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 의학과 의사보다 아이들이 더 위대해 보이던 날
4월의 어느 금요일. 그날은 모든 것이 순조롭고 여유가 있던 날이었다. 업무도 바쁜 일은 다 처리한 상태였고 교육청에서 온 공문도 없었다. 개학 이후 처음으로 음악실에 묵은 짐 정리와 다 쓰러져 있는 보면대를 세워서 정리하고 오래된 악보들도 다 버렸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아서 수업 시간에 참고로 할 모차르트 변주곡을 연주하는 여유까지 생겼다.
다음 주가 시험이라 6교시 후에 시험을 위해 교실 청소를 한 후 책상 정리를 마치고 어제 사서 냉장고에 미리 넣어 두었던 음료수도 아이들에게 하나씩 나눠주고 감사하다는 아이들의 합창을 들으며 훈훈하게 종례를 마쳤다. 퇴근하는 무렵에 밭에서 일을 하고 계시는 아버지를 태워 집에 모셔다 드리고 막내 아이를 친정 엄마 집에서 데리고 집에 가려는데 아이가 웬일인지 할머니와 좀 더 시간을 보내고 싶은지 할머니 집에서 저녁을 먹겠다고 했다. 아이를 친정에 두고 집에 가서 미리 새벽 배송으로 사 두었던 소고기와 순두부찌개를 먹었다. 마침 큰 아이가 고등학교 입학하고 첫 시험을 앞두고 있었고 매일 늦게까지 공부하는 것이 마음이 쓰여 특별 메뉴로 준비한 것이었다.
큰 아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식사를 거의 다 해갈 무렵에 둘째가 학원을 마치고 집에 와 남은 소고기를 구워먹이고 있는데 친정엄마의 전화가 왔다.
"막내가 귀 안에 뭐가 있다고 자꾸 우는구나."
엄마의 휴대폰 너머로 울고 있는 막내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가 원래 예민하기도 하고 귀에 귀 딱지가 가득 찰 때쯤이면 귀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난다고 자주 이야기를 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얼른 아이를 데리러 친정 엄마 집으로 출발했다. 아이를 집에 데리고 와서 조금 있다가 엄마가 귀 파 줄게 하고 식탁에 앉혔는데 갑자기 학부모님의 전화가 왔다.
30분가량 지속된 학부모와의 통화를 끝내고 거실로 나와 보니 큰 아이가 막내를 안고 둘째 아이가 휴대폰 플래시를 켜서 막내의 귀를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막내가 귀에서 소리가 난다고 하니 언니들이 귀를 들여다보았던 모양이다.
"엄마, 민주 귀 안에 뭔가 반짝이는 구슬 같은 게 있어. 그런데 너무 깊이 들어가 있어서 잘 보이지 않아"
알고 보니 친정엄마가 쓰시던 자석 파스가 있는데 파스에 붙은 자석을 가지고 놀다가 귀에 재미 삼아 넣었던 모양이다.
플래시로 비춰서 귀 안을 들여다보니 그저 반짝이는 뭔가가 있을 뿐, 너무 안 쪽에 깊이 박혀 있어서 도저히 빼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아이들과 계속 고민을 하다가 집 근처 응급실에 전화를 했다.
"저희 병원엔 기구가 없어서요. 도와드릴 수 있을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원하시면 한 번 오셔도 되고요."
그래서 집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대형 종합병원에 전화를 했더니
"오시면 코로나 검사 당연히 해야 하고요. 이비인후과 응급진료 보실 수 있지만 대기 환자가 너무 많아 내일 아침에 진료를 볼 수도 있습니다."
대형 종합병원 응급실은 몇 년 전에 둘째 아이 일로 경험한 적이 있어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이 아니면 안 가는 걸로 하고 집 근처 응급실로 택시를 타고 출발했다.
응급실 앞에 서서 아이와 기도를 했다. 빨리 이 상황이 해결되고 이 불편함이 빨리 사라지도록 해 달라고.
응급실 초인종을 누르고 간단한 접수를 끝내고 의사와 면담을 했다.
