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은 가야지'에 대한 아름다운 반박
제목 : 평균의 종말 : 평균이라는 허상은 어떻게 교육을 속여왔나
저자 : 토드 로즈
링크 : http://www.yes24.com/Product/Goods/59395327?OzSrank=1
많은 사람들이 '평균적 인간'의 관점을 취하는 사고 경향에 곧잘 빠지는데 이는 조심해야 할 함정이다. 평균적인 공군 조종사를 찾기가 사실상 불가능한 이유는 이 집단만의 어떤 독특한 특징 때문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특징, 즉 신체 치수의 극도의 다양성 때문이다.
p26.
우리는 이따금씩 평균이라는 것에 거북함을 느끼면서도 평균을 사람들에 대해 어느 정도의 객관적 사실을 보여주는 지표로서 받아들인다.
p30.
"그 일로 저는 확신하게 됐습니다. 그런 식의 개개인별 기억 수행 패턴이 불규칙 잡음 같은 무작위 패턴이 아니라 개개인별로 나름의 체계를 띠는 패턴 같다고요. 말하자면 각 개인의 기억 시스템이 저마다 독특한 신경 패턴으로 이뤄져 있다는 확신이었죠. 하지만 제가 가장 놀랐던 부분은 따로 있었어요. 그런 패턴의 차이가 미묘하지 않고 현저하게 두드러진다는 점이었죠."
p.45.
우리는 누구나 가능한 한 평균을 훌쩍 뛰어넘으려는 압박감을 느낀다. 우리가 평균 이상이 되려고 그렇게 기를 쓰는 목적이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좀처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중략) 즉 평균의 시대에서 성공하려면 다른 사람들에게 평범하거나, 아니면 (정말 끔찍하게도!) 평균 이하로 평가받아서는 안 된다는 강박에 내몰리고 있기 때문이다.
p64.
...'전반적 지능', 즉 한 개인의 아주 여러 영역에 적용시킬 수 있는 그런 지능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떨쳐내기는 힘들다. 실제로 우리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똑똑하다는 얘기를 들으면 어떤 지적 업무를 맡기든 더 똑똑한 사람이 더 잘 해낼 것이라고 넘겨짚기 마련이다.
p135.
... 자료를 분석해보니 구글의 대다수 업무 영역에서 단 하나의 변수가 중요한 지표가 되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아니, 단 하나의 업무 영역에서도 그런 경우가 없었다고 해야 맞겠네요.
다시 말해, 구글에서 재능을 발휘할 만한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는 얘기이자 구글이 직원 채용을 최대한 잘하고 싶다면 그 모든 방식에 세심히 신경을 써야 했다는 얘기였다.
p140.
최종 채용자들의 이력서를 보면 도저히 그 직종에는 적임자가 되지 못하겠다고 말할 만한 경우는 아닙니다. 하지만 단지 이력서만 보고 판단한다면... 꼭 예스라고 말할 만한 점도 없는 이들이죠. 말하자면 그 최종 채용자들은 우리가 그동안 간과해왔던 그런 유형들입니다.
[패스트 컴퍼니 - 로이 바하트]
p143.
자료를 살펴보니 한 아이는 또래들과 어울릴 땐 공격적이었으나 어른들과 있을 땐 온순했다. 반면 다른 아이는 어른들과 있을 땐 공격적이었으나 또래들과 있을 땐 온순했다. 두 아이의 공격성은 확연히 달랐지만 이런 중대한 차이를 특성 중심의 평가 방식에서는 간과했던 것이다. 공격성은 두 아이가 가진 성격의 '본질'이 아니었다. 단지 두 아이에게는 공격성을 띠는 상황과 공격성을 띠지 않는 상황이 있었을 따름이다.
p160.
사람들의 행동을 특성처럼 느끼는 이유가 한 가지 더 있다. 당신이 그 사람들의 맥락에서 일부분만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직장 상사가 옆에 있을 때에만 소심 해지는 것뿐인데 직장 상사는 당신을 소심한 사람으로 생각할지 모른다. 한편 당신은 직장 상사가 고압적이고 오만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상사는 당신이 주위에 있을 때만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것일 수도 있다.
p177.
