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집 은퇴부부의 두 마리 토끼 잡기 8 ( 황매산 억새평원과 합천호 편)
【옆집 은퇴부부의 한마디】
옆집 부부는 은퇴 후 '따로 또 같이'를 불문율처럼 지키며 살고 있어요. 노후의 삶은 각자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누리도록 응원해 주고, 틈틈이 부부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 남은 삶을 여한 없이 살고 싶은 것이지요. 그래서 평소에는 각자의 취미생활과 동호모임 활동을 하며 자유롭게 지내다가 둘 다 특별한 일이 없는 날이면 함께 길을 나섭니다. 대부분 걷는 즐거움과 읽는 즐거움의 두 마리 토끼 잡기가 목적이지만, 때로는 새로운 즐거움을 잡으러 떠나기 하지요. 나이를 고려하여 오전엔 2~3시간 정도의 걷기 좋은 길을 걸으며 건강도 챙기고, 오후엔 분위기 좋은 카페나 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며 배움과 성장을 멈추지 않으려고 해요.
올가을은 청명한 하늘 보기가 별따기보다 어렵다. 잦은 비로 텃밭과 꽃밭의 가을맞이 정리도 미뤄진 채 가을이 깊어간다. 오늘도 전국이 비소식이지만, 이맘때면 마음을 간질이는 곳이 있다. 바로 황매산 억새평원이다.
추석 연휴 동안 허리를 삐끗해 바깥나들이를 못 한 탓인지 더 근질거린다. 남편은 “비가 내리는데 억새구경 제대로 하겠어요?”하며 망설였지만, 나는 굳이 오늘 꼭 가고 싶었다. 햇살 아래 반짝이는 은빛억새도 좋지만, 비 내리는 날의 산안개 사이로 바라보는 억새는 또 다른 운치가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늘 잡아야 할 두 마리 토끼 (2025.10.14)
오전(10:40-13:00) : 황매산(경남 합천군) 억새 평원 트레킹, 오후(13:50-16:30) 합천호 뷰 카페에서 책 읽기
◆오늘의 토끼 사냥법 : '따로 또 같이, 안갯속 숨바꼭질을 즐겨라!'
◆숨바꼭질 장소 : 황매산 정상 주차장 ➪ 황매산 은하봉 부근 ➪ 억새평원 트레킹 코스
비와 안개비와 안개가 만든 또 다른 억새의 추억가 만든 또 다른 억새의 추억
해발 800~900m의 황매평원은 축구장 60개 규모로 국내 최대 억새군락지 중 하나다. 과거 젖소를 기르던 목장이 세월이 흘러 지금은 봄에는 철쭉, 가을에는 억새군락지로 변신해 수많은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비가 내리는 날이라 주차장은 비교적 한산했다. 정상주차장에는 이미 축제를 앞두고 특산물 판매 부스와 식당이 마련되어 있었다. 우비와 우산을 챙겨 억새평원을 향해 조금 오르니, 수국동산이 나온다. 절정을 지난 목수국꽃봉오리는 색은 바랬지만, 오히려 그 빛바램이 가을의 깊이를 더했다. 꽃밭에서 사진을 찍으며 흩날리는 여인들의 웃음소리가 소복한 수국꽃봉오리와 어울려 주위를 밝고 환하게 한다.
수국동산 뒤쪽으로는 토종 보리수 군락지가 있다. 다닥다닥 빨갛게 익어가는 열매가 먹음직스럽다. 시골에서 자란 옆집아내는 “먹어 본 놈이 먹을 줄 안다”며 잘 익은 열매를 한 움큼 입안에 털어 넣으며, 저만치 앞서가는 도시남에게 맛 좀 보고 가라고 소리친다. 작고 볼품없어 보이지만 큰 왕보리수와는 달리 떫은맛이 덜하고 달콤 새콤한 맛이 입안에 퍼진다.
꽃과 나무를 살피며 자주 헤찰하는 옆집아내와 달리, 옆집남편은 묵묵히 명상하듯 걷는다. 은퇴 후 우리 부부는 자연스럽게 ‘따로 또 같이’의 삶의 지혜를 터득했다. 앞서가도, 뒤쳐져도 서로를 재촉하거나 타박하지 않는다.
