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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위 있는 죽음을 위하여

by B급 인생

오랫동안 요양원에 계신 아버지는 최소한의 거동 외에는 일상의 활동이 불가능한 상태로 하루하루를 보내신다. 침상을 중심으로 행동반경이 축소된 채 생명을 위한 최소한의 활동이 일상의 전부다. 구순 중반이신 아버지는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무슨 생각부터 하실까? 극도로 단순 반복되는 하루하루가 어떤 의미이실까? 생의 끝자락이 멀지 않은 사람들 틈에서 자신의 운명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실까?


계단에서 굴러 고관절이 부러진 어머니는 응급실에서 깨어나셨을 때 섬망증이 심하셨다. 현실을 자각하지 못해 소란을 많이 피우셨다. 이번의 사고로 치매증세도 본격화되신 듯하다. 구순을 눈앞에 두신 어머니는 어린아이 수준으로 내려간 듯한 언행을 자주 하신다. 다행히 근래엔 당신의 상황을 인지하시고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지만, 언제 또 섬망증이 발현될지 걱정이다. 어머니는 병상에서 이런 황망한 일상을 어떻게 대하고 계실까? 삶의 경계가 희미하게 보이는 지금 어떤 생각이 드실까?




부모님의 유전자를 반씩 물려받은 내 생의 끝자락도 당신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짐작한다. 간병과 돌봄이라는 윤리적 책임감에서 잠시 벗어나, 자식의 입장에서 한 발짝 떨어져 부모님의 상황을 바라보았다. 부모님의 모습이 애처롭고 안타까우면서도 나는 저런 모습으로 생의 막바지를 맞이하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 찾아온다. 나는 좀 더 품위 있는 모습으로 마지막을 장식하고 싶다.


품위 있게 늙어가다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 육신이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는 때가 온다면, 의지와 관계없이 내 정신이 온전치 못한 때가 온다면 과연 나는 부모님의 상황과 다른 모습일 수 있을까? 100세까지 산다는 장수시대가 열렸다고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몸과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로 산다면 품위 있게 죽음을 기다릴 수 있을까? 병상에 누워 계신 두 분을 대할 때마다 자식으로서 안타까움과 고달픔을 토로하다가도 나의 미래를 보는 듯하여 우울해지기도 한다.


나도 육신이 늙어 한낱 물질 덩어리에 지나지 않고 본능에만 지배되는 때가 올 것이다. 그때에는 어떻게 생을 꾸려야 할까? 그런 나를 누가 돌보고 있을까? 부모보다 궁핍한 세대라는 아이들에게 최소한의 짐을 덜어 줄 수는 있을까? 늙어간다는 것은 알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이 황망함은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것일까?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이하고픈 욕망은 헛된 꿈일 뿐인가? 그저 본능에 충실한 동물처럼 마지막을 맞을 수밖에 없는 것일까?




법의학자 유성호의 <유언노트>는 이런 막연한 의문과 질문에 나침반이 되어주었다. 저자는 일 년에 한 번 자신의 유언을 기록해 남긴다고 하는데 실제 그의 유언이 이 책에 실려 있어 깊은 생각에 잠기게 했다. 유언은 삶을 향한 다짐이라고 한다. 유언을 작성할 때마다 살아온 삶을 정리하면서 현재의 위치를 인식한다는 것이다. 즉, 자신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앞으로의 삶을 계속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죽음을 준비하는 것은 끝을 계획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삶을 더 충실하게 살기 위한 다짐이자 생의 매 순간을 음미하게 만드는 과정이다. 죽음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곧, 오늘을 더욱 사랑하고 내일을 준비하며,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것이 우리가 남은 삶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방법이다."(157쪽)


'행복한 삶의 마무리를 위해 위해 가장 중요한 조건은 자신의 삶에 대한 주도적 태도'라고 강조한다. 삶의 마지막 시기는 그간의 삶의 여정을 정리하고 사람들과 연결되며,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마무리를 지을 기회라고 한다. 이 시기에 필요한 조건 세 가지를 제시하는 데, 나는 앞으로 어떻게 생의 막바지를 준비하며 살아야 할지 방향타가 되었다.


첫째, 준비된 마음과 계획이 필요하다고 한다. 죽음을 마주하기 전에 주변에 자신의 의사를 명확히 정리하여 공유하라고 한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자신정리, 유언 작성 등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삶을 마무리하도록 준비하여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상실감과 죄책감을 벗어날 수 있게 하라는 것이다.


둘째, 삶을 충실히 사는 자세를 요구한다. 행복한 삶의 마무리를 위해 매 순간 의미 있고 충실하게 보내라는 말이다.


셋째, 죽음 자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라고 한다. 죽음을 피하거나 두려워하기보다는 삶의 자연스러운 일부로 받아들여 주변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라는 것이다. 죽음을 배우고 준비한다는 것은 종말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지, 누구와 연결될 것인지, 무엇을 남길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다. 죽음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이를 통해 삶의 가치를 재발견한다면, 지금 보다 더 충만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 말한다.(228-229쪽)




이 책을 다 읽은 후 처음으로 돌아가 서문을 다시 읽었다. 삶의 기록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는 대목에서 구체적으로 지금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뭘 해야 하는지 눈이 번쩍 뜨였다.


브런치에 글을 올리려 가끔 끙끙거릴 때가 있었지만, 이 글들이 먼 훗날 내가 살아낸 삶의 소중한 증거일 수 있을 거란 믿음이 들었다. 나는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무얼 그리 고민했는지, 언제 기쁘고 슬펐는지, 훗 날 자식들에게 내 치열했던 삶을 증거 해 줄 것이다. 아내가 가끔 읽어볼 뿐 가족이나 주변 지인들 조차 읽지 않는 시답잖은 글들이 내가 이 세상에 왔다간 진실한 흔적이겠다 싶었다.


삶을 기록하는 과정은 자신이 살았던 삶의 흔적을 남기고, 다음 세대에 삶과 죽음의 가치를 전하는 행위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타인과 지속적으로 연결되며, 세상을 떠난 뒤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는 삶의 마지막인 죽음을 준비하는 일이 나 자신과 주변사람들에게 평안을 주는 과정임을 알려준다. 장례, 연명의료, 유산 등 죽음 이후에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미리 정리하고 준비한다면, 남겨진 사람들에게 부담을 덜어 줄 수 있다. 이는 자신의 죽음을 존엄하게 받아들이는 행위이면서 남겨진 이들을 위한 사랑의 표현이기도 하다.(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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