우리는 모두 특별한 경우다. 일단 개개인성의 원칙들을 이해하면 당신의 삶에 통제력을 더욱 잘 발휘할 수 있다. 당신 스스로를 평균 점수가 말해주는 모습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바라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가고 싶은 그곳으로 데려다 줄 길이 100만 가지나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어떤 경우든 당신에게 유용한 경로가 한 가지 이상은 있게 마련이라는 점과 당신에게 가장 잘 맞는 최상의 경로가 미답에 가까운 경로일 것이라는 점이다.
p209.
사람은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동물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불확실한 것에 두려움을 느낀다. 우리가 새로운 것에 도전하기 꺼려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건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 불안하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예시로, 만약 시력 또는 청력을 잃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나처럼 몇 번이고 좌우를 살펴 안전한지 확인한 후 길을 건너는 겁쟁이는 방 밖으로 나갈 수 없을 것 같다. 위험에 대처할 수 없어서 죽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불확실성을 꺼리는 이유는 생존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불확실함에 두려움을 느끼는 본능은 '존재 가치'라는 다소 철학적인 부분까지 이어진다. 다양한 인간군상 속에서 무리를 이루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숙명인 인간은, 소속된 집단에서 본인이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에 대해 많은 신경을 쓰기 마련이다. 내가 집단에 도움이 되는가? 내가 집단에서 영향력이 있는가? 이 물음에 확실하게 대답할 수 없다면 집단 속에 계속해서 머무를 수 있을지 여부는 매우 불투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소속집단에서 내가 도움이 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쓴다.
그럼 내 존재 가치가 유의미한 사람이라는 것을 어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아니, 그전에 내 존재 가치가 유의미하다는 것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아까 말했듯이 우리는 불확실성을 싫어한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사람들은 성과의 측정을 위해 '점수'라는 아주 객관적인 수치를 이용해왔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학창 시절부터 이 지긋지긋한 점수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시험 점수가 높으면 우등생, 낮으면 열등생으로 나뉘어 평가받게 되고 심하면 차별대우도 받는 경우가 생긴다. 심지어 미술이나 음악과 같이 보고 듣는 사람들의 개인적 시각이 큰 변수로 작용하는 영역도 점수로 환산하여 평가받는다.
점수로 환산하여 평가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그룹 내에서 어느 정도의 수준에 위치하는가를 알기 위해서다. 내가 남들보다 잘하는 편인지, 아니면 적어도 평균보다 위인지 아래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고 있다. 돌아가신 우리 엄마도 그런 쪽에 굉장히 신경을 많이 쓰셨었고, 덕분에(?) 학창 시절이 매우 피곤했다. 점수가 조금만 떨어져도 집에 가서 혼날 생각에 두렵기도 했었고.
학생일 때만 그러면 다행일 테지만, 슬프게도 우리는 직장에서 조차 점수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주변 지인들의 회사 생활 이야기를 들어보면 오히려 내가 눈물이 날 지경이다. 그놈의 '높은 등급'을 받기 위해 안 먹는 술도 많이 마셔야 하고, 야근도 해야 하고, 양심에 내키지는 않지만 내 성과를 부풀려 보고할 필요도 있다고 하더라. 등급이 낮으면 결국 손해 보는 것은 자신이기 때문에.
위와 같은 일을 자주 겪게 되다 보면 사람은 지치게 된다. 그래서 자조적인 표현으로 '중간만 가자'라는 말을 자주 쓰게 된다. 중간이라도 가면 적어도 내쳐지는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조용히, 얇고 길게 가는 것이 가장 베스트라고 생각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이 '중간만 가자'라는 말은 생각해보면 참 무서운 말이다. 우선 중간을 넘어선 상위 수준의 달성 의지를 꺾는다. 내가 중간을 달성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사실 나쁜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말 한마디가 개인의 잠재성을 꽁꽁 봉인해 버리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반대로, 중간에도 못 미친다면 사회 구성원으로서 최소한의 조건도 갖추지 못했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우리가 생각하는 기준치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을 자연스럽게 저평가하게 된다. 학창 시절에 시험 성적이 낮다는 이유로 은근히 무시를 받거나 또는 무시를 하게 된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 평균이라는 기준은 알게 모르게 서로를 평가하게 만들어 왔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평균치에라도 도달하려고 애를 쓴다. '적어도 무시받지는 말자, 적어도 먹고 살만큼은 하자.'라는 슬픈 목표를 가지고 말이다.
