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기목 Sep 22. 2023

노을

여행지에서 마주하는 마법 같은 순간

영화 <버닝> 속에서 해미는 아프리카 여행을 다녀온 이후, 여행 중 노을을 보면서 자신도 가라앉는 해처럼 사라져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종수에게 이야기한다. 내가 <버닝>을 봤던 때는 그 대사가 와닿던 때였다. 하루하루를 산다기보다는 살아낸다는 느낌이 컸다. 쳇바퀴를 돌듯 반복되는 일상에서 오는 권태로움으로 인해 괴로워했고, 삶의 의미를 찾고자 던진 질문들이 답을 내리지 못한 채 쌓여가기만 했던 시기였다. 그렇기에 일몰 때의 해처럼 사라져 버리고 싶다는 해미의 말에 공감이 되었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시간이 쌓이고, 그 시간 속에서 마주한 일몰의 풍경이 쌓일수록 내게 노을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조금씩 변화해 갔다. 지겨운 하루하루를 끝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했던 노을은 이제 살아가야 할 이유가 되었다. 노을이 눈에 비치는 풍경을 감싸면 마치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것만 같은, 왠지 모를 신비로운 감정이 느껴진다. 그 마법 같은 순간을 또 마주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삶은 좋은 거구나라는 생각이 자연스레 따라온다. 살아있기에 하루가 끝나기 전, 또 다른 노을을 마주할 수 있는 것이다.


YOU HAVE AN INFINITE NUMBER OF REASONS TO BE HAPPY.


작년 7월, 서울 이태원에 있는 롸카두들에서 치킨 버거를 먹다 무심코 쳐다본 벽에 적혀 있던 문구인데, 당시에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을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 이 문구가 말해주듯, 행복할 이유는 무수히 많다. 행복엔 조건이 붙는 줄 알았던 때도 있었다. 목표를 성취하는 순간과 같은 때에만 행복할 수 있는 줄 알았고, 무엇인가를 해내고 성취하는 순간이 드문드문해질수록, 내 행복도 점차 희끄무레해졌다.


행복에 조건을 붙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건 <굿 라이프>라는 책을 읽었을 때였다. 그 책을 읽고 나서 지난 삶을 돌이켜보니 정말 행복한 순간이 많았다. 좋은 영화를 보고, 좋은 음악을 듣고, 좋은 책을 읽을 때. 소중한 순간을 소중한 사람들과 나눌 때.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맛있는 음식에 술 한 잔을 곁들일 때. 운동하며 땀 흘리고, 땀에 절여진 몸을 따뜻한 물로 씻어낼 때. 카메라로 놓치기 싫은 장면을 담을 때. 길을 걸으며 계절의 변화를 체감할 때. 내 삶은 정말 행복투성이었다.


행복이란 목표를 성취하는 순간처럼 특별한 때에만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닌, 삶의 모든 과정 속에 이미 존재하는 것임을 잊고 살았다. 행복한 삶을 지향점으로 삼는다 얘기하면서, 눈앞에 놓여 있던 작은 행복조차 놓치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뛰놀던 어린 시절엔 보물 찾기를 하듯이 행복을 찾기 위해 눈에 불을 킬 필요가 없었다. 온통 새로운 것들이었기에, 권태로움이 무엇인지 가늠조차 못했을 것이다. 행복이 이토록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은 이미 어렸을 때부터 체화되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주위의 것들에 점차 무뎌진다. 우리를 기쁘게 했던 것들의 존재를 잊어버린다. 행복을 전해줬던 것들이 여전히 우리 곁에 있는데도, 더 먼 곳을 보느라 놓치고 만다. 목표에 매몰되면, 삶 속 아름다움을 지나치게 된다.