의사가 귀를 한 번 들여다보더니
"아예 보이질 않는데요. 고막에 딱 달라붙은 것 같아요. 우리 병원에선 도와드릴 수 없습니다. 내일 아침에 이비인후과로 가 보세요. "
맥이 탁 풀린 나는 응급실을 나서서 아이와 눈을 맞췄다.
"민주야. 내일 아침에 병원에 갈 때까지 참을 수 있겠어? "
"응. 지금은 귀가 아프지도 않고 아무 느낌도 나지 않아"
"다행이다. 내일 이비인후과에 가면 선생님이 쏙 빼 주실 거야"
라고 말은 했지만 동그란 모양의 자석이 핀셋에 잡힐 리도 없고 내 상식으로 그 자석을 빼내는 방법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저러다 수술까지 하는 건 아닐까. 수술하다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하면 어떡하지..
평소에 산책하던 길을 아이의 손을 잡고 터덜터덜 걸어오다보니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마음속에 어두운 그림자가 되어 스멀스멀 드리우기 시작했다.
아이 귀에 자석이 들어갔다고 하니 자석을 아이 손에 닿게 두었던 친정엄마가 안절부절을 못하셨다. 집에 가는 길에 친정 엄마 집에 들러 귀에 들어갔다고 하는 자석 하나를 가지고 집에 갔다. 내일 병원에 가면 의사에게 보여줘야 어떤 도구를 써야 할지 알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20분 만에 아무 소득 없이 집에 돌아가니 둘째 아이는 만화책 'why 해부학'과 스마트 폰을 번갈아 보면서 귀 모양을 보고 있었고 큰 아이는 시험기간이라 바쁠 텐데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엄마, 민주 귀에 자석 뺐어?"
"아니, 못 뺐어. 선생님은 귀에 들어있는 자석이 안 보인데."
예민하고 섬세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둘째가 소리를 쳤다.
"스마트 폰으로도 보이는데 그게 왜 안 보여!!"
아이들과 나는 다시 막내를 눕혀놓고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친정 엄마 집에서 가져온 자석을 바닥에 놓고
"얘들아. 이 자석이 민주 귀에 들어간 거랑 똑같은 거야. 내일 이비인후과에 가서 선생님께 설명드리려고 가져왔어."
아이들은 조그만 자석에 놓고 냉장고에 붙은 자석을 가져와서 데어 보고, 쇠로 만든 귀이개를 가져와서 가까이 가져가 보았더니 자석이 귀이개에 제법 강한 자성으로 끌려 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집중력이 좋은 둘째가 막내의 귀 속으로 귀이개를 쑥 집어넣었다. 조금 있다가 자석이 귀이개의 끝에 '딱' 달라붙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기적과 같이 귀이개의 끝에 조그만 자석이 딱 붙어서 나왔다.
막내는 언니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포옹을 해 주었고 이것으로 나의 황금 같은 주말을 모조리 빼앗아 갈 뻔했던 긴급했던 응급상황은 이것으로 종료가 되었다.
"딸들아. 너희들이 의사보다 낫구나. "
조금 전 걸려왔던 학부모의 민원으로 무거워졌던 마음 따위는 공중으로 휙 날아가버리는 순간이었다.
아이들을 키우며 응급실을 갈 일이 몇 번 있었는데
두 번은 알레르기 음식 섭취로 기도가 부어 숨을 거의 못 쉬게 되어 항히스타민을 맞으러 갔었고
한 번은 큰 아이가 경미한 교통사고를 당해 엑스레이를 찍으러 갔고
또 한 번은 둘째가 갑자기 전신마비 증상이 와 응급실로 갔다가 두 달 동안 입원을 했던 일이었다.
대형 종합병원에서 둘째 아이의 길랑바레 발병으로 2박을 응급실에서 했던 경험으로 24시간 불도 꺼지지 않는 그 응급실의 살벌하고 긴박한 분위기를 아주 조금 경험한 사람으로 나는 응급실에 가는 것이 항상 두렵다.
이번에는 주사도 안 맞고 입원도 안 하고 돈도 한 푼 안 쓰고 그저 조그만 해프닝으로 이렇게 사건을 마무리할 수 있어서 갑작스러운 행복감이 밀려왔다.
앞으론 응급실 갈 일이 없도록 건강하자 얘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