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비 Apr 05. 2021

내게 무해한 식물

<조금 괴로운 당신에게 식물을 추천합니다>, 이랑


식목일이니까 식물 얘기를 해볼까. 어렸을 때부터 식물은 음악 같은 거였다. 너무 좋아하고, 잘 하고 싶었지만 도무지 솜씨가 없어 뭘 해도 엉망이 되는 아주 서툰 일. 나는 그 쉬운 리듬악기도 제대로 다루질 못 했고, 반 친구들 모두 잘만 키우는 산세베리아와 율마를 여럿 죽였다. 연둣빛이 사그라 들면서 진초록의 무성한 잎을 자랑했는데 나만 황색을 띄었다. 만화 슈가슈가룬 속에서 호박색 하트는 당황을 의미한다. 식물도 같았다. 내 율마가 황금색이 될수록 내 마음은 자꾸 당황하고 움츠러들었다. 내 손으로 뭔갈 죽이는 게 너무 마음이 아파서 그 다음부터는 포기하기로 했다. 대신 이 세상 최고의 가드너 햇빛과 공기와 토양이 키우는 야생화를 좋아했다. 남이 잘 키워놓은 걸 내가 보고 즐기는 게 훨씬 마음도 가볍고 기쁜 일이었다. 그래서 어릴 땐 유난히 사생대회를 좋아했다. 그림을 곧 잘 그렸냐 하면 단 한번도 입상해본 적 없으니 단연코 아니라 답할 수 있다. 전경에는 관심이 없었고 하루종일 나뭇잎을 한장 두장 뜯어서 그리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해체주의 화풍이 완성 됐고, 사실주의 화풍을 제일로 여기는 사생대회의 심사기준에는 영 들어맞질 않았다.



봄이 되면 세상이 모두 봄 색이 되는 게 좋다. 하늘은 물에 탄 듯 연한 빛을 띄고 거리는 새순이 모여 연둣빛이 휘감겨 있다. 꽃은 봄에 물들어 알맞은 색으로 제각각 피어난다. 그래서 봄만 되면 헛걸음이 늘어난다. 하늘 보다가 정류장을 놓치고, 꽃구경 하다가 이상한 길로 들어서고 하는 일이 부지기수다. 그런데 그렇게 헛걸음을 하고난 뒤 제 길로 돌아오는 길목 조차 봄이 만연해 있어서 별로 심각성을 느끼지 못한다. 헛걸음이 우연의 낭만성을 극대화한다고 믿게 되는 계절이다.



전염병이 창궐한 이후로 두번째 봄이 왔다. 이번 봄에는 그래도 이러저러 수칙을 지켜가며 꽃을 꽤 본 것 같지만 지난 해는 그렇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대확산이 일어나던 시점이라 모두가 조심했다. 안전불감증이 끼어들 틈 없이 하루 확진자가 처음으로 세자리수를 넘기기도 했다. 그땐 정말 당장 나가지만 않으면 다음 달에는 학교에 다시 갈 줄 알았고, 그래서 더 엄격히 서로가 서로를 감시했다. 벚꽃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캠퍼스는 굳게 닫혔다. 전국 곳곳의 벚꽃 명소는 줄줄이 축제를 취소했다. 봄의 새순과 꽃망울은 시작을 알리는 낭만적 존재가 아니라, 다짐을 뒤흔드는 유혹적 존재로 비춰졌다. 아무리 예뻐도 보러 나가선 안되는, 전지구인 대상 마시멜로 실험을 하는 것만 같았다.



생각보다 하늘도 꽃도 바람도 자유롭게 향유할 수 없다는 건 힘든 일이었다. 작은 기숙사 방은 분명 내 몸 보다 컸지만, 자꾸 내 몸을 이 안에 욱여 넣는 기분이 들었다. 이유없이 가슴이 답답했고, 생활 패턴이 무너져 갔다. 그때 쯤 화병을 들였다. 처음에는 친한 언니의 집들이 선물로 준비했던 것인데 일이 꼬여 내가 갖게 됐다. 그런 작은 꼬임이 내 숨을 트이게 할 줄이야, 상상이나 했겠나. 화분을 들인 날부터 매일 그에 대해 기록했다.