하지만 행복이 멀리 있지 않다는 걸, 삶은 살만한 것이라는 걸 백날 말로 들어봤자 쉽게 와닿지 않는다. 좋은 말을 건네받더라도 아니꼽게 들릴 때도 있고, 상대방의 진심을 신경 쓰지 못할 때도 있다. 내가 일몰 때의 해처럼 사라져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듯이, 그런 때의 삶의 존재 이유에 대한 고찰은 삶은 살아갈 필요가 없다는 결론으로 귀결될 위험이 있다. 때로는 백 마디 조언보다,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장면이 필요할 때가 있다. 주위의 행복으로부터 무뎌진 감각을 깨우는 건 이제껏 마주하지 못한 아름다움이다. 지구가 선사한 아름다움 앞에 서서, 벅찬 감정을 느낄 때 비로소 무뎌졌던 감각들이 하나둘씩 깨어난다. 내게는 그 장면 중 하나가 몽골에서의 노을이었다.


투어 첫날, 수평선 위의 일몰


투어 첫날, 나는 온종일 광활한 평야와 지평선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것은 일상에서 마주할 수 없는 장면이었을 뿐만 아니라, 내가 바라 왔던 장면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차를 타는 내내, 차에 내려서도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기 바빴다. 그 탁 트인 장면의 아름다움이 정점에 달했을 때는 해가 지평선 너머를 넘어갈 때였다. 해는 구름 한 점의 방해 없이 온전히 빛났고, 지평선은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실로 마법 같은 순간이었고, 나는 그 장면을 눈과 카메라에 연신 담기 바빴다.


일몰에 집중한 채로 셔터를 마구 눌러댔고, 해가 다 내려가고 난 뒤에 카메라에 담긴 사진을 친구들과 가이드 누나, 기사님에게 보여줬다. 방금 눈으로 직접 봤던 장면인데도, 심지어 가이드 누나와 기사님은 수없이 마주했던 장면일 텐데도 불구하고, 다들 사진을 보며 감탄했다. 그것이 노을의 힘이다. 매번 봐도 질리지 않는, 마주하는 매 순간마다 마법 같은.


홍고린엘스 사막 위에 올랐을 때 마주했던 일몰


투어를 다니는 동안, 노을을 매일 마주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투어 첫날 이후로, 흐리거나 비가 온 날이 며칠 있었다. 그날은 별은 물론이고, 노을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홍고린엘스 사막 위에 올랐던 날에는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었다. 구름이 없어서 사막 위를 오르는 일이 더 고됐지만, 덕분에 평생 잊지 못할 장면을 마주할 수 있었다. 헐떡이던 숨조차 멎을 정도로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해가 완전히 넘어가는 동안 지긋이 바라보다가, 생각에 잠겼다가, 셔터를 눌러대기를 반복했다. 그 장면을 앞에 둔 채로, 함께 사진도 찍고, 서로의 감상을 한창 공유하기도 하다가, 모래 위에 털썩 앉고 나서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저렇게 아름다운 장면이 지구 도처에 있을 텐데, 어떻게 저 너머로 지는 해처럼 사라지고 싶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했던 것일까.


함께 떠났던 친구들과 일몰 앞에서


수평선, 혹은 사막을 감싸던 노을을 마주했을 때, 그 마법 같은 순간을 목도했을 때 무뎌졌던 감각 세포들이 깨어났다. 노을이란 단어의 의미가 달라지는 데에 가장 크게 기여했던 것이 몽골의 노을이 아니었나 싶다. 덕분에 노을이 전해주는 따스함과 신비함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되었고, 마법 같은 노을을 거의 매일 마주할 수 있는 삶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다.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도 해가 질 때쯤 되면 하늘을 쳐다보는 습관이 생겼다. 맑은 날이면 노을을 기다렸다. 그 기다림은 내가 또 하루를 살아가야 할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불행하다고 느낄 때, 막막할 때, 삶이 쓸모없다 느껴질 때 일단 아름다움을 쫓아 떠났으면 좋겠다. 그 아름다움이 당신의 세상을 바꿔놨으면 좋겠다. 몽골의 노을을 마주했을 때 느꼈던 그 감정을 당신도 느꼈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테이블을 놓는 그곳이 식당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