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고 깨닫는 힘이나 표현하는 힘이 부족하고 둔하게 되다.
며칠 전, 밤 날씨가 선선해서 갑천으로 나갔다. 갑천에서의 밤산책은 오랜만이었다. 몇 년 전에는 거의 매일 갑천에서 밤산책을 하던 시기도 있었는데.
귀에 에어팟을 꽂고 빈지노의 <NOWITZKI>를 들으면서 걷다가 주위를 둘러봤는데, 왠지 모를 신비한 감정이 느껴졌다. 그 공간이 마치 내 일상의 공간이 아닌 것과 같은. 갑천이란 공간에서 실로 오랜만에 느낀 감정이었다.
머릿속이 복잡하던 새벽, 나를 짓누르는 듯한 짐을 덜고자 갑천으로 처음 향했던 것이 2017년이었다. 당시에, 귀에 이어폰을 꽂고서 좋아하는 노래를 틀고서 걷는데 일상의 고민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인적이 드문 새벽, 이어폰으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며 그곳에 내려앉은 적막을 깨기도 했었는데. 생각해 보면, 갑천에서 보냈던 그때 이후의 시간들도 각자 다른 의미로 좋았지만 처음만큼은 아니었다. 그렇게 예전의 시간을 꺼내어 보다가 문득 무뎌짐이란 주제로 생각이 이끌렸다.
지금은 바다와 꽃을 좋아하지만, 어렸을 때는 아니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진해로 이사 온 이후, 바다는 걸어서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었고, 봄마다 만개한 벚꽃나무가 거리를 가득 채웠기 때문일까. 바다로 산책을 나가자는 이야기에 귀찮다는 생각이 앞섰고, 교복 위에 벚꽃 잎이 떨어지면 털어내기 바빴다. 하지만 진해를 떠난 뒤에야 알았다. 바다와 만개한 벚꽃나무로 가득 채워져 있던 길거리의 소중함을.
어떤 것이든, 그것을 마주했을 때의 감정이 처음과 같을 수는 없다. 날카로운 바위가 바람에 깎여 점차 뭉툭해지듯이, 우리의 감정도 시간이 지날수록 무뎌진다. 경험이 늘어갈수록 감동의 역치는 점차 높아진다. 영화와 음악에 대한 기준은 점차 높아지고, 어떠한 풍경을 맞닥뜨렸을 때 특정한 단어로 형용하기 힘든 감동이 밀려오기보단 어디서 본듯한 느낌이 먼저 찾아올 때가 많아진다.
이렇게 보면, 무뎌짐은 일상 속 순간들에서 느끼는 행복감으로 멀어지게 하고, 권태로 나를 등 떠미는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무뎌짐은 삶이란 작품 속에서 그저 악역에 불과할까.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면, 좋았던 시간도 많았지만 나를 기분 나쁘게 하고, 우울하게 했던 시간들도 많았다. 특히 나를 두렵게 했던 순간들은 내게 감동을 줬던 순간들보다 오랫동안, 그리고 강하게 내 몸과 마음을 지배했다. 어렸을 적 깊은 물에 빠져 잠시 정신을 잃었던 경험은 물에 대한 두려움을 피어나게 했다. 그 두려움 때문에 물에 뜨려고 시도할 때마다 가라앉기 일쑤였다. 바다에 내 몸을 띄운 것은 불과 몇 년 전이었고, 수영에 도전하기 시작한 것도 불과 저번 주다.
무뎌짐은 나의 기분을 가라앉게 하고, 우울에 빠뜨리는 일로부터 멀어질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칼에 찔린 듯이 나를 아프게 했던 일들이, 주사 바늘에 찔리는 정도의 따끔함을 느끼는 정도로 끝나게 된다. 무뎌짐은 타인의 질책에 쉽게 대처하게 하고, 실수와 실패를 훌훌 털어버리게 한다.
무뎌짐을 양날의 검이라 칭하는 것으로 이 글을 결론지을 수 있을까. 그것만으론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무뎌짐을 논하기 위해서는 시간이라는 변수를 빠뜨릴 수 없다. 결국, 무뎌짐이란 것은 시간이 쌓여야 만들어지는 것이다. 어떠한 것에 지속적으로 맞닿아 있어야만 무뎌짐이 생긴다. 만약, 시간이란 변수를 잘 활용한다면 무뎌짐을 양날의 검이 아닌, 한쪽은 뭉툭하고 한쪽은 날카로운 우리가 익히 사용하는 칼처럼 유용한 도구로 바꿔볼 수 있지 않을까.
무뎌짐이란 것은 무엇인가와 맞닿아있는 시간이 늘어갈수록 쌓여가지만, 떨어져 있는 시간이 늘어갈수록 점차 깎여나간다. 실수와 실패를 계속해서 거듭하다 보면 두려움이 무뎌질 수 있다. 그리고 오랜만에 옛날에 내가 좋아했던 것들을 다시 꺼내보면 무뎌짐이 있었던 자리를 삶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가질만한 신비한 감정이 채울 수도 있다.
어떤 것이든, 그것에 대한 생각을 어떻게 발전시켜 나가느냐, 그것에 대한 통념을 어떻게 비트느냐에 따라 의미는 크게 달라진다. 무뎌짐이란 단어가 그러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