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랑 도서관에 갔다가 뜬금없이 라이오넬 슈라이버가 생각이 났다.
몇 년 전 이웃님의 추천으로 <내 아내에 대하여>를
아주 인상 깊게 읽었던 기억이 있는데
그 이후로
이 작가 책을 좀 더 읽어봐야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찌 된 일인지 기회를 만들지 못했다.
도서관에서 작가 이름으로 검색을 하니
두 권의 소설이 나오길래 두 권 다 빌려왔다.
<더 브러더>와 <맨디블 가족>.
오늘은 그중 <더 브러더>에 관한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한다.
사실
원래 이 작가 문장이 워낙 좋아서 페이지 터너라는 별명도 갖고 있긴 하다.
요즘은 내가 예전만큼 책을 읽지도 않고
그만큼 집중하는 시간도 많이 줄어들었는데
어제는 정말 오래간만에
늦은 밤까지 소설을 읽는 경험(?)을 했다.
이게 어떻게 결말이 나려나 궁금해서
끝까지 읽고 나니
새벽 2시가 넘었더라.
그만큼 재미 하나는 보장하는데
그 재미가 말초적인 것들을 자극하는 데서 오는 게 아니라
인물의 성격이며 줄거리가
뭔가 매우 시니컬하면서도
본질을 꿰뚫는 데 있는 것 같다.
미국 아이오와주에 사는 판도라는
비교적 성공한 중산층의 사업가이자 주부이다.
출장뷔페 사업도 성공적으로 잘 해서
돈을 꽤 많이 벌었고
지금은 독특한 컨셉의 인형을 제작하는
매우 잘나가는(??) 인물이다.
그런데 이 주인공은 별로 남의 눈에 띄고 주목받는 것을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남편인 플레처는 수제 가구를 제작하는 사람인데
매우 까다롭고 예민하며 살이 찌고 몸매가 망가지는 것을 강박적으로 싫어해서 운동이나 식이를 무척 엄격하게 하고 있는 사람인데 부부 사이가 나쁘다고 볼 수는 없지만, 남편의 그런 점을 식구들 모두 좀 질려 하는 것 같기는 하다. 이들에게는, 전처소생의 남매가 있는데 큰 애가 좀 헛바람(??)이 들어있어서 그렇지 비교적 착한 편이고, 겉으로 보기엔 매우 평화롭고 좋아 보이는 경제적 상황이 썩 괜찮기도 한, 미국의 중산층 가정이다.
그러던 어느 날, 몇 년 동안이나 소식이 없었던 판도라의 친오빠가 뉴욕에서 판도라의 집으로 오게 되는데, 판도라는 오빠와 같이 살던 친구와의 통화에서 오빠인 에디슨의 경제적, 정서적 상황이 썩 좋은 것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 남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오빠를 자기 집으로 오게 한다. 4년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오빠를 보지 못했던 판도라는 공항에서 오빠의 실물을 영접하고 경악을 금치 못하게 되는데, 날렵하고 멋있는 재즈 피아니스트였던 오빠는 얼굴을 알아보지도 못할 정도의 초고도비만 환자가 되어 그녀 앞에 나타난다.
판도라의 식구들은 다 너무 놀랐지만, 판도라가 면전에서 뚱뚱하다는 말을 하면 안 된다고 이야기를 하니, 대놓고 왜 그렇게 되었냐고 묻지 못하는데 그것은 동생인 판도라도 마찬가지다. 오빠는 동생에 집에 와서도 상상을 초월하는 양의 음식을 먹고 어지르는데...당연하게도 남편인 플레처는 에디슨을 경멸하고 무시하면서 사사건건 부딪힌다. 그러던 어느 날 판도라는 오빠 에디슨이 살을 빼는 것을 도와서, 남들이 말하는 정상의 삶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 큰 결단을 하게 된다.
