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 너머의 엄마들 [5]: 디지털로 연결된 우리만의 돌봄망
올 초 호주 멜버른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임신 사실을 알게 됐다. 낯선 의료 시스템, 한국과는 너무 다른 출산 및 산후조리 문화까지. 새로운 환경에서 임신 기간을 홀로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막막함과 외로움이 몰려왔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아무리 정보를 찾아도 온라인 정보만으로는 알 수 없는 현지 맥락이나 문화 차이가 있었다. 게다가 구직도 중단되면서 생활 반경은 좁아졌고, 혼자 집에 앉아 있자니 불안과 고립감이 깊어졌다. “어떻게 이 시간을 견뎌야 할까?”라는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스쳤다. 그러던 어느 날, 카카오톡에서 우연히 한 공동체를 발견했다. 바로 ‘멜버른 뱀띠맘’ 오픈 채팅방이었다.
카카오톡 오픈채팅은 한국에서도 이미 동네 정보부터 육아, 취미 모임까지 이어주는 보편적인 소통 창구다. 특히 해외 이주자에게 이 채팅방은 단순한 정보 공유 플랫폼을 넘어 생존 가이드이자 정서적 피난처가 되기도 한다. ‘멜버른 뱀띠맘’을 처음 찾았을 때의 감각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방 안에는 이미 50여 명의 한국 엄마들이 활발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방에 들어가는 순간, 반가움과 어색함, 기대감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낯선 곳에서 출산과 육아라는 긴 여정을 함께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니!'라는 반가운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친구를 사귈 수 있을까?' 등 짧은 순간 수많은 생각이 오갔다. 홀로 망망대해에 떠 있다 드디어 정겹게 사람들이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을 발견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태명과 출산 예정일만 공유할 뿐, 서로의 직업이나 나이 같은 정보는 몰랐다. 하지만 해외에서 임신·육아를 겪는다는 공통점 하나로 엄마들은 서로에게 실질적인 정보와 무조건적인 지지를 건넸다. 채팅방에서는 호주 의료 시스템, 출산 문화, 아기 용품 준비, 의약품 구매 방법 같은 실질적인 정보가 쏟아졌다. 이와 더불어 공립/사설 병원 출산 후기, 한국과 전혀 다른 산후조리 문화, 아이 양육 방식의 차이까지 검색으로는 절대 알 수 없는 생생한 이야기도 오갔다. 덕분에 나는 조금씩 불안을 내려놓고 엄마가 될 준비를 해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방의 진짜 가치는 정보 그 이상이었다. 익명으로 시작된 대화는 곧 오프라인 만남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누군가 모임을 기획하면 원하는 사람들끼리 만나 친목을 다지는 형식이다. 실제로 나는 6월에 첫 오프라인 모임에 나갔는데, 얼굴을 마주했을 때도 초면이라는 사실이 무색할 만큼 처음 보는 분들께 친밀감을 느꼈다. 해외에서 임신과 육아라는 같은 여정을 걷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금세 마음이 열린 것이다. 이미 출산을 한 사람, 출산을 앞둔 사람 등 각자가 거쳐가는 임신기는 달랐다. 하지만 '해외에 사는 한국인 엄마'라는 공통점 덕분에, 출산 및 산후조리 계획부터 육아, 다문화 정체성 등 한국과 호주 두 나라 사이에서 우리만이 고민거리를 허심탄회하게 나눌 수 있었다.
오픈 채팅방에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면서 멜버른의 넓은 지역적 특성에 맞춰 지역별 소그룹 방도 만들어졌다. 나는 주변에 사는 엄마들과 한 달에 한 번 정기적으로 만나고 있다. 육아 이야기도 나누고, 한국어로 수다를 떨며 타지에서의 외로움을 달래기도 한다. 물론, 엄마와 함께 모임에 참여하는 귀여운 아가들도 볼 수 있다. 모임에 참여하는 분들은 임신 출산을 거쳐 육아에 몰두하다 보면 사회적 연결망이 끊기기 쉬운데, 잠시라도 일상에서 벗어나 사회적 연결을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라 입모아 말한다.
또한 이곳은 나눔의 장이기도 하다. 아기 옷, 장난감, 아기 침대 같은 물품을 물려주거나 육아 노하우를 전수하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다. 나 역시 여러 차례 물건 나눔과 도움을 받으면서, 이 작은 연대가 낯선 도시에서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실감 중이다.
물론 한국에서도 육아 커뮤니티는 정보와 공감을 나누는 중요한 공간이지만, 낯선 나라에서 만난 한국인 엄마들의 연결은 조금 더 단단한 것 같다. 병원 예약이나 출산 절차 같은 현실적인 정보뿐 아니라, 그 뒤에 숨겨진 두려움과 불안을 허심탄회하게 나눌 수 있었던 것 국경 밖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우리를 더 단단하게 묶어준 덕분이다.
‘멜버른 뱀띠맘’을 통해 나는 해외에서의 출산과 육아가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함께 해나가는 여정이라는 걸 배우고 있다. 벌써 임신 후기에 접어든 지금, 지난 임신 기간을 건강하게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이 작은 커뮤니티에서 발견한 따뜻한 연대 덕분이라 생각한다.
공동 육아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개인화된 현대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고, 아이를 키운다'는 감각을 일깨워준 곳, 멜버른에 사는 한국인 약 2만 5천여 명 중, 약 0.3%의 확률로 연결된 우리. 지난 8개월간 나 역시 누군가의 경험에 기대며 성장했기에, 앞으로 새로운 엄마들에게 내가 받은 도움 그 이상을 돌려주고 싶다. 전통적인 돌봄망이 부족한 멜버른이라는 낯선 도시에서 한국인 엄마들은 서로의 가장 큰 응원이자 버팀목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