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물리학
제목 : 떨림과 울림
저자 : 김상욱
링크 : http://www.yes24.com/Product/Goods/66322614?scode=032&OzSrank=1
인간은 울림이다. 우리는 주변에 존재하는 수많은 떨림에 울림으로 반응한다. 세상을 떠난 친구의 사진은 마음을 울리고, 영화 <레미제라블>의 '민중의 노래'는 심장을 울리고, 멋진 상대는 머릿속의 사이렌을 울린다. 우리는 다른 이의 떨림에 울림으로 답하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6p.
진동은 차갑지만, 떨림은 설렌다. 진동은 기계적이지만 떨림은 인간적이다.
7p.
시간과 공간은 138억 년 전 거대한 폭발과 함께 생겨났다. 시간에 시작점이 있다면 그 시작점 이전의 시간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시간은 우주의 본질적인 것인가, 아니면 보다 더 본질적인 것의 부산물인가?
28p.
스티븐 호킹이 쓴 '시간의 역사'의 마지막 문장이다.
"만약 우리가 (우주가 왜 존재하는가 하는) 물음의 답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인간 이성의 최종적인 승리가 될 것이다.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신의 마음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45p.
모든 사람은 죽는다. 죽으면 육체는 먼지가 되어 사라진다. 하지만 원자론의 입장에서 죽음은 단지 원자들이 흩어지는 일이다. 원자는 불멸하니까 인간의 탄생과 죽음은 단지 원자들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것과 다르지 않다.
... 몸은 원자로 산산이 나뉘어 또 다른 무엇인가의 일부분이 될 테니까.
49p.
우주에 빈 공간은 없다. 존재가 있으면 그 주변은 장으로 충만해진다. 존재가 진동하면 주변에는 장의 파동이 만들어지며, 존재의 떨림을 우주 구석구석까지 빛의 속도로 전달한다. 이렇게 온 우주는 서로 연결되어 속삭임을 주고받는다.
172p.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지만 부분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195p.
말하는 사람의 목이 진동하여 '소리'라 불리는 주변 공기의 진동을 만든다. 이것이 상대방 귓속의 달팽이관에 들어 있는 내부 액체를 진동시킨다. 이를 세포가 감지하여 전기신호를 일으키고 이것이 뇌로 전달된다. 전기신호란 것도 세포막을 통해 이동하는 나트륨, 칼륨 같은 이온의 운동에서 오는 것이다. 물리학자는 이처럼 세상을 '운동'으로 이해한다.
230p.
주위를 둘러보면 대부분의 물체는 움직이지 않고 정지해 있다. 하지만 정지는 사실 단진동이다. 당신 앞에 놓인 테이블을 가만히 쳐다보라. 움직이지 않을 거다. 하지만 전자현미경으로 보면 미세한 진동을 볼 수 있다.
... 양자역학에 따르면 미시세계에서 완벽한 정지 상태는 불가능하다. 결국 모든 정지는 단진동이다.
237p.
한쪽 쇠구슬이 낙하하며 맞닿은 쇠구슬을 때린다. 그러자 반대편 끝의 쇠구슬이 튀어올랐다. 그 구슬도 곧 낙하하여 맞닿은 구슬을 때린다. 마찬가지로 아까 낙하했던 맞은편 쇠구슬이 다시 튀어오른다. 이 구슬들은 계속해서 서로 상승과 낙하를 반복한다.
위 문장을 보면 어떤 장치가 머릿속에 떠오를 것이다. '뉴턴의 요람' 또는 '뉴턴의 진자'라고 알려진 장치다. 줄에 매달린 5개 남짓의 쇠구슬들이 부딪히면서 반대편 쇠구슬을 밀어내는 이유는, 낙하하면서 생기는 에너지가 구슬에 부딪히면서 반대편으로 온전히 전달되기 때문이다. 하나를 떨어뜨리면 반대쪽도 한개의 구슬만 튀어오른다. 두개를 떨어뜨리면 반대쪽도 두개의 구슬이 튀어오른다. 마찰이나 저항과 같은 에너지 손실이 없다는 가정하에 이들은 서로 온전히 같은 에너지를 주고 받으며 영원히 진자 운동을 한다.