/



3월 7일



사실 사흘을 못 넘기고 다 죽을 줄 알았다. 금방 질 줄 알았는데 여전히 펴있네. 꽃다발은 늘 이쯤 잎이 바스라졌는데, 넌 왜 생생할까? 어제보다 더 예쁜 건 기분 탓일까.



3월 9일



화병에 물이 없어졌다. 화병은 처음이라 이렇게 물이 줄어들 거라 상상치 못했다. 지난 밤의 갈증을 못 이기고 연보랏빛 스위트피가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이제 진짜 죽을 때가 됐나? 말리기만 하면 될까? 나는 꽃을 말리고 싶어 안달이라도 난 사람처럼 안절부절 못했다. 그러다 친구들에게 물어봤다.


‘물 넣으면 잠깐이지만 다시 화악 살던데, 그 단계도 지났어?’ ‘아니 안 지났어 아마 물 넣으면 다시 살 거 같아.’ ‘그럼 물 넣고 조금 더 봐.’ ‘좋아.’


‘그런데 나 화병은 처음인데 묘해. 뿌리도 없는데 향도 계속 나고 시들지도 않아.’ ‘나 처음에 꽃병에 물 줬다고 금새 다시 고개 빳빳이 드는 거 보고 징그러워서 꽃 별로 안 좋아해.’


‘그렇구나. 그런데 왜 물 더 주랬어?’


‘너는 꽃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잖아.’


정말. 정말 그런 가? 난 꽃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일까?



3월 11일



물을 넣고 밤이 지나자 생기를 잃어가던 유칼립투스와 자나 장미가 다시 수분을 머금었다. 스위트피는 이미 말라버렸는지 이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래서 스위트피를 빼내고 연분홍색의 장미만 남겨뒀다. 물을 갈고 꽃을 빼내고 다시 묶는 모든 순간 내 손엔 꽃향기가 베였다. 뿌리가 없어도 꽃은 꽃이었고, 죽어갈 거란 내 생각과는 달리 보란듯이 화려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장미만 남은 화병은 완연한 연분홍색이 됐다. 분명히 빼냈는데 묘하게도 어떤 것이 생겨났다



3월 13일



큰 장미의 꽃잎이 중력에 따라 벌어지고, 이젠 장미의 잎도 빛이 바랬다. 그래서 이젠 정말 화병에서 꺼내기로 했다. 뿌리도 없는데 어떻게 몇 일 씩이나 예쁘겠어. 그렇게 열흘을 살더라. 내일이면 시들 꽃이 오늘도 생생했다. 화병을 둔 순간부터 매일 아침 입으로는 오늘은 시들었겠지 말하며 마음으론 제발 살아있었으면 좋겠다 되뇌었다. 그 인지부조화는 열흘을 갔다. 나는 꽃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나는 꽃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인가? 사랑할 줄 안다기보단, 내 맘대로 사랑했다. 언제 시들지 몰라 조바심 내는 게 싫어서 여태껏 꽃다발은 받은 날 바로 말려버렸으니까. 여전히 시들지 않는 꽃을 보며 이렇게 사랑할 수도 있구나 싶었다.


이제는 진짜 시들어버린 꽃을 보며 원래 꽃을 대하듯 잎을 고르고 말렸다. 그러다 내 욕심에 더 싱그럽지 못하고 말라간 그 꽃들을 생각했다.



3월 16일



화병이 빈 지 3일 째 되는 오늘은 내 생일이다. 저번에 만나지 못했던 동기들과 생일을 구실로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나를 위해 꽃을 살까 생각하다 아직은 그 자리에 있던 꽃의 향기가 가시지 않은 기분이 들어 발길을 돌렸다.


