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여행을 하기로 마음을 굳히니 걱정이 시작되었다.
나 혼자면 몰라도 딸과 함께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불안한 치안상황이 자주 보도되었기 때문이다.
위생상황도 걱정되었다.
여행자들 사이에선 심한 배탈과 설사를 인도여행의 인증샷처럼 언급했다.
누구나 피해 갈 수 없는 통과의례처럼.
어릴 적부터 면역이 약해 잘 앓던 딸이 자꾸 걸렸다.
도시 간 이동거리가 긴 데다 대중교통의 연착이 일상화되어 있다는 점도 부담이었다.
딸의 체력으로 감당해 낼지 의심되었다.
그래서 선택한 게 패키지여행이었다.
내색하지 않는 딸은 여전히 속으로 걱정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어쩌랴!
언젠가는 한번 가보고 싶은 미지의 나라였고 이미 여행경비까지 다 지불한 상태니 돌이킬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첫날 인도에 도착한 우리 비행기는 착륙허가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델리 상공을 한 시간 넘게 오르락내리락 선회할 때마다 이러다 사고라도 나는 게 아닐까 공포가 엄습했다.
그러나 인도여행의 본격적인 고달픔과 짜증은 착륙 그다음에 바로 찾아왔다.
도착비자를 발급받는 행정처리 때문이었다.
한꺼번에 몇 백 명 몰아닥친 한국 단체 관광객들을 단 두 명의 인도직원이 담당하고 있었다.
더 화를 돋우는 일은 비자발급 비용을 별도의 창구에 지불하는데 오직 직원 한 사람이 휴대용 카드 단말기로 처리하니 대기자 병목현상이 가중되었다.
여기저기서 수군거렸다.
"인도가 IT강국 맞아?"
델리 국제공항에서 PC단말기가 수시로 먹통이 되었다.
작업 중 PC가 멈출 때마다 직원이 가동하는 PC로 옮겨 다녔고, 그때마다 대기자들은 이리저리 몰려다니느라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말로 표현 못할 짜증과 인내심으로 입국심사를 마쳤을 땐 5시간이 훌쩍 지났다.
이렇게 인도에서 경험한 첫맛은 지독한 향의 카레 그 자체였다.
첫날밤은 자는 둥 마는 둥 했다.
공항사정이 어찌 되었건 패키지여행이라 프로그램대로 움직이자니 잠을 줄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비몽사몽 끌려다닌 첫 여행지에서 기억은 거의 없다.
하지만 바라나시로 이동하기 위해 들른 국내선 공항에서 또다시 기약 없는 대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엔 이륙이 문제였다.
우기도 아닌데 폭우가 오는지 비행기가 언제 출발할지 모른다고 했다.
잠시만 기다려보자던 우리 일행은 기다리다 지쳐 바닥에 아예 눌러앉았다.
아예 드러누운 사람도 있었다.
어쨌거나 자정을 넘겨서 바라나시에 도착했다.
그날도 잠을 자긴 틀렸었다.
바라나시 갠지스강의 일출을 보기 위해 새벽 4시쯤 일어나야 했다.
바라나시의 새벽공기는 탁했다.
동이 틀려면 한참이나 남았는데도 갠지스강으로 가는 길목은 인파와 릭샤 무리로 북새통이었다.
어슴프레 보았던 바라나시 사람들은 하나같이 내공이 깊은 도인처럼 보였다.
가이드가 도중에 따뜻한 짜이를 사주었지만 위생이 걱정되어 토기잔에 입도 대지 않고 두어 모금 마시다 말았다.
딸은 맛있다며 다 마셨다.
나보다 모험심이 강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갠지스강은 인도인에게 최고의 성지라는데 내겐 신성한 장소로 다가오지 않았다.
화장한 재를 뿌리고 온갖 오염수가 흘러드는 강물에서 목욕재계를 하는 모습은 나쁜 의미에서 경이로웠다.
국제기구의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수질환경 기준치의 3천 배 넘게 오염되었다고 하는데 그 물을 마시는 사람도 보였다.
종교와 기복이라는 최면효과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이런 모습들을 배경으로 미소띠며 기념사진을 찍는 나의 여행심리는 어떻게 평가받아야 할까.
갠지스강가에 오갈 땐 릭샤를 탔다.
릭샤는 오토바이를 개조해서 뒷 좌석을 택시처럼 넓힌 대중교통수단이었다.
차가 다니는 큰길에서 한참이나 좁은 골목길을 거쳐야 강변에 접근할 수 있기에, 릭샤는 현지에 맞게 최적화된 교통수단이었다.
릭샤 두 대가 겨우 교행 할 수 있는 골목길엔 보행자와 오토바이, 자전거 등 온갖 개인 교통수단들로 붐볐다.
