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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 유언장과 미리 쓰는 퇴직 감사의

1.

석가모니는 생로병사를 화두로 출가를 했고, 기어이 "해탈"을 했습니다.

어느 고승에게 신도가 "그런데 왜 열반했습니까?"라고 이의를 제기하자, "부처의 해탈은 죽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것"이라고 설명을 했답니다.

이해되지 않습니다.

어떤 소설에 영원불사의 요정이 늙어 죽는 운명을 가진 인간을 부러워한다는 문장이 있습니다.

인간의 죽음이 축복이라면 고승의 얘기가 이해가 됩니다.

범부에게 고통과 두려움인 죽음을 축복으로 받아들였다면 "해탈"이 맞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단순한 "해탈"은 참으로 어려운 것이어서 지금도 해탈의 길을 걷고 있는 지구별의 수많은 수행자 중에서 성공은 희소합니다.

2.

직장인에게도 생로병사는 있습니다.

승진하지 못하고 퇴직하는 것이 고통이고 두려움입니다만, 피할 수는 없습니다.

저 또한 고통스럽습니다.

왜 나쁜 방향으로 생각하냐고요? 

맞습니다. 

매일매일이 행복하다면 앞으로 1만 년이 아니라 100만 년도 더 직장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신의 직장에서도 현실은 그러지 못합니다.

"퇴직이 있기 때문에 직장생활의 일상이 행복한 것"임을 이해한다면, 그것이 바로 직장인에게 "해탈"의 경지일 것입니다.

비록 "해탈"의 경지에는 다다를 수 없겠지만, 퇴직을 이용하여 오늘 이 순간을 조금 보람차게 만드는 "구도의 길"은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로 "퇴직에 앞서 감사의 글을 미리 써보는 것"은 어떨까요?

3.

급속한 노령화로 선진국에서는 웰-빙에 이어 웰-다잉이 확산되고 있답니다.

웰-다잉을 위해 제시되는 것 두 가지가 있는데,

- 하나는 가상의 유언장을 작성하는 것이고,

- 다른 하나는 자녀들과 밥상머리에서 임종 이후에 대해 자주 얘기를 나누는 것입니다.

매년 가상의 유언장을 작성하면, 그간 잊고 있었던 중요한 꿈과 목표들이 생각날 수 있습니다.

- 가족이나 친구와 잘 지내는 것을 포함한 버킷 리스트입니다.

- 또는, 사소한 것들 때문에 중요한 것을 놓치는 등 실수와 잘못에 대한 반성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결과,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사용할 수 있고, 임종에서 후회를 줄일 수 있게 됩니다.

4.

직장인이 연말이나 연초에 퇴직을 가정한 "감사의 글"을 미리 써본다면 직장생활에 임하는 태도가 바뀔 것입니다.

- 퇴직이 정해진 분들은 잊고 있었던 목표나 실수를 떠올릴 수 있고, 

- 젊은 직원들은 하고 싶은 일이나 꿈을 설계할 수 있기 때문에 인생의 소중한 시절을 낭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5. 

한편, 사회생활은 냉정한 것이어서 "주고-받음"이 분명합니다.

- 많이 받았으면서 준 것이 적으면 남겨진 후배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합니다.

- 자신의 이익을 위해 조직과 남에게 피해를 입힌다면 더 나쁜 평가를 받게 됩니다.

지금까지 많은 분들의 "감사의 글"을 읽었습니다.

대체로 받은 것이 많아 고맙다는 마음은 진심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베푼 것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을 하지 않는 경향인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열심히 직장생활을 했기 때문에 얻고 누린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대체로 자기합리화입니다.

예컨대, "그 상황에서는 너라도 마찬가지다"라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역할기대"의 관점에서 접근하면 객관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6.

워렌 버펫에게 어떤 기자가 "왜 기부를 그렇게 많이 하느냐?"라고 물었더니,

"내가 많이 노력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시대에 태어났고, 더구나 미국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다. 그것은 사회로부터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기부를 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했답니다.

7.

누구도 워렌 버펫에게 성공했으니 기부를 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요구를 하지 않아도 행하는 것이 선행이며, 우리는 그런 분들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런데, 직장인에게 "역할기대"에 부합하는 행동은 사회적 거래(주고-받음)에서 당연한 것이므로 칭찬받을 일이 아닙니다.

"역할기대"를 뛰어넘는 행동(이것을 조직시민행동이라고 합니다)을 했을 때, 우리는 고맙다고 합니다.

불행히도 대부분은 그에 미치지 못합니다.

"역할기대"에 부합했는지 판단은 어렵지 않습니다. 다음과 같이 자문하면 됩니다.

- 회사를 떠난 선배 중에서 초청해서 강연을 한다면 자발적으로 참석하려는 후배가 50%는 분이 있을까?

- 내가 퇴직을 한다면 후배 중의 몇 명 정도가 내게 강연을 요청할까?

8.

우리가 만약 정기적으로 연말이나 연초에 퇴직을 가정한 "감사의 글"을 쓴다면, 

- 개인적인 목표나 꿈을 잃지 않을 수 있고,

- 나아가 조직과 남들의 "역할기대"에 부응하는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그것을 용감하게 밝힐 수 있다면 훌륭한 리더십이 될 것입니다.

9.

아울러, 실제로 퇴직할 때 쓰는 "감사의 글"은 정말 중요합니다.

- 먼저, 실체적 진실에 부합하는 글은 남겨진 후배들에게 감동과 울림을 주는 아름다운 마무리가 됩니다.

- 둘째, 진실된 사과를 할 수 있는, 용서를 받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매년 작성하는 "감사의 글"을 통해 소중한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10.

저는 지난해 말 임금피크를 앞두고 미리 쓰는 "감사의 글"을 한번 구상을 했습니다.

몇 차례 쓰고 지우다가 결국 쓰지 못했습니다.

실체적 진실에 가까이 갈수록 "부채의식"의 부끄러움이 너무 컸습니다.

지난 30년간 받고 누린 것에 비해 기여한 것이 너무 없었다는 사실을 고백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대안으로 "정보사업 관련 실패사례 및 소견"이라는 기록을 써서 정보사업본부 직원들에게 편지로 보내드렸습니다.

퇴직할 때 조금 덜 부끄러운 선배가 될 수 있었으면, 그래서 "감사의 글"을 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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