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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비 Apr 13. 2021

어릴 때 생긴 흉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다

<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전하영


존경하는 선생님이 미술을 가르친 영향에서인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전시를 좋아했다. 그래서 서울에 올라와서 처음으로 혼자 놀러 간 곳도 한가람미술관이었다. 많은 곳을 다니진 않아도 한가람은 전시가 바뀔 때마다 꼬박꼬박 갔었고, 좋아하는 전시가 여럿 겹칠 때면 하루에 두탕 뛴 적도 있었다. 그 쯤의 나는 스무살 특유의 무식한 혈기를 그런 데다 써먹곤 했다. 선명하게 생각날만큼 좋았던 전시는 샤갈과 르누아르 정도가 있다. 현대미술은 어려우니까 알아보기 쉽고 알록달록 한눈에 봐도 예쁜 인상파의 그림을 좋아했다. 그때는 시도 교과서에 수록될 법한 것들을 좋아했고, 소설은 드라마 원작부터 찾아 읽었다. 그때는 그게 취향인 줄 알았는데, 시간이 조금 흘러보니 좋아하는 게 많이 바꼈다. 회화보단 설치미술이 더 재밌고, 시나 소설이나 그 해에 나온 젊은 작가의 책을 가장 먼저 읽는다. 어쩌다보니 그냥 그렇게 됐다. 이런 걸 보면 옷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대학 입학 전에 여느 언니들이 늘상 하는 말이 있었다. 새내기 때 입는 옷 어차피 1년 만 지나도 못 입는다고. 설마 그렇겠어, 하면서  예쁘던 옷을 신나서 막 사재꼈는데 지금에 와서는 단 한 벌도 입지 않는다. 정말 귀신 같게도 말이다. 그런데 정말 왜 그런걸까.



스무살을 처음으로 두고 생각하자면, 처음이라서 그렇다. 그 어떤 취향이나 아이덴티티가 없는 제로의 순간. 내 스무살은 그랬던 것 같다. 그렇게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막 발을 내딛을 때는 아무래도 주변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내가 믿는 사람이 A길이 정말 좋다고 적극 추천한다면 그 사람을 믿고 A길을 걸을 테고, 사람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정보의 홍수에서 최신 트렌드를 검색해 그를 따를 수도 있을 거다. 그러니까 그런 길은 한 개인이 알려줄 수도 있고 아니면 사회 전체가 터놓을 수도 있다. 피부톤에 맞지 않던 17호 파운데이션과 지금은 입지도 않는 프릴 블라우스와 딱 붙는 치마가 그랬을 거다. 분명 내가 선택했지만, 그 선택지 자체는 누군가가 만들어 둔 것. 그런게 나와 맞는 지에 대해 알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시간이 축적 돼야만 한다. 그런데 대학이란 공간에서는 이제 막 시간이 사락 사락 쌓이는 순간에 너무 많은 사람을 만난다. 불완전하고 휘청이는 순간에 들이닥치는 사람들은 모두 바람이 되어서 그 불균형을 키우고 또 줄여버린다. 나 혼자 중심 잡으려면 오롯한 혼자의 순간이 필요한데, 우리나라의 음주 문화는 이에 대단히 비협조적이다.



만약 스무살의 내게 한마디를 전할 수 있다면 단단해 지는 시간이 끝나기 전 아직 말랑말랑한 순간의 너는 무엇이든 당해내지 않을 여력이 없다고 말해주고 싶다. 지금에 와서는 전혀 내 잘못이 아님에도 몇날 며칠을 눈물로 뉘우치기도 했고, 일말의 쎄함을 대충의 다정으로 얼버무려 크게 힘들기도 했다. 그때의 일들은 어린 마음에 일어난 일이지만, 어리지 않은 인물들의 개입으로 불씨가 커졌다. 그런 데에 가스라이팅이란 이름이 붙기까지 오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소문 빠르다는 말로 뭉뚱그려져 그 소문 속 등장인물의 감정과 피해도 쉽게 일축되는 일들도 있다. 이 사실을 경계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자꾸 그게 괜찮은 일일지도 모르며, 상식으로 설명될 지도 모른다는, 어떤 이들이 이미 만들어둔 문법과 언어로 읽어 내릴 수도 있으니까. 모두가 각자의 언어를 뱉기 위해서는 그렇게 날을 세워야 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교수는 신입생 대상 교양 강의의 첫머리에 그런 말을 한다.


어떤 경우라도 열일곱에서 스물세 살, 스물네 살까지가 우리 삶에서 가장 추한 시절이라는 걸 머릿속에 담아두어라


그리고 그 교수는 수많은 제자에게 성폭력을 저질렀다. 어림과 미숙함을 추함으로 읽은 건 어쩌면 제 추악한 입맛에 맞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말을 한 사람은 강단에 서 있고, 수많은 어린 사람이 그걸 들어야만 하는 자리에 앉아있었다. 그러니까, 최소한 성적을 위해서라도 그 말을 들을 수 밖에 없었고 혹자는 믿었을 수도 있다.



정말, 예민해야한다.







거기에는 연두색 형광펜으로 정성스럽게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여자는 두 종류라고 말하곤 했다. 매사에 분명한 여자와 미스터리를 남겨두는 여자. 그리고 이는 남자가 여자를 볼 때 가장 먼저 감지하는 것이자, 가장 먼저 그를 매료시키거나 그렇지 않게 하는 요소였다.

...

며칠이 지나 연수는 문자 한 통을 보내왔다.

우리는 기록하는 여자가 될 거야. 우리가

겪은 것이 무엇이든. 우리는 그것에 대해

생각할 거야. 나는 그렇게 되리라고 믿어.


<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전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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