수학적으로 평균을 내기 위해서는 모든 값을 하나로 더한 다음, 그 숫자들의 개수만큼으로 나누어 하나의 값으로 표현한다.
위 5개 숫자들의 평균은 28.4다. 그런데 5개의 숫자 중 28.4와 가깝다고 볼 수 있는 숫자는 22를 제외하고는 없다. 사실 22도 6.4라는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보다시피 평균값인 28.4와 1점 내외의 적은 차이를 보이는 숫자는 아무것도 없다.
이를 우리의 삶에 대입시켜보자. 3의 특성을 가진 사람이 28.4가 되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을 한다. 그것이 세상의 평균이니까. 또 103의 특성을 가진 사람이 28.4가 되기 위해 (너무 튀지 않기 위해) 자신의 잠재성을 일부러 죽이며 살아간다.
여기서 숫자가 낮다고 열등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각 숫자가 고유의 의미와 존재 가치를 지니듯이 모든 사람들은 고유 특성과 가치를 가지며 태어난다. 한때 '개성'이라는 말이 유행했듯이 나와 똑같은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개인적 특성을 무시하고 평균만을 바라보며 달려가고 있다.
위의 숫자의 평균이 시사하는 바는, 우리가 어떠한 일을 구상할 때 평균값을 기준으로 하면, 그 평균에 일치하는 사람을 찾는 것이 더 힘들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책에서는 '노르마'라는 조각상을 예시로 들었다. 미국 여성의 평균적 신체 수치를 이용하여 조각한 노르마는 가장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 노르마에 일치하는 사람을 찾는 경연대회를 열었는데, 놀랍게도 4000명에 가까운 참가자 중 단 한 명도 노르마와 일치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나마 평균치에 근접하는 참가자도 40명에 불과했다. 더 웃긴 건, 이 결과를 보고 노르마 조각상의 오류를 지적한 것이 아니라 미국 여성들의 건강상태가 나쁘다는 결론으로 흘러갔다는 것이다.
평균이라는 시스템은 적절히 사용하면 큰 장점이 있지만, 대부분 만병통치약처럼 여기저기 적용시키다 보니 개인의 특성을 무시한다는 치명적 단점을 가지고 있다. 현대 사회는 전반적으로 대부분의 산업이 고도화되었다. 예전과 같이 단순노동만을 반복하는 직군보다는 창의성과 유연함이 돋보이는 업무 형태가 많고. 앞으로도 점점 더 개성 강한 업무 능력을 필요로 하는 산업이 생겨날 것이라 조심스레 예상해 본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도 점수나 평균이 아닌 고유의 특성들을 다각적으로 보고 살펴보는 안목이 필요해 보인다.
