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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엘에게 1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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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등 Feb 24. 2024

독하게 살 일도 아닙니다.

독하게 살 일도 아닙니다.


L ,


그래요, 나도 독해보려고 했지요

그런데 당신도 나처럼 술을 한 잔 해 보면 

세상이  갑자기 훤해져요

독한 것은 맛이 없어요

돼지를 잡으면서 

아버지가 그랬어요

짐승도 죽을 때 독기를 품는 법이다.

그 고기 먹으면 독을 먹는 법이지

죽은 고기도 독이 날아가면 살이 연해지는 법이다

아버지 말씀 뒤에

죽은 돼지 앞에 서면 독기가 싸늘하게 새어 나오는 걸 느꼈어요

나는 지금 포도주를 마셔요

술처럼만 살았으면 좋겠어요

독기는 사라지고 내 몸 위로 부는 선량한 바람

아버지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설렁설렁 제 풀대로 살다가는 거지

흔들리고 싶을 때 흔들렸다가

날아가고 싶을 때 날아갔다가

돌아서 독기 다 내놓고 술로 적셔두면

하늘길도 출렁출렁 그렇게 살다가는 거란다.


L ,


'늑대와 춤'을 이라는 영화가 생각나네요.

그 처자 이름이 "주먹 쥐고 일어서" 였나요?

아 재미있는 이름이었어요. 주먹 쥐고 살아가야 할 일들.

하지만 당신, 나는 이렇게 불러줘요

"술에 물탄 듯 물에 술탄 듯"

웃자고 하는 이야기예요

죽자고 사랑하거나

죽자고 잊어보거나

하여간 독은 품을 일이 아니라는 것


아버진 작년에 돌아가셨어요.

잠이 든 듯 고요히 가셨지요

술향기도 없이, 독기도 없이 피시식 웃는 모습이었어요.

독하게 살지 말아라, 마지막 말씀인 듯하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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