보슬보슬 비 내리는 길, 안개가 자욱이 밀려들며 억새평원을 덮는다. 남편이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곳을 찾은 다른 사람들도 안개뒤에 숨어 각자의 방식으로 그 풍경을 즐기고 있을 것이다. 가끔씩 터지는 웃음소리만이 사람들 무리가 주변에 있음을 알려준다.
잠시 안개가 걷히자, 앞서 걷고 있는 노부부 한 쌍이 눈에 들어왔다. 나이 지긋한 남편이 연신 이렇게 저렇게 아내에게 포즈를 취하라고 하면서 사진을 찍어주신다. 그 모습이 아름다워 “두 분 함께 찍어드릴까요?” 하고 말을 건네니, 반색하며 좋아하신다. 안갯속 억새를 배경으로 나란히 서있는 모습이 다정하니 보기 좋았다.
젊었을 때라면 나를 두고 훌쩍 먼저 가버린 남편이 원망스럽겠지만, 이제는 딱히 그런 마음이 일지 않는다. ‘따로 또 같이’에 오히려 편안함과 자유를 느낀다. 저절로 술래가 되어 앞서 가는 남편 뒤를 쫓으며 보이지 않는 머리카락 찾아보는 재미와 몰래 뒷모습을 찍으며 걷는 일이 새로운 즐거움이다.
황매산 억새군락지 주요 트레킹 코스는 정상주차장에서 산불초소전망대로 이어지는 45분 정도 소요되는 최단 코스(A 붉은 선)와 90분 정도 소요되는 세부코스(B파란 선)가 있다. 안내도에 나와있지는 않지만 황매산 정상까지 올라갔다 내려와서 억새군락지를 여유 있게 걸어도 좋다. 길은 여러 갈래로 이어져 체력과 시간에 맞게 원하는 대로 어떻게 걸어도 좋다. 억새군락지와 별빛 언덕, 황매산 정상으로 가는 세 갈래 길에 이르자 안개가 또다시 밀려오며 시야가 가려졌다. 옆집 남편은 안갯속 어느 쪽 길목에 숨어 기다리고 있을까? 지난 추석, 조용필 콘서트 실황방송 시청 이후 계속 따라다니는 노래를 흥얼대며 어림짐작 해본다.
‘못 찾겠다 꾀꼬리 꾀꼬리 꾀꼬리, 나는야 언제나 술~래!’
아마도 남편은 억새군락지도 아니요, 별빛 언덕 쪽도 아닌 황매산 정상으로 가는 600 계단 쪽으로 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순전히 감으로 방향을 짐작하며 걷는데, 저 멀리 억새 사이로 우산을 든 옆집 남편의 실루엣이 보인다. 마치 모네의 <양산을 든 여인>인 듯 안갯속 억새뒤에 서있다. 술래가 된 옆집아내가 찾을 수 있도록 거기 숨어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작년에 오르려다 공사 중이어서 가보지 못한 황매산 은하수봉 근처까지 올라가 보자고 했다. 그곳을 가기 위해서는 가파른 600개의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안개는 황매평원을 온통 휘감고 우리가 오르는 계단까지 스멀스멀 따라 올라왔다. 계단을 오르면서도 숨바꼭질은 계속됐다. 계단옆의 보랏빛 꽃향유와 빗방울 맺힌 거미줄에 한 눈 파는 사이, 순식간에 사라졌다가, 옷자락이 보인다 싶으면 잽싸게 또 안갯속으로 숨는 옆집남편. 막다른 꼭대기 바위에 올라서야 드디어,
잡았다!
맑은 날이었으면 내려다보이는 황매평원이 장관이었겠지만, 안개에 휩싸여 황매평원은 온데간데없다. 이젠 황매평원도 나와 숨바꼭질하자는 걸까?
