 것이다.



그날 이후 가장 좋아하던 카페모카를 일단 끊어 보았다. 커피믹스도 끊었다. 차가 마시고 싶으면 레몬티나 자몽티를 주문했고, 커피가 너무 생각나면 3일에 한 번 정도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셨다.


점심을 먹고 동료들과 카페에 들어가면 나 자신에게 물어보기 시작했다.


‘넌 지금 뭐가 마시고 싶은 거야?’


머릿속으로 커피를 떠올려본다. 왠지 모르게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레몬티를 떠올려본다. 오늘은 이것도 별로다. 녹차라떼를 떠올려본다. ‘그건 괜찮은 것 같다’는 대답을 듣는다. 가급적 커피는 회피하면서 이런 식으로 그날 마실 차를 정했다.


효과는 일주일도 안 되어 바로 나타났다. 몸이 가벼워지고 멍하던 머리가 맑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동안 단시간 내에 두뇌활동을 극대화하기 위해 나도 모르게 과도한 당분과 카페인을 섭취하고 있었다.


중독 같은 습관이었다. 분명 내 몸은 그것을 거부하고 있었는데, 난 몸의 신호를 무시해 버렸었다. 무의식적으로, 관성에 의해서, 어쩌면 당장 성과를 위해서, 내 안의 나는 당분과 카페인이 더 들어오는 게 싫다는 의사를 보임에도 나는 그 충고를 무시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한동안 집중력을 잃고 시들시들한 몸을 괴롭게 지탱해야 하는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깨달았다. 내 몸은 지금 뭐가 부족하고 뭐가 과도한 상태인지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거기에 조금만 귀를 기울이면 균형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을. 내가 선택해서 먹는 음식조차 ‘나’를 설명하고 지키는 데 필요한 요소였음을.



현재는 카페모카도 다시 마시고 있고, 가끔 생각날 때 커피믹스도 한 잔 마신다. 주로 마시는 커피는 아메리카노로 바뀌었다. 달달한 음료는 2~3일에 한 잔 정도씩 마시니 몸에 전혀 무리가 가지 않는다. 당분과 카페인에 대해 유지해야 할 적당한 거리를 이제야 찾은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도 마찬가지다. 내 안의 내가 싫다고 말하는데도, 습관처럼 밀접한 교류가 지속하는 관계들이 종종 존재한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니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 ‘오늘은 만나고 싶지 않다’는 자기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상대방에게도 이 목소리를 적절히 전달할 줄 알아야 한다.


관성에 의해 유지되는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는 권태감을 불러일으킨다. 권태의 지속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해쳐버린다.

작가의 이전글 ‘늦은 나이’ 콤플렉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