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에만 중요성이 인식되는 나라
배경 : 한글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훌륭한 문자체계이지만, 나에게는 쉽지 않았다. 모양은 비슷한데 뜻이 다르고, 발음은 생각한 대로 되지 않았다. 우리는 영어를 배울 때 “F”와 “TH”의 발음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정작 한글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한글날에만 한글의 중요성이 인식되는 이상한 나라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대학원에서 친하게 지내는 한 친구는 발음이 정말 좋다. 그녀의 발제를 듣고 있으면 너무 편안하다. 억지로 힘을 주지 않아도 말의 리듬이 자연스럽고, 마치 흐르는 물소리를 듣는 것처럼 기분이 좋다. 하지만 나는 발음이 좋지 않다. 특히 공감능력이라는 말을 잘 못 한다. 항상 곰강능력, 공강능력 등으로 발음하기 때문에 고치려고 노력하지만 쉽지 않다. 사실 나는 어릴 때부터 한글이 어려웠다. 국민학교 4학년때까지 큰누나에게 받아쓰기 시험을 봤을 정도였다. 그 시절 한 학년당 52명씩 14반이었던 학교에서 전교 10등 안에 들었던 성적도 무색할 만큼 나의 한글 받아쓰기는 형편없었고, 누나들에게 엄청 두들겨 맞기 일쑤였다.
내가 5살 때 한글도 모르는 애가 책을 외우는 걸 보고 부모님은 내가 천재인 줄 아셨다고 한다. 하지만 사실 나는 글을 읽은 게 아니라 모양을 기억한 것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사람 이름은 잘 외우지 못하지만 얼굴은 잘 외우는 편이다. 귀, 코의 모양 등 사람마다의 특징을 잘 파악했고, 멀리서 뒷모습만 봐도 누군지 쉽게 알 수 있었다. 반면 이름을 외우는 게 힘들었다. 그래서 남자애들이 스포츠에 대해 얘기할 때 뭔가 괴리감을 느꼈다. 아니, 어떻게 누가 안타를 치고 누가 패스를 어떻게 했는지 저렇게 쉽게 얘기하지? 나는 그들의 언어적 기억력이 신기했다. 나에게는 글자와 말보다 형태와 이미지가 더 선명한 세계였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늘‘글’을 어려워했지만 ‘모양’을 통해 세상을 이해해 왔다. 그래서 한글이 더 어려웠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한글 속에 담긴 다양한 의미를 이해하고자 노력해 왔다. 그리고 언어가 어떻게 사고에 영향을 주는지 늘 생각해 왔다.
요즘 나는 한글의 어려움이 개인의 문제보다 사회적 현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 한 유치원에서 학부모들에게 소풍 공지를 보냈더니 몇몇 학부모가 “우리 아이는 중식을 싫어한다”거나 “우천 시가 어디 있는 곳”이냐고 물어봤다고 한다. 그 사연을 보면서 몇 년 전 같이 일했던 직원이 생각났다. 한국전쟁을 6.25로 알고 있으면서 그게 6월 25일을 뜻한다는 것을 몰랐던, 8.15는 알지만 그게 광복절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그녀는 자신에 대해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나는 그때 한글을 안다는 것과 이해한다는 것에 대해 실감했다.
언어는 문법이나 발음보다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은 문맹률보다 문해력이 더 중요한 시대임에도 많은 사람들은 문해력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그동안 참여했던 모든 중장기 종합발전계획에 문해력 강화 교육을 사업으로 제안하곤 했었다. 하지만 유성구에서는 “이 지역 학부모들이 전부 박사고 똑똑한 사람들인데 문해력을 사업으로 넣으면 반발이 심할 것”이라며 거절당했고, 장성군에서는 “문불여 장성(文不如 長城)이라는 말을 아느냐”며 거절당한 적이 있다. 유성구와 장성군의 입장을 비방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똑똑함과 문해력은 다른 문제이고, 과거의 영광이 지금의 현실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문해력을 단순히‘국어실력’으로 치부하는 태도가 많이 아쉬웠다.
매년 한글날이 되면 모든 사람들이 한글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거나 한글의 훼손이 얼마나 심각한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정작 실생활에서 우리가 얼마나 우리의 말을 쉽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조명하지 못한다. 난 우리말을 줄여서 표현하거나 다양한 의미로 재해석하는 것은 오히려 활용의 다양성 측면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양성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정확한 의미를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것보다 그 안에 어떤 의미가 내재되어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을 때 진정한 우리말에 힘이 생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해력은 공기와 달리 자연스럽지 않다. 받아쓰기를 하며 멍청하다고 두들겨 맞았지만 그 덕분에 나의 문해력이 향상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글은 발음도 쉽지 않지만 같은 모양으로 얼마든지 다른 의미를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다른 나라의 말보다 훨씬 더 어려울 수도 있다. 우리의 문화와 글자가 인정받고 있는 지금, 우리는 한글을 제대로 사용하고 있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