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소원은 과학 소년>, 한정현
세상은 이상하다. 한시도 멈추지 않고 자전하는 지구에 살면서 하루에도 여러번 해가 뜨고 지길 반복하면서, 빈부는 그렇지가 않다. 극지방처럼 어제도 겨울이면 내일도 겨울이고 어제가 여름이면 내일도 여름인 세상이다. 비단 경제적 빈부만이 아니라 소수자성에도 그렇다. 전지구의 도량형이 통일된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모두가 엇비슷한 잣대를 가지고 있다. 세상 모든 공산품은 남성의 몸을 기준으로 하여 제작되고 있고, 대다수의 결혼제도는 이성애적 일부일처제를 중심으로 만들어져있다. 그 오랜 잣대는 관행이 됐고 전통이 됐으며 classic이며 basic이 됐다. 이 변하지 않는 잣대가 생긴 이래, 끊임없이 사라지고 묵살되고 죽어간 잣대 밖의 사람이 있다.
처음에는 그게 억울하고 분해서 잣대를 뒤집어 엎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진절머리나는 프레임을 다 부숴야 하는 게 맞지 않냐며, 왜 맞지 않는 틀에 몸을 구겨 넣으며 평생을 살아가야 하냐며 호전적으로 굴었다. 그런데 그런 건 정말 쉽지 않았다. 장기간 형성된 악습과 전통을 단기간에 바꾸는 건 말하자면 혁명에 가까운 것이었고, 언제나 급작스러운 혁명에는 피바람이 불었고 또 다른 소수자가 생겨났다. 부르주아 혁명으로 인해 빈부격차가 심해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더 가난해졌고, 군사정권 당시 외화벌이를 통해 빠르게 산업화를 구축하며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던 그 시기에는 '난쏘공'이 쓰였다. 강하고 빠른 물살에는 어찌됐던 침식되는 곳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렇게 딜레마에 빠졌다. 뿌리깊은 관행을 근절하려면 강경한 제스쳐가 필요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늘 안 존재를 각인시키려면 다소 극단적이어야했고, 직선적이어야했으며, 자극적일수록 효과가 좋았다. 온건한 방법이 써먹히지 않는다는 건 이미 지나온 억겁의 시간이 증명하고 있었다. 그 덕에 겨우 소수자 담론이 담론화 됐다. 그런데 그러고 나니 그들의 직선상에서 벗어나는 또 다른 존재들이 생겨났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들은 좋은 말로 '대의를 위해 희생'된 존재들이었다. 배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으킨 물살이 또 다른 배제를 만들어내고야 말았다. 나는 또 다른 배제가 마음에 엉겼다. 처음엔 이 배제에 대해 또 새로운 담론화를 거치는 게 좋겠다 생각했지만, 영 그렇지도 않았다. 지금 겨우 만들어진 소수자 담론은 여전히 너무 많은 통념들에 공격받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 소수자 담론이 배제하는 것에 대해 언질을 하기 시작하면, 기성에게 유리한 핑계가 됐다. 비판은 잣대의 입맛에 맞게 오도되어 유용한 무기가 됐다. 이 딜레마 속에서 어떤 일을 해야할 지 생각했다.
당연히 아직은 뭘 어떻게 해야하는 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게 딱 하나는 있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배제 속의 배제가 해소될 때까지 마음 속에 둘 것이며, 그를 위해 꾸준히 발화할 것이다. 다른 이를 비판하는 방식이 아니라 이 존재들을 호명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책의 말처럼, 앞 서는 사람이 있으면 뒤에 서서 지켜보고 돌봐주는 사람도 필요하다. 그러니까 나는, 뒷자락에 서서 가장 뒤처지는 이들과 나란히 걷는 사람이고 싶다. 거기에 있음을 울부짖는다기 보다는 함께 걸어가면서 서로의 존재를 서로가 알아주고, 그렇게 우리만이라도 우리를 우리라고 부르고 또 연대하며 살고 싶다. 이렇게 다정한 소란함이 계속되면 조금씩 사람들이 모여들어 하루가 다르게 북적임이 퍼져갈 수도 있다고, 그러면 이 배제가 즐거운 방법으로 해소될 수도 있다는 낙관을 품고 있다.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다만 낙관할 것이다.
잡지며 신문이며 모든 곳에서 저주처럼 그런 글들이 쏟아졌다. 변태성욕자. 서로 사랑을 나누는 여서오가 남성을, 남성의 옷을 입은 여성을, 여성의 옷을 입은 남성을 변태성욕자라고 했다. 아내의 몸에 칼로 문신을 새기고 머리채를 잡아 기찻길로 미는 남성들에게나 붙는 말, 여자를 던져 죽이지 않고서는 남성들은 절대 들을 일 없는 그 말은 그러나 안나와 경준과 수성과 같은 사람들에겐 너무나 자주 달라붙었다. 그 말엔 힘이 있는 것 같아 보였지만 그건 그저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라고 보는, '대서양 저편에 무언가가 있는 줄도 모르는 이들'이나 하는 말일 뿐이었다. 수성은 경준의 아이를 자신이 키우겠다고 했다. (...) 수성은 안나의 얼굴을 쓸어주며 이렇게 말했다.
"아이의 이름을 지어줄게. 그리고 기억할게."
그러니까 우리는,
"낙관하자."
(...)
'우리는 닿을 수 있을까? 우리에게, 그리고 그곳에.' '그곳에서 우리는 정말 우리일까.' 바람인지 걱정인지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며. 여전히 아무런 표정이 없는 얼굴로 바다 위에 떨어지는 눈을 가만히 바라보던 경준이 작게 입을 벌려 숨을 한 번 내뱉었다. 입김이었다.
"이름을 기억할 것." (...) "낙관할 것."
/<우리의 소원은 과학 소년>, 한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