오래간만에 상당히 재미있는 소설을 읽게 되었는데, 이 책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간명하다. 얼핏 보면 미국에서 이미 사회문제가 되어 있는 비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 같기도 하지만, 사실 이 소설의 주제는 가족이 엄청난 어려움에 직면한 다른 가족 구성원에 대해서 얼마만큼 도울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실 부모나 자식의 경우 좀 더 끈끈한 무엇인가가 있기에, 개인주의적 가치가 넘치는 이 현대의 시대에서도 서로를 위해 기꺼이 희생하며 어려움을 감수하는 경우는 많이 있지만 사실 형제 사이는 그게 또 좀 애매하긴 하다. 더군다나 배우자가 어려움에 처한 나의 가족을 멸시하고 혐오한다면? 판도라는 오빠 앞에서는 남편을 변호하고, 남편 앞에서는 오빠를 변호하면서 오빠인 에디슨을 도우려고 애쓰지만 본인이 오빠를 볼 때마다 느끼는 그 짜증스러움을 어쩌지 못하는데 그럴 때의 심리묘사가 진짜 탁월하다. 피를 나눈 오빠인데, 실제 오빠의 모습은 정말 별로란 말이다. 애매한 재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늘 유명인들과의 친분을 과시하려 했고, 왜 그렇게 폭식을 하면서 먹어대는지에 대해서도 제대로 된 대답을 주지 않는다. 잠깐이긴 하지만 약물에 손을 대기도 하고 전처와 아들과는 만나지도 못하는 상황. 거짓말도 하고, 구차하게 돈을 빌리면서도 코끼리가 먹어대는 것만큼 먹어대고 있는 현재의 상황을 개선하려고 하지 않는다. 너무 나태하고 너무 게으르고... 그러면서도 오빠는 아니 뚱뚱한 게 무슨 자기들에게 피해를 주느냐. 운동을 하면서 자기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것뿐이지 그게 뭘 바꿀 수 있냐는 식의 궤변도 잘도 늘어놓는다.
직설적이고 정곡을 찌르는 듯한 심리묘사가 많은데 문장 또한 정말 좋다. 이런 표현이 맞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어휘도 무척 다양하고 풍부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울러 메모해 놓고 써먹고 싶은 문장들도 많고. 위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가족에게 큰 문제가 생겼을 때, 다른 가족은 거기에 대해서 얼마만큼 책임을 질 수 있을까. 다 커서 본인의 가정을 일구고 있는 형제자매 남매들에게 서로는 서로에게 얼마만큼의 영향을 줄 수 있는가. 사실, 생각보다 많지 않겠지.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를 수 있다. 어려움이 생겼을 때 가족들이 나에게 도움을 청한다고 해서 꼭 나를 좋아한다는 법은 없지. 고맙긴 하나, 인간적으로 나랑 안 맞는다고 생각할 수 있고. 각자의 가정을 만들어 서로 물리적으로 먼 거리에 살게 되면 그것 때문에 일상을 공유하기 어렵게 되면서 차차 멀어지는 것도 있을 것이고.. 이 소설의 두 주인공도 어렸을 때 아버지의 외도와 엄마의 자살로 추정되는 교통사고를 겪으며 둘이 심리적으로 무척 의지하면서 살았던 경험으로 서로가 매우 끈끈한 감정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서로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한다.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왜 이 지경이 되었는지, 지금 오빠의 상태가 어떤지, 사람들이 어떤 말을 하면서 드러내놓고 미워하며 혐오하는지 등등등.
문장들 몇 개를 메모해 두었는데 다시 읽어보니까 너무 웃긴 점 발견. 친오빠의 망가진 모습을 대하는 주인공의 심리를 묘사한 부분보다 태너라고 불리는, 큰 아이의 허영에 대해 주인공이 생각하는 문장들을 많이 적어놓았다. 내가 애를 키우는 엄마라 그런가??? 몇 달 후에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는 이 집의 장남 태너는 글을 쓰고 싶어 하기는 하는데 책을 읽는 걸 싫어하고, 엉망인 문법과 맞춤법을 지적받아도 그런 건 실제 시나리오를 쓰는 데 큰 도움이 안 된다며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과신하는 의붓아들에게 날리는 일갈이 진짜 제대로인데!!!!!
요약을 하면, 자기가 꿈꾸던 직업이 생각보다 더 힘들고, 그런 재능을 가진 젊은이들은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며, 그중에서도 자신은 생각만큼 특출한 재능을 가진 게 아니라는 사실은 단박에 아는 게 아니라 점진적으로 깨닫는 것이라며.ㅋㅋㅋㅋㅋㅋ 나중에 우리 애들에게 써먹으려고 적어놨다고 밖에 생각이 안 들어서 메모를 보다가 피식 웃는 토요일 오후. 그래 나는 어쩔 수 없는 꼰대인가 보다. 가족을 통해 어떤 역할로 사는 게 아니라 나 자신으로 사는 게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여러 작품을 통해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있는 슈라이버의 소설을 읽으면서도, 아 이거 나중에 애한테 잔소리할 때 써먹어야지 하고 메모해 두는 걸 보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