거기에 소라도 한 마리가 길 가운데 버티고 있으면 순식간에 마비가 될 듯했다.
그런데도 신기하게 교통체증은 거의 없고 제법 원활하게 움직였다.
접촉사고가 나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냥 스쳐 지나갔다.
클랙슨의 용도도 비켜나라는 경고음이 아니라 내가 여기 있으니 주의하라는 의미였다.
한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는 릭샤 운전사들의 운전 솜씨는 신기에 가까웠다.
물론 나와 딸은 좁은 릭샤 안에서 혼비백산했지만 말이다.
도시계획을 공부한 나는, 호텔 침대에서 누워 빙글빙글 돌아가는 천장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계획이 없어도 도시가 잘 돌아갈 수도 있구나."
이렇게 인간은 세상의 모양에 맞게 퍼즐조각 맞추듯 자신을 맞추며 살아내는 모양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최초로 설법하셨다는 녹야원은 생각보다 한산했다.
그곳에서 금강경이나 법화경 속에서 처럼 부처님이 설법하시는 모습이 잘 연상되지는 않았다.
바라나시의 정신없는 현실을 연상하면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출가해서 수행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 듯도 했지만 쉽지는 않았다.
인도에서 불교는 거의 사라진 종교였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뭐든지 포용하는 힌두교의 힘이 불교마저 흡수했기 때문이다.
카주라호로 가는 11시간의 버스 여정은 힘들었다.
나름 고속도로라는 포장길을 달렸는데 자전거와 오토바이도 다녔다.
심지어 소와 개도 어슬렁 거렸다.
그 사이를 자동차들은 묘기를 부리듯 피해 다녔다.
역주행한 차들도 자주 보았다.
그러고 보니 인터체인지가 없었다.
반대차선으로 가기 위해선 출입이 가능한 중앙분리대까지 역주행을 할 수밖에 없었다.
졸다가 우연히 이 장면을 목도하고 번개에 맞듯 잠이 달아났지만 우리 운전사는 태평스러웠다.
그게 인도의 일상사라는 듯이.
카주라호는 내게 인도 여행의 백미였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본 선정적인 조각사원이 있는 소도시였다.
아무 생각 없이 들어선 조각사원은 일명 에로틱 힌두사원이었다.
남녀의 성행위 모습은 음양 합일의 사상을 표현한다고 했다.
심오한 종교적, 철학적 의미가 있겠지만 딸과 함께 감상하기에는 몹시 불편했다.
그럼에도 내 눈에는 몇 백 년 전 이름 없는 인도 예술가의 혼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한참이나 조각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인도 사람들이 사진을 함께 찍자고 딸에게 여러 차례 부탁했다.
뽀얀 얼굴의 외국인과 함께 찍는 사진이 현지인에겐 괜찮은 기념인 듯 했다.
타지마할이 있는 아그라까지는 9시간 동안 기차로 이동했다.
인도에선 고급 칸이라는데 그다지 고급스럽진 않았다.
세 사람이 앉는 좌석 중간에 우리나라 홍익회 점원 같은 녀석이 차지하고 있었다.
더구나 좌석 주변에 생수며 주전부리며 판매할 각종물품으로 가득 메워 놓았다.
딸아이와 떨어져 배정받은 좌석을 서로 바꾸자고 부탁하니 한사코 거부했다.
나중에 우리 일행이 우르르 몰려들자 모든 물품을 옮기며 사라졌다.
그 자리는 애초 자기 자리가 아니었다.
우리 좌석은 평소 여간해서 예약하지 않는 자리여서 항상 그 친구가 점령하다시피 한 모양이었다.
사정을 알고 보니 미안했지만 9시간을 이동하는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잠시 들른 캐시미어 가게에서 여러 종류의 목도리를 샀다.
영화배우 같은 점원이 나를 모델 삼아 설명한다고 목도리를 둘러주었다.
일행들이 잘 어울린다고 했다.
부모형제들의 선물용으로 딱이다 싶었다.
여러 개 골라 흥정했다.
딸과 나 말고 다른 일행은 관심이 없었다.
흥정 끝에 내가 원하는 가격에 샀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바가지였다.
이런 것도 여행의 일부라 여기며 쓰라린 가슴을 달랬다.
아그라는 타지마할로 먹고사는 도시였다.
아침 일찍 나섰는데도 관광객이 바글바글했다.
출입구에서 보이는 순백의 대리석 건축이 작은 공예품처럼 아침 햇살에 반짝였다.
타지마할이라는 이름은 왕관모양의 궁전이라는 뜻이라지만 실은 왕과 왕비의 무덤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이지만 내게 구걸하던 인도 아이의 커다란 눈망울이 자꾸 겹쳐졌다.