이제 다시 600 계단을 내려간 후, 억새 군락지 트레킹 코스 따라 크게 한 바퀴 돌아서 주차장으로 내려가보기로 한다. 안갯속의 신비한 억새밭 풍경에 옆집 아내는 자꾸만 눈길을 빼앗기고 직진형 옆집 남편은 그 틈에 감쪽같이 숨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옆집 아내, 이젠 '내 맘대로 사진 찍기' 놀이에 여념이 없다. 아무리 기다려도 술래가 찾질 않으니 재미가 없었나? 옆집아내가 나타날 때까지 안갯속에 숨어 기다리고 있던 옆집 남편. "이따가 주차장에서 만나자"는 말을 남기고 안개와 함께 사라졌다. 혼자 안개멍, 사진멍을 즐기다 보니, 안갯속에서 방향을 잃고 이번엔 '이 길일까? 저길 일까?' 산책로와 숨바꼭질하며 주차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먼저 내려와 있을 남편이 보이지 않는다.
'어디에 숨어 있을까? 먹거리 부스? 화장실? 식당?'
한참을 찾아도 보이지 않아 혹시나 하고 차 안을 들여다보니, 오호라! 거기 숨어 곤히 잠들어 버린 남편.
술래가 너무 늦게 찾으니, 기다리다 시들해져 잠이 들었나 보다.
2시간 반 남짓 이어진 안갯속 트레킹은 오랜만에 느낀 동심의 시간이었다. 작년에 보았던 햇살 아래 은빛 억새도 장관이었지만, 안갯속 황매산 억새평원의 숨바꼭질 트레킹 또한 특별한 추억으로 남으리라.
정상 주차장 부스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은 뒤, 합천호가 내려다보이는 창 넓은 카페에 들렀다.
우리 부부는 외출할 때마다 늘 책가방을 챙긴다. 어디를 가든 자연 속 걷기 후, 독서는 하루 여행의 또 다른 완성이다. 옆집아내는 문형배의 『호의에 대하여』를, 옆집남편은 법륜 스님의 『혁명가 붓다』를 펼친다.
【옆집 아내가 읽고 있는 책】
『호의에 대하여』문형배 / 김영사
【책꼽문】
♣탐욕과 오만과 미혹과 분노와 시기와 질투와 복수심을 그치게 하는 것, 그리고 밝고 맑은 지혜로서 세상을 깊이 멀리 높게 뚫어 보게 하는 것(지관), 녹차 한잔이 지관의 약
♣우리의 호의로 공동체가 움직인다
♣친구에게서 받은 호의, 다른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 수 있다. 이 사회가 호의로 이루어졌구나. 한 사람이 베푼 호의가 다른 사람의 인생을 전체적으로 바꿀 수 있다.
♣가난을 사서 할 필요는 없지만, 다가오면 맞설만하다.
♣어른은 뒷사람에게 이정표가 되어 주는 사람이다.
【옆집 남편이 읽고 있는 책】
『혁명가 붓다』법륜 지음 / 정토출판
【책꼽문】
♣평민과 노예, 양반과 상놈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하나로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양반이 사라지면 상놈도 사라지고, 상놈이 사라지면 양반도 사라진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나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
♣나는 욕망을 따라가지도 않고 욕망을 억제하지도 않고 다만 욕망을 욕망인 줄 알아차리는 중도의 길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옛 인도 코살라국 파세나디왕이 부처님께 질문했다. "어떻게 해야 훌륭한 왕이 될 수 있습니까?"
"백성 사랑하기를 외아들 사랑하듯 하십시오. 가난한 자를 돕고 외로운 자를 위로하십시오. 그러면 굳이 고행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타인의 불행위에 자신의 행복을 쌓지 마십시오."
남편은 책을 읽으면 곧바로 삼매경에 빠지고, 나는 책에 빠져 있다가도 마음이 내키면 필사를 하거나 글을 쓰며 헤찰하기도 한다. 걷기 방식처럼, 읽는 방식 또한 서로 다르다. 하지만 마음의 방향은 같다. 더 배우고, 새롭게 깨닫고, 더 단단해지려는 마음.
따로 또 같이’ 걷고 배우는 일상이야말로, 지금 우리 부부가 선택한 가장 건강한 삶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