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과 크로아티아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5, 6일간 시차적응에 시달렸다.
잠을 자려고 노력하는 밤엔 정신이 말똥말똥하고 낮엔 오히려 잠이 쏟아지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이런 심한 후유증을 겪기는 처음이다.
5개월가량 미국 연수생활 후에도 2, 3일 밤을 자고 나서 거뜬히 정상적인 한국생활주기로 돌아왔었다.
기껏 8박 9일 동안 시차가 6시간 밖에 나지 않는 나라를 다녀와서 이 지경이 된 걸 보니 나도 이제 제법 나이가 들었음을 실감한다.
뭘 하던 마음과는 달리 내 몸은 회복이 더뎌지고 점점 쇠락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여행은 전처럼 들뜨지 않았다.
여행을 하는 동안에도 감흥이 크지는 않았다.
두 번째 간 곳이기도 하거니와 워낙 오랜만의 해외 나들이라 내 감정이 무뎌진 듯도 했다.
무엇보다 뭘 하던 시큰둥해지는 나이 탓인 듯도 싶었다.
오히려 나는 몇 번이고 후회하기까지 했다.
좁은 좌석에서 10시간 넘게 자는 둥 마는 둥 번데기처럼 쭈그리고 앉아 있을 때마다.
날마다 잠자리를 바꾸며 아침저녁으로 풀었다 싼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숙소문을 나설 때마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물을 끓여 컵라면을 불려 먹을 때마다.
내가 무슨 인생의 낙을 바란다고 이런 개고생을 하러 집을 나섰던가?
그리고 돌아와서 이 무슨 후유증이란 말인가? 하면서.
이랬던 나의 후유증은 몸보다 마음에서 더 두드러졌다.
더구나 몸과는 반대로 마음은 역설적이었다.
시차에 잠 못 이루는 밤마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다음 여행을 생각했다.
한숨도 못 자고 하룻밤을 꼴까닥 지새우기도 했다.
이 짓이 밤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잠이 쏟아지는 낮에도 사무실 컴퓨터를 쳐다보고 있다 보면 어느새 누군가의 여행기를 읽고 있었다.
심지어 여행사 홈페이지를 들락거리며 어느 여행지에 대한 일정과 가격을 비교하곤 했다.
실천 가능성은 제쳐두고 내 머릿속은 밤낮으로 다음 여행을 구상하느라 다른 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 말겠거니 몇 날을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었는데 날이 갈수록 증세가 심각해져 갔다.
시도 때도 없이 일상의 다른 생각들 틈을 비집고 떠오르는 장면과 순간이 있었다.
낯선 곳에서 보았던 자연의 경이와 벅차오르는 숭고미.
아주 오래전 사람들의 흔적에서 느끼는 인생의 허무와 폐허미.
기억을 새기듯 여기저기 마구 찍은 사진을 보며 딸과 큭큭 거리던 순간.
그곳 이름이 들어간 자석, 열쇠고리, 컵 같은 소소한 기념품이 고작이지만 밥 먹듯 했던 돈 쓰는 재미.
그리고 사진을 찍어 줄 때마다 훔쳐본 훌쩍 성숙해 버린 트래블 메이트로서 딸의 옆모습.
정확히 뭣 때문인지 알 길이 없지만, 아마 내속에서 이런 것들이 다시 여행을 떠나라 부추겼지 싶다.
우선 어디로 가면 좋을까를 두고 매일매일 생각이 바뀌고 있었다.
가본 곳이라도 다시 가보고 싶어 했던 곳이 좋을까?
아니다 세상은 넓은 데 가보지 않은 곳을 부지런히 다녀야 되지 않을까?
혼자 갈까?
아니면 딸아이들과 함께 갈까?
맞벌이하는 아내는 남겨두고 혼자만 인생을 즐겨도 괜찮은 걸까?
같이 가더라도 어차피 경비는 다 내가 부담해야 하는데 가능할까?
다른 가족들이 시간은 낼 수 있을까?
패키지여행이 좋을까 자유여행이 좋을까?
여행의 맛을 제대로 보자면 자유여행이 낫지 않을까?
교통, 숙박, 식사 등 모든 것을 혼자서 알아봐야 하는데 그 스트레스를 감당할 수 있을까?
몇 번의 자유여행은 즐거운 추억이지만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았었지?
그럴 정신적 육체적 부담을 감당하기엔 꼼꼼한 성격의 내가 이 나이에 이겨낼 수 있을까?
게다가 비용도 따지고 보면 패키지여행보다 적지 않으니 말이다.
