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해외여행 때의 일이다.
여행 3일 차, 그날 묵을 밀라노의 어느 호텔에 도착해 배정된 방 열쇠를 받아 별생각 없이 룸을 찾아 들어갔다.
날씨가 더워서 아내는 룸에 들어서자 말자 샤워부터 해야겠다며 필요한 물품을 챙기고 있었다.
나는 아내가 샤워하는 동안 생수와 간식도 살 겸 주변을 돌아보려고 호텔 밖으로 나왔다.
문은 방걸쇠를 틈에 끼워 살짝 열어두었다.
내 딴에 피곤했을 아내가 나중에 귀찮아할까 봐 생각한 배려였다.
호텔은 도심지와 다소 떨어진 곳이라 그런지 마트가 잘 보이지 않았다.
딱히 산책할만한 분위기도 아니어서 호텔 로비 모퉁이의 소파에서 앉았다가 룸으로 올라갔다.
문이 닫혀 있었다.
아내가 샤워하러 가느라 닫았겠거니 여겼다.
초인벨이 보이지 않아 살짝 노크를 했다.
얼마간 기다렸는데 인기척이 없었다.
아직 샤워 중인가 보다 했다.
한참을 더 기다렸다 문을 두드렸다.
가끔 그러했듯 한쪽 귀의 청력이 약한 아내가 못 들었는지 여전히 조용했다.
또 한 번 문을 두드렸다.
이번엔 조금 더 세게 두드렸다.
샤워 중이라면 물소리 때문에 못 들을 수도 있겠거니 했다.
너무 피곤해서 샤워 후에 살짝 잠이 들었을 수도 있다고도 생각했다.
다시 쾅쾅 소리가 날 정도로 쳤다.
여전히 아무런 기척이 없었고 슬슬 부아가 나기 시작했다.
오르는 혈압에 비례하여 두드리는 주먹에도 힘이 더 들어갔다.
아무리 청력이 약하고 잠이 들었더라도 이 정도 소리라면 충분히 들리고 남을 텐데 어찌 된 일인지 이상했다.
마침내 옆 룸에 투숙한 중년의 백인여성이 빼꼼히 내다보았다.
문틈사이로 강아지도 튀어나와 짖었다.
불안하고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흘끔 보더니 강아지를 안고 잽싸게 들어갔다.
다행히 다른 룸에는 투숙객이 없는 듯했다.
그 와중에 아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내가 깊이 잠들어 있을 거라 확신했다.
하긴 이제 60대에 들어섰으니 장시간 비행에다 시차를 견디면서 온종일 돌아다녔으니 침대에 눕기만 해도 눈이 감길 만했다.
로비로 내려갔다.
체크인하던 중년의 아주머니가 카운터에 있었다.
나는 손짓 발짓을 섞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방에 아내가 잠들었는지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열쇠는 방에 있기 때문에 내가 들어갈 수가 없다.
스페어 키를 주면 문을 연 후에 다시 돌려주겠다."
떠듬거리며 영어로 말하느라 삐질삐질 땀까지 났다.
이태리 아주머니는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딱 한마디만 했다.
"NO"
무뚝뚝하고 불친절했다.
더는 대꾸하기 싫다는 듯 휙 하고 돌아섰다.
난감했다.
인솔자의 전화번호도 저장해 두지 않았었다.
인솔자에게 알려달라고 말했지만 아주머니는 손사래를 치며 외면했다.
가끔 동양인에게 불친절한 호텔이 있다고 들었는데 여기가 바로 그런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방으로 올라가 방문을 두드렸다.
화가 날대로 난 나는 아내에게 저주하듯 중얼거리며 쾅쾅 대었다.
카톡도 날렸다.
하지만 잠들었다면 카톡을 확인할 리 없었다.
두 사람의 휴대폰은 해외 유심을 갈아 끼워 통화도 어려웠다.
딸아이에게 엄마에게 전화하라 카톡을 보냈지만 바로 후회했다.
한국의 딸은 한참 꿈나라에 있을 시간이었다.
한참을 복도에서 망연자실하게 서있다 다시 카운터로 갔다.
이태리 아주머니가 내 영어를 정확히 알아듣지 못했을 거라 판단했다.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해야 할 말을 정확한 영어문장으로 만들어 두느라 머리에서 쥐가 났다.
카운터 초인벨을 누르니 짜증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로 아주머니가 다시 나왔다.
이번엔 더 간곡한 표정과 함께 영어를 주절댔다.
자신 없게 말한 부분은 키워드를 힘주어 말하며 반복하기도 했다.
아주머니는 어이없다는 듯이 열쇠 꾸러미 보여주며 뭔가를 말했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열쇠는 두 개가 보였다.
순간 번쩍하고 상황이 모두 이해가 되었다.
"방 열쇠가 여기 다 있는데 그 방에 누가 있다는 거냐?"라고 아주머니가 말했음이 분명했다.
그 룸엔 아무도 배정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맞다, 우리 일행은 모두 1층과 2층에 배정받았었지.'
나는 5층의 같은 호실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던 것이다.
전날 묵었던 호텔의 룸이 5층이었다.
착각이었다.
2층으로 올라갔다.
우리 룸은 내가 나갈 때 해 두었던 상태 그대로 걸쇠가 끼워진 채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아내는 머리를 말린 후 수건을 두르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눈을 흘기며 핀잔을 주었다.
"샤워를 하고 있는데 누가 들어오면 어쩌려고 문을 열어 두고 갔냐?"
나는 그저 한숨만 몰아 쉬었다.
건망증이 이 정도면 치매가 걱정될 정도다.
세상사람 모두가 자신의 일을 하고 있었을 그 시간에 나는 분주하게 나만의 세계를 돌아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저주하고 성질을 부리기도 했다.
별의별 불안한 생각도 하면서 안절부절못했다.
저 하늘에서 누군가 내려다보았으면 한 편의 코미디 촌극이었다.
아니면 비극일 수도 있었다.
나이를 먹어 깜빡깜빡할 때도 있지만 이 지경이면 좀 심각하다.
만약 여행 중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인생에서 막중한 선택의 순간이었다면 어떠했을까?
나는 나만의 세계에 빠져 다른 사람의 말은 듣지 않고 내 생각을 고집했을게 뻔하다.
지난 간 일들을 떠올려 보았다.
딸이 전공을 선택할 때 내 생각 만을 강요했고 따르지 않은 딸을 괘씸하게 여기기도 했다.
집안일을 상의하던 아내에게 내 방식대로 하지 않는다며 화를 벌컥 낸 적도 많았다.
상황을 제대로 인식 못한 채 후배 직원의 의견을 무시한 적도 적지 않았다.
친구와 언쟁하다 이겼노라 뿌듯해하기도 했었다.
그들이 그냥 넘어가 주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마지못해 내 뜻대로 따른 것은 아니었을까?
나를 원망하고 있지나 않을까?
내가 틀릴 수도 있음을 왜 몰랐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