어떤 인도인이 내게 다가왔다.
1달러만 주면 사진을 근사하게 찍어주겠노라 했다.
인파 사이로 괜찮은 프레임을 찾지 못했던 딸과 나에겐 너무나 고마운 제안이었다.
그 친구가 원하는 대로 우리는 이렇게 저렇게 포즈를 취하였다.
딸아이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옮겨 준 그 친구 왈,
"26달러 주세요."
"1달러라고 했잖아."
"1장에 1달러인데 26장 찍었어요."
"무슨 소리. 1장에 1달러가 아니고 사진 찍어주면 1달러라고 말했잖아."
"분명히 1장에 1달러라고 했는데요."
"그럼 다 지울 테니 알아서 해라."
옥신각신하다,
"그럼 10달러만 주세요."
"싫다. 난 지우고 갈란다."
"안 돼요. 10달러 주세요."
"그럼 5달러만 받아라."
"할 수 없네요. 그럼 5달러 주세요."
"옛다. 도둑놈아."
캐시미어 바가지에 비하면 이런 소소한 사기는 귀엽다. ㅋㅋㅋ
나와 그놈이 옥신각신하는 사이에 딸은 사진을 카톡으로 슬쩍 옮겼노라 말했다.
혹시 아빠가 잘 나온 사진을 진짜 지우고 그냥 갈까 봐 그랬다나.
강 건너 아그라성에서는 타지마할이 아련히 보였다.
왕비의 무덤을 만드는데 쓸데없이 국고를 낭비하자 아들이 부왕을 몰아내고 이 성에 가두었다.
부왕은 아내가 묻힌 타지마할을 매일 슬픈 눈동자로 쳐다보았을 것이다.
그러게 왜 묘지에다 아까운 돈과 백성들의 고혈을 그렇게 쏟아부었는지.
인도에는 지하 깊숙이 파내려 간 우물이 많았다.
물이 나지 않은 지역이라 깊이 파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을 터다.
이런 우물에서 인도인의 수학 능력을 엿볼 수 있었다.
그 옛날 우물로 내려가기 위해서는 10층이상 높이의 계단을 만드는데 치밀한 수학적 계산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인도 사람인 우리 가이드는 돈 계산이 매번 틀려 바로 잡아주었다.
자이푸르도 인도의 주요한 역사도시인데, 내겐 역사유적보다 시내구경이 더 재미있었다.
활기찬 자이푸르 시민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자이푸르만 놓고 봐도 인도는 정말 컬러풀한 나라였다.
화려하고 다양한 빛깔의 의상, 신기하고 다채로운 물건들, 나는 사원이나 궁전보다. 이런 것들이 오히려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오래된 유적지에서 그대로 삶을 일구어가는 현지인들의 모습에서 전통과 현대의 살아있는 조화를 볼 수 있었다.
자이푸르에 와서 처음으로 인도에 대한 호감이 생겼다.
다시 델리로 왔을 땐 여행의 마지막 날이었다.
첫날 공항에서 이 지긋지긋한 곳을 어떻게 일주일 넘게 버티나 싶었다.
그랬던 나와 딸은 서로에게 딱 이틀만 더 머물고 싶다는 말을 나누었다.
고생스러웠지만 떠나려니 진한 아쉬움이 밀려왔다.
이제 가면 언제 또 올 수 있으려나.
여행이란 그런 것인가 보다.
인도는 국토가 넓고 역사도 역동적이라 봐야 할 유적지도 다채로웠다.
유명한 관광도시 간 이동거리가 길고 교통수단들의 연착이 잦아 몹시 불편하고 짜증이 나기도 했다.
그래도 하루이틀 지나다 보니 차츰 물들어가 익숙해졌다.
관광지에서 소소하게 사기치는 사람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순박했다.
우리나라 기준으로 불편한 점이 많지만 여행 다니는 동안 다양한 볼거리, 활기차게 살아가는 사람들, 신물 나게 먹은 카레음식이 오랫동안 잊힐 것 같지 않았다.
세상엔 다른 좋은 곳도 많지만 예측불가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인도를 다시 한번 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델리공항에서 인천행 비행기를 기다리는데 1시간가량 늦게 출발한다고 문자가 왔었다.
하지만 일행 중에 이걸 그대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8박 9일 동안 인도에서 겪어본 바에 의하면 언제 비행기가 이륙할지 아무도 몰랐으니까.
누구 한 사람 첫날처럼 짜증을 내진 않았다.
그러려니 별생각 없이 그냥 기다리는 게 마음 편했으니까.
그게 인도니까.
인도는 귀국하는 날까지 뭐 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게 없었지만 불평하는 사람 하나 없는 희한한 나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