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리 감독의 <다음 소희>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어둠 속의 댄서>는 시력을 잃어 가면서도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던 주인공을 끊임없는 시련 속에 빠뜨리면서 나의 마음을 짓이기고, 분노 속에 빠뜨렸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아무도 모른다>는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들의 삶을 보여주면서 하염없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보는 내내 하염없이 마음을 아프게 하는 영화들이 있고, <다음 소희>도 그랬다.
고등학생이었던 소희가 감당하기엔 너무 힘든 현실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출근했던 콜센터에서 처음 마주했던 것은 고객들의 폭언이었다. 하지만 회사는 소희를 지켜주지 않았다. 해지를 하려는 고객들의 마음을 바꾸어 실적을 올리고, 목표치를 채우기만을 요구했다. 진상고객들과 실적 압박, 계속된 야근. 그렇게 소희의 마음은 점점 병들어갔다.
추운 겨울 어느 한 날, 소희는 회사 주차장에서 싸늘한 주검이 된 팀장을 마주했다. 정신적 고통이 적지 않았을 팀의 직원들에게 새 팀장이 찾아와 처음 한 말은 다른 팀에게 폐 끼치지 말고 다시 자리로 돌아가 일을 하라는 것이었다. 팀장의 자살은 회사의 행태를 고발하기 위함이었으나, 회사는 직원들에게 각서를 요구하며 덮기 바빴다. 한 사람의 죽음에도, 일터는 바뀌지 않았다. 그 죽음을 목격한 직원들의 마음만 병들뿐.
팀장의 죽음을 목격한 이후로, 소희는 미친 듯이 일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팀 내 실적 1위가 되었다. 하지만 월급 액수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따져 물었지만, 돌아온 답변은 실습생은 언제 그만둘지 모르기에 인센티브를 당장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콜센터를 실습생으로 가득 채워놓은 것은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도 부릴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폭언을 견디고, 열심히 일해도 나아지지 않는 상황에 좌절하며 실습생들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도 학교에서 보낸 새로운 실습생들이 그 자리를 다시 채웠다. 내가 몰랐던, 어이없는 현실을 마주하고서 기가 막혔고, 화가 났다.
학교도 소희를 지켜주지 않았다. 담임은 소희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정확히 몰랐고, 그만두려 하면 학교의 취업률 목표치와 후배들의 앞날을 들먹이며 회사를 계속해서 다니게 했다. 콜센터의 다른 실습생들이 그러하듯, 다른 학생들도 소희처럼 학교와 회사의 목표치를 위해 휘둘렸을 것이다.
자해를 해도, 주변 어른들에게 이야기를 해도 달라지지 않는 현실이 너무 벅찼던 것일까. 작품의 첫 부분에서, 춤을 출 때 너무나 에너지가 넘쳤던, 사무실 여직원이 되었다며 기뻐했던 소희는 계속된 시련과 상처에 점차 생기를 잃어갔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에 이른다. 추운 저수지에 몸을 내던져 끝을 내버리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게 할 만큼 지옥 같은 현실로 내몰았던 어른들. 자신의 잇속을 챙기기 바빠, 개인의 인권보다 목표치에 관심을 뒀던 어른들. 그 틈에서 소희가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어른 한 명 만나지 못한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극단적 선택을 하기 전 마지막으로 들른 가맥 집에서 소희의 얼어붙은 발에 비친 햇빛을 보며, 이창동 감독의 <밀양> 속 마지막 장면에 담긴 햇빛이 떠올랐다. 아이를 잃은 아픔 속에서 허우적대던 신애의 삶에 그 햇빛과 같은 종찬이 없었다면, 그녀는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을까. <나의 아저씨> 속 지안도 동훈이라는 어른이 없었다면, 삶이 변화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 소희의 삶에는 저 빛처럼 세상이 살만한 곳이라는 걸 보여줄 수 있었던 어른 한 명 없었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동해 바다보다 깊은 슬픔과 함께 밀려왔다.
문틈으로 들이친 햇빛을 보며 소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 차디찬 세상 속, 따스함의 존재를 잠시나마 느꼈을까. 왜 자신의 삶에는 그 빛이 없었는지, 세상이 원망스러웠을까. 아니면, 그 빛이 병든 소희의 마음에 어떤 동요도 일으키지 못했을까.
소희의 죽음 이후, 형사 유진이 그녀의 죽음을 파헤친다. 회사는 학교에, 학교는 교육청에, 교육청은 교육부에 책임을 떠넘기기 바빴다. 심지어는 소희에게 문제가 있어서 이런 일이 발생했다고, 소희의 죽음 때문에 자신들이 난처해졌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유진은 화가 나, 따져 물었지만 결국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의 벽을 느낀다.
유진이 소희가 극단적 선택을 했던 이유를 쫓는 과정에서 그녀의 고통에 통감하는 모습을 보며, 소희의 삶에 유진과 같은 어른이 있었다면 하는 생각이 계속해서 들었다. 그래서일까. 유진이 소희의 남자친구였던 태준을 만났을 때, 욱하는 일이 있으면 누구에게든 이야기하라는, 자신에게 전화를 해도 된다는 말을 하는 걸 보면서 마음이 아리면서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서, 유진은 소희의 핸드폰을 받아 들고 열어보는데, 거기에는 춤 연습 영상 하나만이 남아있었다. 소희가 춤을 추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무엇이 그녀를 지옥과 같은 삶으로 내몰았을까. 그렇게 소희의 춤으로 시작한 작품은 소희의 춤으로 끝을 맺는다.
이제껏 사회적 문제를 다룬 작품은 많았지만, <다음 소희>는 여느 작품과는 달랐다. 소희가 시들어 가는 과정을 객관적인 시선 속에서 담아낸 1부와, 그 이유를 파헤치는 2부. 그 구조가 특별했고, 효과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남을 심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감독은 신도 판사도 아니다. 악인을 설정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알기 쉬워질지 모르지만, 반대로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써 관객들이 이 영화를 자신의 문제로서 일상에까지 끌고 들어가도록 할 수 있지 않나 싶다.
- 고레에다 히로카즈, <걷는 듯 천천히> 중
실존하는 사건을 다루면서, 선과 악을 명확히 설정하는 등 개인의 생각을 집어넣을 수도 있다. 실제로 많은 영화가 그랬고, 그런 방식은 이야기를 알기 쉽게 만든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던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아무도 모른다>가 그랬던 것처럼, 사건을 담담하게 담아내게 되면 더 많은 질문과 생각을 일상으로 끌어올 수 있게 된다.
<다음 소희>는 사건을 담담하게 담아내는 것을 넘어, 그 사건을 낱낱이 파헤치는 2부를 더함으로써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사회적 문제를 더 가까이서 마주하게 했다.
영화 하나가 세상을 바꾼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더 나은 세상과 지금 세상 사이의 틈에, 돌 하나를 얹을 수는 있다. 영화가 가진 공감의 힘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면, 그 돌이 더 나은 세상을 향하는 길이 될 것이다. 나는 <다음 소희>가 그런 힘이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더 이상 다음 소희는 없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