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도 변기 커버를 몇 번씩 올렸다 내리기를 반복한다. 변기 커버를 올리고 시원하게 일을 본다. 쏴아! 그리고 물을 내린다. 이 일련의 행동 흐름은 내 35년 삶에 공고하게 자리 잡았다. 너무 공고하고 깊이 자리 잡아서, 머리를 거치지 않고 몸에서 그 행동이 바로 나온다. 파블로프의 개가 음식을 보면 침을 흘리듯, 변기 커버 의식 행위는 너무도 자연스럽다. 그렇게 변기 커버는 내 무의식의 영역에만 존재했다.
하지만 이제 변기 커버가 무의식에서 의식 영역으로 들어왔다! 누군가와 변기 커버를 공유한 순간부터, 변기 커버에 대한 독점적 사용권을 누군가에게 양보한 순간부터. 사실 혼자 사는 남자의 변기 커버는 대부분 올려져 있다. 내려져 있는 경우가 흔치 않다. 그리고 수직 낙하에 따른 반작용으로 흔적을 주변에 남긴다. 그럼에도 내가 변기 커버를 독점할 때에는 이 모든 것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무의식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변기 커버가 올려져 있을 때, 더구나 변기 커버가 올려진 상태에서 물을 내릴 때, 내 뒤통수가 싸하다. 분노의 눈빛이 느껴진다. 싸한 느낌과 타인의 분노를 인식함으로써 변기 커버 행위가 점점 의식으로 들어온다.
습관이란 게 무서운 것이 일단 나도 모르게 해 버리고 나중에 깨닫는다는 점이다. 아내의 수많은 회유와 협박에 나도 변기 커버를 닫고 물을 내려야 한다는 사실을 안다. 물을 내릴 때 얼마나 많은 세균이 퍼지는지도 안다. 물론 사용 후에는 변기 커버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도. 하지만 나도 모르게 또 35년간 버리지 못한 습관에 굴복한다. 물을 내린 이후에야 ‘아차’ 싶다.
간혹 억울하다. 나도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다. 절대로 아내 말을 무시해서 그런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변기 커버 루틴 행위가 내 무의식 깊숙하게 자리 잡아서, 그것을 의식화하는 것이 어려울 뿐이다. 간혹 슬프다. 소변볼 때조차 자유가 없다고 느껴진다. 한때는 나만의 변기 커버가 있었는데. 내 남성성을 포기하고 앉아서 소변보는 내가 가끔은 안돼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함께하는 과정이라고, 서로 이해하고 양보하는 과정이라고 현실을 받아들인다. 남은 50년을 위해 35년의 습관을 고치려 한다. 가끔 반항도 해보고 ‘남자는 앉아서 소변을 보면 해부학적으로 안 좋아’라고 의학적인 이유를 대기도 할 테지만, 그래도 남은 50년을 위해 변기 커버 행위를 의식 아래에 두려고 한다. 변기 커버 독점권보다 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존재가 내 옆에 있지 않은가. 그렇게 나의 작은 노력은 오늘도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