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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에 갔으나 가지 않은 날

by 몬스테라

절친한 사법연수원 동기 언니 두 명과 매일 아침 운동인증 같은 것을 하는 단체 채팅방이 있다.


어느 날 한 언니가 전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 얘기를 꺼내며 국립중앙박물관에 가자고 제안했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 나오는 호랑이 '더피'와 까치 '서씨'는 조선시대 민화인 '호작도'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호작도'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데, 요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인기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외국인 관람객과 국내 관람객으로 북적인다고 한다.


아래는 나의 민화 스승님께서 그리신 '호작도'이다.

나는 민화를 배우러 다니고 있고, 민화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국립중앙박물관에 가자는 제안이 반가웠고 신이 났다.


그러나.


가끔 그럴 때가 있다. 약속은 신나게 해 놓고 정작 약속한 날이 다가오면 나가기 싫을 때.

날이 너무 더웠고, 마침 재판이 없는 휴정기라서 나는 집에서 늘어져 쉬고 싶었기 때문에 약속이 취소되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약속 날짜가 다가오는데도 그날 만날 언니들이 언제 만날지, 어디서 만날 지를 정하지 않고 다른 얘기들만 하는 것이다.


어쩌면 약속이 취소될 수 있다는 작은 희망이 생겼다. 국립중앙박물관에 가자고 한 언니도 약속이 다가올수록 더 적극적으로 다른 얘기, 주로 '웃기는 짤이나 유튜브'를 보내는 등 국립중앙박물관에 갈 의지가 박약한 듯한 인상을 주었다.


나는 확실하게 취소시키고 싶었지만, 한 언니는 판사이고 한 언니는 개업 변호사로서 나보다 더 바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인데 평소 빼기 힘든 시간을 빼기로 결정했을 텐데 내가 별 명분도 없이 가지 말자고 약속을 뒤집기가 쫌 그랬다. 미안해서.


다만 약속이 취소되길 하늘에 빌며, 누구 하나라도 나 같은 마음이라면 제발 용기를 내서 국립중앙박물관에 가지 말자고 말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용기 내어 언제 어디서 만날 거냐고 단체 채팅방에 올리니, 다들 의욕이 없어 보여서 나는 다른 사람의 입에서 가지 말자라는 말이 나오도록 좀 더 압박을 가했다. 대체 언제 어디서 몇 시에 만날 건지 당장 정하자는 식으로.


그런데 어째 어째해서 만날 장소와 시간이 정해지게 되었다. 12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약속 나갈 준비하는 나]

한 언니와 나는 8호선 지하철 역에서 만나서 같이 가기로 했고, 다른 언니는 혼자 지하철을 타고 오기로 했다.


나는 한 언니와 8호선에서 만났고 9호선으로 갈아타는데, 둘 다 어느 방향으로 가야 국립중앙박물관역(이촌역)으로 가는지에 대해서 알아볼 의욕이 별로 없이 서로에게 알아서 하겄지 하고 기대다가 겨우 환승했다.


따로 오기로 했던 언니는 평소 엄청 알뜰한 사람으로서, 배달 수수료가 아까워서 배달을 시키지 않으며 택시 몇 번 안 타면 경조사비가 나온다며 평소 직접 운전하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되 아무리 급해도 택시를 타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택시를 타고 오고 있다고 했다. 아마 그 언니도 마지막까지 미적거리다가 시간이 임박해서 겨우 무거운 몸을 일으켜 택시를 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 같다.


우리는 12시에 만났기 때문에 일단 밥을 먹기로 하고 국립중앙박물관 앞에 있는 찜닭집으로 들어갔다. 찜닭을 미친 듯이 먹은 우리는 닭이 줄어들수록 말수가 줄었고 국립중앙박물관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나는 무더운 날씨에 바글바글하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사람들에게 파도처럼 밀리며 구석기 뗀석기 이런 것부터 동태눈으로 무기력하게 볼 나를 생각했다.


용기 내어 말했다.

저는요, 꼭 박물관에 안 가도 돼요.


그러자 다른 언니들이 차례대로 말했다.

나도.

우리는 서로 좋아한다는 말을 숨긴 채 누가 먼저 고백하길 바라며 마음 졸인 청춘의 연인처럼 조심스럽게 서로의 마음을 보인 후 기뻐했다.


그래도 일부러 시간을 내서 만났는데 우리가 의미 없이 헤어지는 것은 넘 아깝다며 찜닭집 뒤에 시장골목으로 들어갔다.


허름한 대폿집 같은 곳을 발견하고는 맥주 한잔하고 가자고 들어갔다. 그 시간에 문을 여는 술집은 그곳밖에 없었다.


우리는 연포탕과 맥주를 시켜서 먹었다. 할머니 사장님은 대낮부터 술을 시키는 아줌마 셋을 심상치 않게 쳐다보셨다.


연포탕이 나오기 전 소박한 반찬이 나왔는데 우리는 신이 나서 먹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가지 않는다니 심리적 안정이 되었고 그 가게의 멸치반찬마저 특별한 맛으로 느껴졌다.

우리는 오늘 합심하여 약속을 파투 낸 서로에게 인간적인 정을 느끼며 연포탕과 맥주를 마시다가 이제 일어서서 가자고 하는데.


연포탕 5만 원, 맥주 2병 1만 원. 총 6만 원을 판사인 언니가 사주겠다고 했다. 나는 땡잡았다는 생각에 무척 흡족했다. 그런데 언니가 계산하려고 보니 할머니 사장님이 사라졌다.


우리는 계산하기 위해 한참을 기다렸다. 6만 원을 현금으로 테이블에 놓고 가자는 의견을 내었으나 사장님이 안 계신 사이 다른 사람이 들어와서 6만 원을 집어가면 어떡하냐, 혹은 6만 원을 발견하지 못한 사장님이 우리가 계산하지 않고 토낀 것으로 오해해서 cctv를 공개하면 어떡하냐, 먹튀 아줌마 셋을 추적하는 네티즌 얘기까지 하며 우리는 가게에 앉아 있었다.


사장님이 혹시 다른 가게 사장님이랑 수다 떨러 가신 것은 아닌지 인근가게를 돌아다니고 살펴보았지만 사장님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아무도 없는 가게에서 사장님이 평소 누워계실 것 같은 전기장판 위에 앉아서 하염없이 사장님을 기다렸다.


한 언니가 골목에서 사장님을 겨우 만났는데, 사장님은 낮술 하는 손님에게 가게를 맡긴 채 마실 나갔다 오시는 것 같았다.


우여곡절 끝에 계산하고 나오니 여전히 해는 중천에 떠 있었다. 우리는 매우 만족하며 헤어졌다. 그것은 매일 계획대로, 루틴대로 어려운 일을 해낼 때 보다 더 큰 기쁨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가 있다.


거기 '아이유'의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장례식을 하는 장면이 있는데, 가족이 없는 아이유를 위해 동네 조기축구회 회원들이 장례식장에 와서 위로도 해주고 모든 절차를 함께 해준다.


그러자 아이유가 조기축구회 회원인 동네 주민 에게 "고맙습니다. 이 은혜 꼭 갚을게요."라고 말한다. 그 얘기를 들은 조기축구회 회원이 이렇게 말한다.

"인생 그렇게 너무 깔끔하게 사는 거 아니에요."

나는 이 말을 좋아했는데, 국립중앙박물관에 갔으나 가지 않았던 그날. 우리는 깔끔하지 않은 일정을 함께 해서 너무 좋았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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