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했는데, 산부인과 의사를 못 만난다니

국경 너머의 엄마들 [3]

by 국경 없는 펜

올 3월 초, 호주에 이주한 지 2주도 안 돼서 임신 테스트기의 두 줄을 확인했다. 다름 아닌 친구네 집 화장실에서 말이다. 집도 직업도 없는데, 덜컥 임신까지. 혼란스러운 임신 초기를 지나 어느새 임신 30주 차를 앞두고 있다. 임신 사실을 알자마자 가장 어려웠던 점은 호주 의료 시스템을 이해하고, 출산 병원을 선택하는 일이었다.

호주에서는 전문의를 먼저 만날 수 없는 데다, 출산 병원 선택에 따라 산과 의사 진찰 여부, 초음파 횟수, 출산 후 입원 기간, 보호자 숙식 여부 등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호주 의료 체계, 첫인상은 불호

한국에서는 산부인과 의사를 바로 만날 수 있지만, 호주에서는 GP (General Practitioner)를 먼저 만나야 한다. GP는 환자의 전반적인 건강 상태를 파악하는 일반의로, 진단을 내리고 백신 접종이나 약 처방 등 기본적인 치료를 제공한다. 대부분 병원이 호주 예약제라 서둘러 구글 지도에서 GP를 검색해 예약했다. 가장 빠른 예약 날짜는 3일 정도 뒤였다. 병원도 당장 못 가는 데다 산부인과 전문의를 바로 만날 수 없다니... 환자의 편의를 우선시하지 않는 것만 같아 답답함과 불신이 올라왔다. 그것이 호주 의료 체계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드디어 GP 와의 첫 만남. 두 줄이 보인 테스트기를 보여주자, GP는 더 확실한 검사를 위해 결과가 즉시 나오는 소변 검사를 제안했다. 높아진 임신 호르몬 농도로 인해 검사 키트에 선명한 두 줄이 떴다.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외국인 의사 선생님은 "나도 아내와 함께 30여 년 전 호주에 이주하자마자 아기가 찾아왔다"라며, 자신의 일인 마냥 축하해 주었다. 그러고선, 피검사와 8주 차 아기집 확인을 위한 초음파 의뢰서를 써주었다. 이 의뢰서는 또 뭘까?

한국에서는 피검사, 초음파 등 임신 관련 모든 진찰을 산부인과에서 한 번에 할 수 있는 것과 달리, 호주에서는 관련 기관을 따로 방문해야 한다. 특히, '어떠한 이유로 특정 진찰이 필요하다'는 GP 의뢰서가 있어야만 진찰을 볼 수 있다. 기관 선택은 환자의 마음이다. 나는 인터넷 검색을 통하거나 전화를 걸어 가격을 비교하고, 꼼꼼하게 리뷰를 확인 후 예약을 마쳤다. 번거롭고 낯선 의료 체계에 머리가 핑 돌았다. 10개월의 여정 중 1단계를 시작했을 뿐인데 벌써 진이 빠지는 것 같다. 마치 단계별 임무를 수행하고 보상을 얻는 게임 퀘스트를 깨 나가는 과정인 것 같다.


공립 VS 사립, 그것이 문제로다

임신 초기 분만을 공립에서 할지 사립에서 할지에 대한 고민도 시작했다. 호주 내 출산 경험이 있는 한국 엄마들의 말을 빌리자면, 호주 출산 시스템을 아래와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사립 병원에서 출산하면 내가 원하는 산부인과 의사를 지정하고, 진료나 초음파도 훨씬 자주 봐요. 출산 후 1인실에서 회복도 할 수 있고요. 하지만 공립에서는 조산사와 임신과 출산을 함께 준비해요. 초음파 보는 횟수도 임신 기간 동안 세네 번 밖에 안 돼요."


즉, 호주 공립과 사립 병원 출산의 가장 큰 차이점은 비용과 환자의 자율적인 선택 여부와 편의성이다.

공립 병원 : 호주 국민 건강보험 (외국인의 경우 사보험) 이 있다면 비용이 무료고, 주소지를 기준으로 병원이 배정된다.

사립 병원: 임신부의 상태, 진찰 시작 시기나 병원에 따라 가격이 상이하며, 사보험 여부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사보험 혜택을 받더라도, 최소 수백만 원에서 약 이 천만 원 정도까지 든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공립 병원 시설이 사립보다 훨씬 규모도 크고 좋다는 점이다. 사립 병원 진료는 의사가 소속된 병원에서 하더라도, 수술할 땐 해당 의사가 연계된 큰 병원의 시설을 이용한다. 때문에, 임신부는 의사를 선택할 때 그 의사가 어디 병원과 연계되어 있는지도 확인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나, 사립 병원에서 출산을 하다가도 응급 상황이 생기면 대부분 규모가 큰 공립 공원으로 이송한다.


