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기시작, 대답하지 않는 아이들
2002년부터 교직생활을 했으니 올해로 나의 경력은 20년이 조금 넘었다.
아이를 셋을 낳을 때마다 1년 이상씩 휴직을 했고 중간에 대학원도 했기 때문에 엄밀하게 따지면 경력은 20년이 조금 안되지만 나이스에서 나의 경력을 20년으로 인정해 주니 나의 공식적 경력은 20년 이상이 맞다.
내가 지금 근무하는 학교는 남자 중학교인데 우연찮게도 지난 몇 년간 내가 담임했던 반은 항상 파이팅이 넘치는 반이었다. 반에 축구를 잘하는 아이들 몇몇이 있어 학기 초부터 학교 축구대회를 준비하거나 수업시간에도 시끌벅적하게 서로 죽이 잘 맞아 농담도 잘하고 수업시간이고 조종례시간이고 할 것 없이 짓궂은 농담을 던져대는 통에 장난반 정색반 늘 재미있게 아이들과의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내가 음악교사이다 보니 아이들은 내 눈치를 보느라 그런지 음악시간에도 최선을 다했는데 수행평가를 치면 다른 반 아이들보다 연습을 더 열심히 해서 아무리 점수를 짜게 주려해도 다른 반 보다 높은 점수가 나와서 점수를 조정해도 늘 다른 반 보다 좋은 점수가 나왔다.
2월 말이 되면 선생님들은 업무분장을 하는데 그때 내가 몇 학년 담임인지를 알게 된다.
나는 이번에 3학년 담임을 맡게 되었는데 작년에 내가 담임을 했던 2학년 아이들과 함께 1년을 더 머물고 싶어 신청을 했는데 운 좋게도 내가 원하는 학년에 배정이 되었다.
6개 반 중에 제비 뽑기를 해서 반을 뽑았다.
내가 이번에 맡게 된 반 아이들은 대체로 작년 각 반에서 거의 말없이 앉아서 수업을 듣던 아이들이 많은 학반이었다. 얼굴을 떠올려도 누구인지 생각이 잘 나지 않을 정도의 아이들이 5-6명은 되었고 얼굴은 익숙하지만 이야기 한 번 나눠보지 않은 아이들이 많은 일명 MBTI심리 검사에 I(내향형) 성향을 가진 아이들이 아주 많은 반이었다.
첫 시간에 담임 시간을 2시간 가지면서 이런저런 학급 경영에 관한 이야기를 했더니 모든 아이들이 나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다들 집중해서 내색은 안 했지만 살짝 등에서 식은땀이 쪼르르 흐르는 기분이었다.
"얘들아. ~~ 해 볼까?""선생님은 이렇게 생각하는데 너희 생각은 어때?"라는 나의 물음에 고요한 아이들의 침묵만이 교실을 감돌뿐. 아무도 대답하는 아이들이 없다.
아이들의 얼굴을 보면 다들 나의 시선을 피하기만 할 뿐. 그저 어색한 미소만 짓고 있는 아이들.
그럴 땐 왁자지껄 농담이 끊이지 않던 작년 우리 반 아이들이 그립기도 했지만 반짝반짝 호기심과 수줍음이 섞인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을 탓할 순 없다. 나도 지난날 학교에서 그런 아이였으니까.
우리 반 아이들은 말이 없는 만큼 내 의견을 잘 따라주었다. 청소당번 정하기, 학급 규칙 정하기에선 아무 의견도 없으니 내가 정한 대로 잘 따라주었고 말이 없는 건 괜찮지만 모든 종례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기 전 인사는 다들 "감사합니다"라는 큰 소리로 인사하고 가자는 나의 말에는 성의를 보여주었다.
중3 남학생. 그래. 그럴 때지.
우스운 일은 그날 저녁에 일어났다.
개학 첫날에 아이들이 작성해서 제출한 자기소개서를 하나씩 보던 나는 아이들의 공통점을 발견했는데
성격을 설명하는 칸에 "내성적입니다", "부끄럼을 많이 탑니다", "남들 앞에 나서는 것을 싫어합니다"라는 문구가 유난히 많이 보였다.
번호대로 하면 1,2,3,4,5,6,7번까지.. 중간중간 몇몇을 제외하고 25번까지 상당히 많은 아이가 쭉 그랬다.
어쩜 이렇게 비슷한 성향의 아이들끼리 한 반이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나는 갑자기 MBTI검사를 한번 해 보기로 했다.
* 우리 집의 청소년들은 수시로 MBTI검사를 나에게 시키는데 나는 잘 외우지 못한다.
나는 MBTI에 대한 특별한 관심이 없기에 I는 내향형이다 E는 외향형이다 정도를 기억할 뿐이다.
나의 검사결과는 늘 I로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처음으로 E로 시작하는 결과를 보고야 말았다.
학창 시절엔 나도 학급에 앉아 아무 말도 않고 그저 선생님의 몸짓 하나하나를 지켜보는 그저 조용한 학생이었다. 하루종일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다가 쉬는 시간에 아이들이랑 수다나 떨고 수업시간에 질문을 받으며 그저 당황해서 정답이 아닌 엉뚱한 대답을 하고 며칠이고 속상해하는 그런 성격의 아이였는데 선생님을 20년 넘게 하다 보니 하루 종일 너무 말을 많이 해서 퇴근할 무렵이 되면 목이 쉴 정도로 하루종일도 떠들어댈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예전엔 퇴근 후 학부모나 학생들에게 전화 오는 것이 그렇게 스트레스였는데 지금은 나도 모르게 저녁에 걸려오는 학부모나 학생들의 전화를 그냥 아무렇지 않게 설거지하면서 받고 또 일상을 이어가는 바깥세상과 나만의 세상의 경계가 그냥 허물어져가는 신기한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20년간 아이들을 가르치며 깨달은 것이 몇 가지는 있다.
1. 아이들이 대답하지 않는다고 해서 아이들이 듣고 있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2. 아이들은 아직 어른들보다는 마음이 유연하기 때문에 선생님이 제시하는 방향대로 따라오려는 순수한 마음이 아이들 내면에는 분명히 있다.
3. 아이들이 내 말에 대답을 시원하게 하고 있지 않지만 아이들은 노력을 하고 있다.
20년간의 경험이 힘이 될 때는 이럴 때인데 이런 사실들은 알고 있으면 아이들을 섣불리 변화시키고자 하는 성급한 마음에서 한 발짝 물러날 수 있다.
또 교실을 들어설 때마다 나를 신뢰해 주는 아이들의 따뜻한 눈빛과 그들의 존중이 있기에 나는 앞으로의 일 년을 기대하며 매일을 살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