다만, 객관적으로 상대방을 판단할 수 있는 객관적인 지표가 없다면, 과연 어떤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해야 할까? 하는 의문이 든다. 어쩌면 '기준'을 가지고 상대를 판단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생각을 해본다. 회사에서 여러 번 면접관으로 참여했지만 사실 아직까지도 어려운 부분이 상대방을 평가하는 것이다. 몇 장의 이력서와 1시간 남짓의 면접으로 그 사람의 모든 역량을 알 수 있을까? 내가 엄청난 인재를 성급히 판단해서 놓치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반대로 이상한 사람을 좋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인턴십과 같은 채용연계형 프로그램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사람이 일을 잘한다 못한다는 단순히 업무 처리 능력만을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회사라는 곳은 내 일을 처리하는 것 포함하여 다른 사람과의 업무적 커뮤니케이션, 인간적인 관계, 성격, 환경 등 매우 복잡한 요소들이 얽혀있다. 이런 복잡한 조건들 속에서 효과적으로 적응하여 일을 할 수 있는가는 사실 지원자 본인도 잘 모를 것이다. 실제로 조직 내에서 일도 해보면서 본인도 이 회사가 나에게 잘 맞는지, 평가하는 사람도 이 사람이 우리와 협업이 잘 이루어지는지 등을 다각적으로 검토해 볼 수 있어서 효과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다각적'이라는 표현은 '비효율적, 고비용'이라는 단어가 따라붙는다. 위와 같은 상황은 기존 채용방식보다 더 많은 비용을 수반한다. 시간도, 돈도 많이 들어간다는 뜻이다. 또 이런 방법을 취한다고 해서 효과적인 결과를 명확하게 예측할 수도 없다. 따라서 우리가 좋은 사람을 잘 뽑기 위해서는 '비용'이라는 생각보다는 '투자'의 개념으로 다가가야 리스크를 감내하고 좋은 사람들을 회사에 모셔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생각을 해본다.
책에서 개인적으로 재밌었던 부분을 꼽자면, 성격과 관련된 부분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성격을 쉽게 판단한다. '그 친구는 참 배려심이 깊어.' 또는 '우리 부장님은 아주 꼰대야.' 등등. 그런데 책에서 이를 전적으로 반박한다.
우리가 그렇게 느끼는 이유는 그 사람이 그 상황에서, 또는 그 사람을 대할 때만 그런 성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즉, 성격이라는 것은 '맥락'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꼰대처럼 느끼는 부장님은 사실 집에서는 가정적인 남자일 수 있다. 우리가 꼰대라고 느끼는 것은 그저 회사에서만 부장님을 만나기 때문이다.
그 부장님이 회사에서 꼰대처럼 구는 이유는, 그를 그렇게 만든 어떤 맥락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하지만 그 맥락은 부장님 본인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그저 짜증 나는 꼰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닐 뿐.
생각해보니 나도 내 성격이 어떤 사람이다라고 딱 부러지게 갑자기 이야기할 수 없어졌다. 글을 읽고 보니 정말로 이 상황에서는 이렇게, 저 상황에서는 저렇게 행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관성 없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듣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라도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라고 소개하고 다녔었는데 적어도 이 부분을 읽고 나서 상황에 따라 다르게 행동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조금 위로가 된 듯하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표현이 생각난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 너무 단편적인 부분만 보고 속단을 내린 것은 아닐지 되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너무 빨리 단정 지어서 나도 모르게 선입견이 생겨 이유 없이 좋아하거나, 싫어했을 수도 있다.
평균이라는 시스템은 의사결정 변수를 단순화시키고, 결정 속도를 높여준다. 그러나 이 점이 결국 부메랑처럼 돌아와 심각한 오류를 야기한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더 명확하게 어떤 사람을 판단하고 싶다면, 느리더라도 꼼꼼히 그 사람의 장단점을 경험해보고 지켜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애인을 사귀게 되면 '여행을 꼭 가보라'라는 말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평소처럼 밥 먹고 카페를 가는 평범한 맥락보다는 특수한 맥락(상황) 속에서의 애인의 행동을 보라는 뜻일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여행을 가보면 알 수 없었던 상대방의 매력 (또는 치명적인 단점...)을 알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 학생이든 직장인이든 우리는 평가에서 벗어나기는 힘들어 보인다. 평가를 피할 수 없다면, 이왕이면 다양한 맥락에서 평가를 받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가하는 사람들의 마인드도 바뀌어야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평가를 받는 사람들의 태세 전환도 필요해 보인다. 새로운 일이 있다면 한 번쯤은 겁 없이 뛰어들기도 하고, 실패도 경험해 보고, 자기 주도적인 아이디어를 실현시켜보는 리더십도 필요하겠다. 결국 평가받는 맥락은 내가 만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