인간은 특별히 더 고도화된 사회적 구조를 갖추고 살아가는 동물이다. 사회적 구조는 사람이 타인과 신뢰관계를 형성하며 더욱 견고하게 자리를 잡는다. 이렇게 인간이 단단한 관계를 형성하려는 이유는 밖에 도사리고 있는 수많은 위험과 불확실성때문이다. 사회라는 곳은 수많은 기회의 땅이기도 동시에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정글과도 같다. 이런 곳에서 미치지 않고 생존하려면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과 협력을 이루어내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사랑받는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신뢰받는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어디서든지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 싶은 욕구가 있다. 이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깊은 공허함과 외로움만이 내면에 가득차게 된다. 공허와 외로움은 스며드는 치명적인 독과 같다. 처음에는 아무렇지도 않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 마음을 갉아 먹는다. 내면이 피폐해지면 자연스레 내 몸도 망가진다.
사회적 성공과 같은 거창한 이야기를 제쳐두고서라도, 인간은 관계에서 얻는 즐거움 때문에 사회적 관계를 생성하고 유지하는데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다. 최근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강력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행되었을때, 나로서도 많은 불편함을 겪었다. 항상 즐겁게 같이 일했던 회사에 가지 못하고 좁은 원룸에서 일하는 것은 고역이었다. 주말에 성당이나 번화가에 나가 사람들을 만나고 즐겁게 놀지 못해서 아쉽기도 했다.
이처럼 잠깐의 사회적 단절에도 우리는 왜 고통 받는 것일까? 나는 문과출신이어서 이 책을 읽어도 물리적으로 왜 그런지 설명할 자신이 없다. 다만 관계에 대한 몇가지 힌트를 얻었을 뿐이다.
"떨림과 울림" 내용 중, 모든 존재는 진동하고 있으며 상대는 그 진동에 대해 울림으로 반응한다는 부분이 있다. 지금 보고 있는 모니터나 스마트폰 화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 잔잔하게 음악이 흘러나오는 스피커 등 우리는 진동을 통해 눈과 귀를 만족시키는 자극을 올곧이 느낄 수 있다. 진동이 없다면 빛과 소리는 전달되지 않는다. 지금 당장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깜깜한 공간에 있다고 생각해보자. 두렵고 불안해서 얼마안가 미칠지도 모른다.
사회적 단절로 고통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 같다. 나에게 전달되는 다른 사람들의 진동이 없는 것이다.
더 극단적으로 생각해보자. 만약 나에게 친구가 없다면, 종교가 없다면, 직업 없이 집에 계속 있는다면 나는 하루 종일 다른 사람들의 떨림을 느낄 수 없다. 감각은 쓰지 않으면 무뎌진다. 자극이 없다면 오래간만에 전달되는 떨림을 느껴도 감각이 무뎌져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연애를 오랫동안 하지 않은 사람들이 하는 말 중에 '연애 세포가 죽었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사랑이란 감정의 진동에 대해 무뎌진 게 아닐까? 사랑이 가지는 특별한 주파수의 떨림에 오랫동안 노출되지 않았다면, 그런 떨림에 대해 내가 어떤 울림으로 답해야 할지 혼란스러워진다. 오랜만에 찾아온 간질간질한 사랑을 무덤덤하게 놓치게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진동은 피드백을 동반한다. 나의 떨림에 비해 상대방의 울림(반응)이 시원찮으면 멋쩍거나 기분이 나빠진다. 그만큼 사람이 반응에 민감하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사회성이 좋다.'라는 말은 결국 상대방의 떨림에 버금가는 좋은 울림을 전달하는 사람을 뜻한다. 울림통이 좋은 사람은 인기가 많다. 커다란 빈 통을 막대기로 치면 기분 좋은 저음의 '퉁퉁' 소리가 나서 재미있듯이.
하지만 내가 먼저 던지는 '떨림'도 중요하지 않을까? 맞장구쳐주고 기분 좋은 리액션을 보여주는 것은 어쩌면 쉬울 수도 있다. 하지만 상대방의 좋은 울림을 이끌어 내는 것은 어렵다. 책 이름이 '울림'이 아닌 '떨림과 울림'인 이유는 떨림과 울림, 어느쪽이 더 우월한 것이 아닌 똑같이 중요한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해 보면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라는 속담이 탄생한 이유가 우리 조상님들께서는 이미 떨림과 울림에 대한 고차원적인 이해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