병원 첫 방문 때 받은 아기용품 샘플과 책자

한참 고민한 끝에 임신 15주 차쯤 공립 병원에서 아이를 낳기로 결정했다. 임신 기간 내내 워낙 변수가 많아 불안이 크기에 사립 병원에서 자주 진료를 보면 불안을 잠재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임신 초중기까지 태아와 내 건강 상태 모두 좋았고, 임신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더군다나 희귀 피인 RH- 혈액형 보유자로서 응급 상황이 생길 경우 공립 병원 출산이 더 안전하다고 생각됐다. 다행히, 호주에선 RH- 혈액형이 한국만큼 희귀하진 않다고 해서 수혈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하지만.


최소한의 검사, 체계적인 접근

임신 17주 차 첫 조산사 미팅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공립 병원 출산 여정이 시작됐다. 저위험 산모인 나는 최소한의 검사와 진료만 받고, 임신 중기엔 한 달에 한 번, 후기엔 2주에 한 번 조산사와 정기 미팅을 하고 있다.

임신 초기: 피검사, 8주 차 초음파 (아기집 확인), 기형아 검사를 위한 니프티 검사

임신 중기: 13주 차 초음파 (목둘레 검사), 21주 차 정밀 초음파(태아 발달사항 확인), 임신 당뇨 검사

임신 후기: 36주 차 초음파(아기 머리 위치 확인)


이곳의 조산사는 단순 출산을 도와주는 역할만 하지 않는다. 임신 전 기간에 걸쳐 피검사나 신생아 혈류를 체크하는 도플러로 산모와 태아의 건강을 정기적으로 체크하고, 임신과 출산에 필요한 지식과 교육을 제공한다. 조산사라는 개념이 굉장히 낯설었는데, 의사만큼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임신 전 기간과 출산 후까지 산모들을 보살핀다. 한편, 고위험 산모나 태아의 경우에는 공립 병원에서도 산부인과 전문의가 밀착 진료한다.


첫 조산사 미팅과 교육

사실 한국과 비교해 볼 때, '너무 진료를 안 보는 것 아닌가? 아기가 잘 크고 있는지 어떻게 알지?' 불안함이 컸다. 하지만, 호주에서의 임신 초중기를 돌아보며 호주의 공립 의료 체계가 꽤나 합리적이고 체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7개월 동안 매 검진시마다 검진 결과를 상세히 전달받았고, 위급한 상황일 땐 언제든 병원을 방문해 의사를 만날 수 있었다. 실제로 중기에 속옷에 약간의 피 비침이 있어 병원에 전화를 했더니, 주저 말고 병원 응급실로 오라고 했다. 응급실에서도 내 우선순위가 밀려 대기가 있었지만, 별 탈 없이 조산사와 산부인과 의사를 만나 질초음파까지 진행했다.


한국 의료시스템을 반추하다

처음엔 불편하고 답답했던 호주의 의료 시스템. 하지만 그 구조를 이해할수록 합리와 안정의 체계가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한국의 의료 접근성과 속도감은 분명 장점이지만, 그 이면에는 과잉 진료와 재정 부담이라는 그림자도 존재한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업무보고에 따르면, 건강보험 재정은 고령화와 비급여·실손보험으로 인한 과잉 의료 이용 증가로 빠르게 악화되고 있다. 실제로 건강보험 진료비는 2020년 86조 9천억 원에서 2024년 116조 2천억 원으로 불과 4년 만에 33.7% 증가했으며, 특히 외래 진료비는 같은 기간 42.2% 급증했다. 국회예산정책처는 현 제도가 유지될 경우 건강보험 재정이 2026년 적자로 전환되고, 누적 준비금도 2030년이면 소진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조금만 아파도 의사와 병원을 쇼핑하듯 편리하게 선택할 수 있는 한국 의료 체계. 뛰어난 의료 접근성과 저렴한 비용을 당연시하게만 여기고 누렸다. 조금은 번거롭고 불편한 호주 의료 체계를 경험하며, 생각 없이 누리던 의료 서비스가 미래 세대에겐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의 불안을 다스리고 되돌아보는 감정적 성숙도 덤이다.


어느 제도가 더 낫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불편함은 합리의 또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는 것 - 낯선 나라에서 출산을 준비하며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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