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공설시장)
지난달. 갑자기 아빠 생각이 많이 났다. 보고 싶었다.
나는 서울에 있고, 아빠는 영천에 있는 호국원이라는 국립묘지에 계신다.
마트에서 사과와 배, 황태포, 소주를 사고 집에 있는 귤을 챙겼다.
나는 2005년 운전면허를 땄지만 운전을 못한다. 면허를 딴 직후 아빠가 도로주행 연습을 시켜주겠다고 데리고 나가서는 스파르타식 교육을 시켰는데, 나는 어어어어 하다가 그만 사고를 내고 말았다. 당시 차 앞유리가 부서지고 아빠와 나는 강에 추락해 죽을 뻔했다.
이후 나의 운전미숙이 너무 두려웠다. 내가 다른 사람을 칠까 봐. 그래서 집에 차가 있지만 운전대를 잡아본 적이 없다.
평소 아빠에게 갈 때는 가족과 같이 갔지만, 이 날따라 아빠를 나만 혼자 보고 싶었다.
아빠 보러 가는 길을 검색해 보니 운전을 못하는 내가 혼자 가기에는 좀 복잡했다. 수서역에서 SRT 기차를 타고 동대구역으로 내려가서, 다시 동대구역에서 무궁화호로 영천역으로 가고, 영천역에서 호국원으로 가는 버스를 갈아타야 했다.
그래도, 보고 싶은 마음에 겨울이 오기 전 아빠에게로 향했다.
음주운전을 여러 번 해서 구속되는 피고인도 많이 보았고, 경계성 지적 장애라면서도 운전하는 피고인들을 많이 보았다. 그럴 때면 겁이 나서 운전을 못하는 내가 바보같이 느껴졌고, 아이가 아플 때에도 운전을 못해서 왜건에 싣고 병원으로 가는 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그렇지만 나는 조수석에 앉아서도 식겁하는 비명을 질러 운전자를 놀라게 하기도 했고, "운전대 잡으면 본격적으로 가는데 순서 없어지는 거여."라고 한 교통사고치사 사건의 피고인 말이 가슴 깊이 박혀 나는 타인을 위해서라도 운전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서울에서 새벽에 SRT를 탔다. 아빠 영정 앞에 놓을 과일과 황태포를 차마 기차 바닥에 둘 수가 없어서 동대구역까지 품에 꼭 안고 갔다.
비닐에 쌓인 황태포 꼬리가 종이백 밖으로 삐져나와서 때로는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동대구역에서 영천으로 내려오는 무궁화호 기차는 마치 인도의 기차 같았었다(인도 가본 적 없음). 승객은 모두 영천 할머니 할아버지 같았고, 모두 서로 이웃인 듯 진한 사투리로 안부를 주고받았다. 나는 누군가의 손자 성장과정을 들으며 영천으로 왔었다.
호국원은 정말 넓었다.
엄청난 규모의 묘지들이 눈앞에 끝도 없이 펼쳐졌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어 있다니!
예로부터 늘 죽는 사람은 있었겠지만, 나는 살아 있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느라 '죽은 사람'에 대한 생각을 하지 못했다. 추운 평일 낮에 호국원을 찾는 사람은 드물었다. 나는 옹기종기한 묘지들을 보면서 그 앞에 살아 있는 유일한 사람으로서 외롭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호국원에서는 신청하면 20분간 참배실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준다. 나는 참배실 이용을 신청하고 참배실로 갔다.
참배실 스크린으로 아빠의 사진이 뜨자 눈물이 흘렀다.
아빠한테 고맙고 미안했지만 차마 하지 못했던 말들을 마음속으로 했다. 자꾸만 눈물이 나서 훌쩍거리는데 옆 참배실에서도 훌쩍 거리는 소리가 났다.
옆 참배실에는 나보다 젊은 남자 혼자 와서 울고 있었다.
나는 학교 다닐 때 책값도 떼먹고 지은 죄가 많은데, 그쪽도 만만치 않았나 보다.
20분간 참배실에서의 만남을 뒤로하고 아빠의 유골함으로 가서 유골함을 어루만지며 한참을 훌쩍이고 앉아 있다가, 다시 영천역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러 나섰다.
영천역으로 돌아가는 버스는 마치 스포츠카처럼 달렸다. 기사님은 운전뿐만 아니라 말도 터프하게 하셨다. 어떤 할머니가 버스에 오르는 것에 급급해서 요금도 내지 않고 자리에 앉자, 기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건 서울이라면 폭언이라고 뜰 텐데, 당사자인 할머니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정신은 있는데, 이자뿌찌 모."
버스 안 여기저기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한 마디씩 거들었다. "나도 잘 이자뿐다.", " 올라타는데만 신경 쓰다 보면 이자뿐다 그래."
버스는 인정사정없이 달렸고 영천공설시장을 지나 영천역을 눈앞에 두었다. 나는 영천역에서 내릴 참이었다. 그런데 터프한 버스기사님이 소리쳤다.
"여, 영천역 내릴 사람 있능교!"
어쩌지. 나 영천역 내릴 사람인데.. 그런데 너무 쑥스러워서 저요!라고 말하지 못했다.
기사님은 혼잣말로 "없능갑네."라고 하신 다음 마음대로 회차해서 다시 오던 길을 갔다. 나는 다시 호국원으로 갈 판이었다.
거긴 너무 멀어서 쑥스러워도 내려야 되겠다 싶어서 용기 내어 내린 곳이 영천공설시장이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이 날 영천공설시장 장날이었다.
계획에도 없이 나는 5일장의 인파들 사이를 헤매며 풀빵을 먹고 있었다.
팔목에는 황태포 꼬리가 나온 종이백을 걸친 채.
풀빵을 먹으며 걷다가, 아빠 영정 앞에 놓으려고 가져온 귤도 까먹었다.
귤을 까먹으며 장을 구경하니 은근히 신이 났다.
경상도 지역에는 제사상에 돔배기라는 상어고기가 빠지지 않는데, 시장에서 돔배기를 보니 반가웠다.
장날이니까 나도 뭐 좀 사갈까 싶어서 은행 현금출금기로 갔다. 돈을 조금 찾고 나니 바닥에 5만 원짜리가 떨어져 있었다.
좋은 물건을 저렴하게 사려고 장에 왔다가 누군가가 거금을 잃어버렸나 보다.
주말이고 은행은 현금출금기기 외 운영을 하지 않아서 현금출금기 위에 올려두고 왔다. 부디 내 뒷사람도, 그 뒷사람도 그 돈을 그대로 두어서 주인이 잘 찾아갔으면 했다.
아빠가 있는 영천을 뒤로하고 다시 서울로 왔다.
아빠가 살아계실 때에는 진심을 전하지 못했는데, 어째서 진심은 헤어지고 나서야 전할 용기가 생기는 것인지..
진심이란 언제나 문틈에 끼어 있기 마련이지요.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편안하고 안정된 공간에서 우리는 대개 진심을 전하지 못합니다. 쓸데없는 이야기, 안전한 이야기,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이야기만을 나누지요.
그러다 헤어질 때, 문이 닫힐 때, 집 앞에서, 버스에 오르거나 차에서 내릴 때 우리는 그 짧은 순간에만 우리의 진짜 속내를 말합니다. 마지막이 될 것을 직감할 때만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을 꺼냅니다.
소설 쓰고 앉아 있네, 문지혁, 322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