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 너머의 엄마들[4]: 예기치 못한 경력 단절 앞에서 발견한 희망
호주 멜버른에 살고 있습니다. 호주에서 만난 한국 (예비)엄마 뿐만 아니라 해외 각지에 살고 있는 친구들과의 대화와 인터뷰를 소재로, 대한민국이 마주한 초저출산 시대에 MZ세대 부모들의 고민을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올 3월, 호주에 도착하자마자 임신 사실을 알게 됐다. 모두가 축복하는 일이었지만, 나에게는 혼란이 더 크게 다가왔다. 한국에서라면 익숙한 사회적 제도와 지원 체계 속에서 임신과 커리어를 조율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이민자 신분으로 맞닥뜨린 임신은 전혀 다른 무게였다. 무엇보다 나는 막 해외 취업에 도전하려던 시기였다. 아내이자 엄마이기 이전에, ‘내 커리어는 어떻게 될까?’라는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결국 관심 있던 기업의 최종 면접에서 떨어졌다. 임신과 구직이 겹친 상황에서, 나의 사회적 역할은 갑자기 사라진 듯했다. 뉴스에서만 보던 ‘경력단절 여성’이 바로 내가 되어버린 순간이었다.
한국 사회도 꽤나 긍정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 과거 ‘육아휴직은 여성의 몫’이라는 사회적 고정관념이 강했다면, 이제는 남성의 참여가 늘어나면서 돌봄 문화 자체가 변하고 있다. 지난 2일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2025 통계로 보는 남녀의 삶」에 따르면, 지난해 육아휴직급여 수급자 중 남성 비율은 31.6% 로 10년 전보다 크게 늘었다.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급여 수급자도 2015년 대비 여성은 12배, 남성은 19배 이상 증가했다. 여성 고용률은 62.1%로 상승했는데, 특히 30대 초반 여성 고용률은 2015년보다 13.9% 올랐다. ‘경력단절 여성’ 비율도 2015년 21.7%에서 지난해 15.9%로 줄었다.
30대 초반 여성 고용률 상승은 출산과 육아 시기에도 커리어를 이어가는 여성들이 점점 늘고 있음을 보여준다. 경력단절 여성 비율 감소 역시 정부 제도 확충, 기업의 육아 지원, 사회적 인식 변화가 서서히 영향을 미쳤음을 시사한다. 숫자만 보면 긍정적인 변화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기혼 여성 10명 중 1~2명은 결혼과 출산으로 일을 그만두고 있다. 제도가 늘어났다고 해도, 막상 출산과 육아가 닥치면 여성 개인이 겪는 불안과 갈등은 통계가 대신 설명해주지 않는다. 경력단절은 당사자에게는 0% 아니면 100%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호주에서 내가 마주한 현실도 비슷했다. 육아 휴직이 상대적으로 잘 보장되어 있다해서 풀타임 구직은 애매했다. 취업하자마자 휴직에 들어가야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남편은 박사 과정에 전념하고, 내가 아이가 어느 정도 클 때까지 최소 2~3년은 육아를 전담하기로 했다. 그 과정에서 눈에 들어온 것이 호주의 캐주얼 잡(Casual job) 제도였다. 한국의 비정규직과 비슷하지만, 다른 점은 분명했다. 호주의 캐주얼 잡은 정규직보다 시급이 평균 25% 높고, 원하는 시간에 유연하게 일할 수 있다. 유급 휴가나 고용 안정성은 없지만, 시간의 통제권을 갖는다는 점에서 나 같은 임신부·육아 여성에게 현실적인 대안이었다. 나도 출산 후 복귀를 대비해 내가 관심 있는 캐주얼 잡에 지원해 실습까지 진행했다.
호주는 전 세계에서 캐주얼 고용 비율이 높은 나라 중 하나다. 2025년 2월 기준 전체 근로자의 약 22%가 유급 휴가나 병가 없이 일하는 캐주얼 잡 종사자다. Australia Bureau of Statistics (호주 통계청)에 따르면, 캐주얼 잡 종사자 중 75% 는 유연성이 뛰어난 이 고용 형태를 선호한다고 답했다.
그러나 최근 ‘Closing Loopholes’ 개정안이 시행되면서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이 개정안은 캐주얼 근로자가 스스로 정규직 전환을 요구할 권리를 강화했으며, 공정근로위원회(Fair Work Commission)가 분쟁을 중재할 수 있게 했다. 반대로 캐주얼로 남기를 원하는 근로자에게는 그 권리를 법적으로 보장한다. 오는 2월 26일부터는 근로자가 자신이 더 이상 캐주얼이 아니라고 판단하면 고용주에게 정규직 전환을 서면 요청할 수 있고, 공정근로위원회가 이를 공정하게 처리하게 된다. 하지만 정규직 전환 확대가 캐주얼 일자리를 줄이고, 학업을 병행하는 청년층이나 육아를 전담하는 여성 같은 이들에게 필요한 유연성이 제한될 수 있다는 우려도 크다.
안정적인 정규직 일자리만이 해답이라고 생각했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현실을 마주하고 보니, 개인적으로는 호주의 유연한 고용 형태가 주는 불완전한 안정 속에서 잠시 숨을 고를 수 있었다.
경력단절이 두려운 이유는 단순히 일 경험과 벌이가 끊기기 때문이 아니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동안이나 자녀가 어느 정도 자란 이후, 엄마나 아내가 아닌 개인으로서 정체성을 새롭게 정립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한다는 점이다. 때문에 출산과 육아라는 변수 앞에서 필요한 건 오히려 유연하게 일할 수 있는 선택지였다. 경력의 공백을 최소화하면서도 삶의 다른 역할들을 포기하지 않게 해주는 형태 말이다.
양국의 노동 시장을 경험해보고 나니, 여성이 각자의 상황에 맞게 일할 수 있는 방식이 다양해져야 한다는 게 내 결론이다. 안정성과 유연성 사이에서 어느 한쪽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생애 주기마다 다른 선택이 가능할 때 비로소 ‘경력 단절’이라는 단어는 점점 낡은 말이 되지 않을까?
오늘도 제 브런치를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호주에서의 생활기를 유튜브로 나누기 시작했어요. 아래 영상은 임신기에 경험한 취업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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