요즘은 자유시간도 충분히 갖는다고 하니 속 편한 패키지여행이 좋지 않을까?
틀에 박힌 일정이 좀 걸리지만 알짜배기 여행지를 시간 낭비 없이 다니니 가성비면에선 낫지 않을까?
하지만 현지보다 비싼 비용으로 선택관광을 강권하면 거절할 도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도 선택관광이 꼭 해봐야 할 것들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딸아이의 의중도 떠 보았다.
다음에는 어디로 가고 싶니?
역사유적이 있는 곳이 좋겠어 아니면 휴양지가 좋겠어?
좀 멀리 가고 싶냐 아니면 가까운 곳이 좋겠냐?
혹시 우리 둘만 또 가면 엄마나 언니가 서운해하지 않을까?
네가 엄마한테 살짝 물어볼래?
언니도 같이 갈 수 있는지 물어볼래?
열흘 넘게 비몽사몽 간을 헤매던 중 북인도 패키지여행을 발견했다.
언젠가는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더구나 근자에 금강경과 법화경 등 불경을 공부하고 있어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신 나라가 궁금하던 차였다.
하지만 내가 가진 선입견으로는 인도 여행이 불편하고 치안과 위생에 문제가 많은 곳이었다.
자유여행을 하기에는 많은 준비와 사전지식이 있어야 하기에 이 패키지여행에 마음이 쏠렸다.
여행사에서는 백만 원 초반대의 5박 6일 일정과 백만 원 중반대의 7박 9일 일정이 있었다.
당장의 끓어오르는 여행 욕구를 달래주려면 싼 비용에 짧은 일정이 낫겠지만 가보고 싶었던 바라나시와 갠지스강 일정이 빠져있었다.
2, 3일간 이리 재고 저리 쟀다.
여행후기를 찾아보니 인도는 도착비자를 발급받아야 하는데 행정처리가 느려터졌다는 불만이 많았다.
시간관념이 희박해 대중교통도 연착이 빈번한 모양이었다.
긴 일정에는 도시 간의 거리가 멀어 10시간가량의 열차이동도 두 번 포함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그게 인도 여행의 맛이라고 했다.
딸이 힘들어할 것 같았다.
카톡에 메시지를 남겼다.
이러저러한데 7박 9일 인도 여행 같이 갈 수 있겠니?
생각해 볼게.
한참 후 답이 왔다.
나도 갈게.
딸도 나와 같은 후유증을 앓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우리 둘은 조만간 다시 여행을 떠나기로 모종의 합의 보았다.
신비롭게도 며칠간 앓던 여행 후유증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여행에 관해 나도는 이런저런 경구들이 막 떠올랐다.
누가 물어보기라도 한 듯 마치 나의 결정을 합리화라도 하려는 듯이.
옷은 살까 말까 하다 사지 않아야 후회하지 않고 여행은 떠날까 말까 하다 떠나야 후회가 없다고 했다.
독서는 내 안으로 떠나는 여행이고 여행은 바깥세상을 읽는 독서라는 말도 들은 듯하다.
여행은 중독이라는 말이 맞다.
이 정도면 여행을 떠나기에 충분한 핑계 아닌가?
무엇보다 여행을 하려면 세 가지 조건이 동시에 갖추어져야 한다고 했다.
돈, 시간, 체력.
아직 직장을 다니고 있으니 여행경비 정도는 틈틈이 모아 둘 수 있다.
현업을 떠난 임금피크직이라 내가 원할 때 원하는 만큼 시간도 낼 수 있다.
젊은 시절부터 꾸준히 운동을 해왔기에 여행 다닐 체력도 아직은 충분하다.
퇴직하면 남아도는 게 시간이겠지만 공식적인 수입이 끊어지니 여행을 맘 놓고 다닐 형편은 못될 것이다.
또한 아무리 관리를 잘한다 하더라도 해마다 쇠퇴할 몸이다.
내 나이 올해 60살.
특별히 집안 경조사나 돌발사태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내겐 지금이 인생에서 여행하기 딱 좋은 때다.
딱히 맘 붙일 만한 일이 없는 지금 이 절호의 시기에 여행을 하지 않는다면 후회할게 뻔하다.
하지만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다.
지난 여행에서 일행 중 한 중년 남성이 이런 말을 했다.
"돈, 시간, 체력에다 한 가지 더 필요해요."
"뭔데요."
"아내의 윤허입니다."
이번에도 아내는 흔쾌히 윤허하리라 믿었다.
아빠가 인생의 허무를 느낄 때마다 흔쾌히 여행 동반자가 되어준 딸과 함께 하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