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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급 인생 Jan 12. 2023

자식, 사랑과 집착

시를 읽었다.


                                                            허공 한줌
                                                                                                                       나희덕

 이런 얘기를 들었어. 엄마가 깜박 잠이 든 사이 아기는 어떻게 올라갔는지 난간 위에서 놀고 있었대. 난간 밖은 허공이었대. 잠에서 깨어난 엄마는 난간의 아기를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이름을 부르려 해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어. 아가,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엄마는 숨을 죽이며 아기에게로 한걸음 한 걸음 다가갔어. 그리고는 온몸의 힘을 모아 아기를 끌어안았어. 그런데 아기를 향해 내뻗은 두 손에 잡힌 것은 허공 한줌뿐이었지. 순간 엄마는 숨이 그만 멎어 버렸어. 다행히도 아기는 난간 이쪽으로 굴러 떨어졌지. 아기가 울자 죽은 엄마는 꿈에서 깬 듯 아기를 안고 병원으로 달렸어. 아기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 말고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기는 울음을 그치고 잠이 들었어. 죽은 엄마는 아기를 안고 집으로 돌아와 아랫목에 뉘었어. 아기를 토닥거리면서 곁에 누운 엄마는 그 후로 다시는 깨어나지 못했지. 죽은 엄마는 그제서야 마음 놓고 죽을 수 있었던 거야.
 이건 그냥 만들어 낸 얘기가 아닐지 몰라. 버스를 타고 돌아오면서 나는 비어있는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았어. 텅 비어 있을 때에도 그것은 꽉 차 있곤 했지. 수없이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그날 밤 참으로 많은 걸 놓아주었어. 허공 한줌까지도 돌려주려는 듯 말이야.


막내딸이 한 달 하고 조금 더 전에 마침내 조그만 회사에 취업을 했노라 수줍게 카톡을 보내왔다.

얼마 전엔 첫 월급이라며 내 통장으로 10만 원을 보냈다.

나는 고맙다는 말대신 큰 소리로 웃었다.


그 딸이 그저께는 퇴근하자마자 저녁도 먹지 않고 방에 틀어 박혀 나오질 않았다.

뭔가 낌새를 챈 아내가 살며시 들여다 보더니 양손 검지 손가락을 눈가로 가져가 우는 시늉을 다.


사회생활을 처음 하니 몹시 고달픈 모양이다.

엄마 아빠한테서 어리광만 부리다, 난생처음 제 몫으로 떨어진 일을 하자니 힘들게 뻔하다.

그보다 상사나 선배가 일상적으로 하는 작은 꾸지람이 가슴을 도려내는 듯 한 모양이다.


사회생활이 으레 그런 줄이야 알지만, 자식이 그러하니 마음이 아프다.

내가 직장 짜시절에 겪었던 일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생각 같아선 당장 그만 두라 말하고 싶다.

어리석게도 남들처럼 아빠 찬스도 만들어 주지 못하는 나 자신이 라해진다.


아기를 구하기 위한 엄마의 첫 번째 행동은 실패했지만 아기는 죽지 않았다. 아이가 자라는 동안, 이런 정도로 끔찍하진 않더라도, 비슷한 일이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자식이 난간 위에 있을 때 그 아이를 살릴 수 있고 또 살려야 할 사람은 자신 뿐이라고 부모는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부모가 언제나 아이를 받아낼 순 없으리라. 더 나아가 그래서도 안 되는 것이라면? 제 몫으로 주어진 굴러 떨어짐을 감당함으로써만 아이가 살아날/살아갈 수 있는 것이라면? 이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부모는 자주 허공을 움켜쥐며 자책할 것이다. 그 허공을 허공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중략)
시인은 이것이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세상에서 가장 잘 아는 사람 중 하나이므로, 이제 그가 알아야 한다고 스스로 생각한 것은 그 사랑을 부드럽게 내려놓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저 지극한 사랑의 이야기에서, 그 사랑의 배후와 근저에 있는 강렬한 '움켜쥠'의 에너지를 발견하고, 그것으로 부터 성숙한 거리를 두는 일의 깊이를 생각했을 것이다.

(신형철의 <인생의 역사> 105~106쪽)


 나희덕 시인의 시를 신형철 교수가 이렇게 풀어주었다.

딸을 토닥거려야 할 내가 오히려, 이 글을 읽고 마음이 풀어졌다.

고단하고 굴욕적인 과정을 거쳐야 딸은 제 몫의 삶을 살아갈 근육이 생길 것이다.


어쩌면 딸아이 때문이 아니라 내 안의 집착 때문에 내 마음이 아팠는 지도 모른다.

딸이 이겨낼 때까지, 단련이 될 때까지 말없이 지켜보는 게 맞는 일이라 스스로 다독여 본다.


또, 신 교수의 글이, 딸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아빠의 핑계가 아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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