약속 장소에 먼저 도착하고 잠깐 뒤 동기들이 왔다. 화병의 원래 주인이었던 언니는 꽃다발을 안고 들어왔다. 그리고 나에게 안겼다. 한참 떠들고 놀다 문득 선물의 의미를 물었다. ‘왜 이걸 선물한 거야?’


“집들이 하기로 한 날 내가 아파서 네 전화를 못 받았잖아. 그런데 나는 그게 참 다행이라고 생각해. 그 꽃을 너가 대하는 걸 보면서 이번 생일엔 꼭 꽃을 줘야겠다 생각했어.”



3월 29일



그 때 그 분홍빛 포장지에 쌓여 내게 온 꽃다발은 어느새 흰 꽃 두 송이만 남아 지금도 내 옆에 흰 화병으로 존재한다. 사실 스물을 넘긴 해부터 꽃 선물을 즐겨했다. 생일이나 행사는 내게 꽃을 사기 위한 참 좋은 핑계였고 꽃은 사랑을 담을 적절한 메신저였다. 그러나 이 향기로운 생명은 사랑을 담기만 하기엔 아까웠고, 전하는 사랑의 크기 그 이상을 받을 만한 존재였다. 3월의 스위트피는 그걸 내게 알려주려 온 게 아닐까. 화병을 가져온 날 룸메이트에게 ‘다가올 봄 얼마나 흐드러지게 행복하려고 이 화병이 온 걸까?’ 라는 실없는 소리를 했었다. 분명히 그건 몽상이 아니었다. 그렇게 됐다.



/



그 이후로 1년 간 내 화병은 빌 틈이 없었다. 부지런히 채워나간 기간만큼 아는 꽃이 많아졌고, 꽃 마다의 수명을 어림짐작 할 수 있게 됐다. 꽃집의 단골이 됐고, 꽃 고르는 데 도가 텄다. 어쩌다 보니 이런 데 취향이 생겼고, 기왕 생긴 취향이 끝나지 않게 잘 이끌어 가는 중이다. 꽃을 둔다는 건 어쩌면 돌보는 일에 가깝다. 말하지 않는 존재를 돌보기 위해선 각별한 관심과 애정이 필요하고, 어떤 것에 관심과 애정을 베풀다 보면 마음 속 다정이 자꾸 커지는 것도 같다. 차츰 그 마음을 늘려가다보면 나 말고도 다른 걸 더 사랑할 수 있는 여유를 얻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꽃에게서 이런 걸 배웠다.







막상 어른이 되니 자꾸 주변을 둘러보게 되고, 나보다 앞서가는 사람들의 속도가 신경 쓰입니다. 그런데 가드닝을 하다 보니 식물들이 가끔 멈춰 서기도 하더군요. 대단한 이유 없이 모든 것에 시들해진 식물은 때론 몇 달씩 미동도 하지 않아요. 지금보다 식물을 이해하지 못하던 시절의 나는 '얼음'하고 멈춰 있는 식물에게 커다란 변화나 풍부한 햇빛 같은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테라스에 내놓아 직광을 받도록 해주고, 비료를 콸콸 부어주기도 하고, 물을 더 열심히 주기도 했지요. 걱정하는 마음이 차올라 저질렀던 그 모든 일은, 실수였습니다. 잠시 생장을 멈췄던 식물은 갑자기 과해진 물과 해를 견디지 못해 픽픽 쓰러졌어요. 식물의 멈춤에는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사람도 마찬가지 아닌가 싶어요. 각자의 속도로 자라나는 식물처럼, 사람도 최선을 다해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인 것 같아요. 모두가 달릴 필요는 없어요. 자신에게 맞는 속도를 찾아 움직이거나 멈춰 있어도 괜찮을 거예요. 그러니 부디, 스스로의 속도에 안달하지 않고 평화로운 시간들을 찾아낼 수 있다면 좋겠어요.




<조금 괴로운 당신에게 식물을 추천합니다>, 이랑





작가의 이전글 결국에는 지는 싸움이겠지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