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 너머의 엄마들 [2]: 낯선 곳에서 마주한 예기치 못한 임신
임신 테스트기의 두 줄을 확인한 곳은 다름 아닌 호주 멜버른의 친구네 집 화장실이다. 우리 부부는 2월 말 남편의 커리어와 장기 정착을 목표로 호주로 이주했다. 집 구하기가 하늘에 별따기인 이곳 사정 때문에, 친구는 고맙게도 임시 지낼 수 있는 방을 내주었다.
그런데, 이주한 지 2주도 채 되지 않았을 무렵, 한 달에 한 번 찾아오는 그날이 자꾸 늦어졌다. 정착할 곳이 생겼기에 임신을 처음 시도했지만, 난임이 흔한 시대 아기가 한 번에 찾아올 리가 없다 생각했다. 반신반의하며 임신 테스트기를 꺼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이틀 전 사용한 두 개는 분명히 비임신이었는데, 마지막 테스트기는 무언가 다르다. 한 줄이라고 하기엔 희미한 두 줄이 보이고, 두 줄이라고 하기엔 선의 농도가 너무 옅다. 임신인 걸까, 테스트기의 오류인 걸까.
곧 출산을 앞둔 친구에게 메신저로 SOS를 쳤다.
"이거 임신이야 아니야..? 지난번 두 개는 선명한 한 줄이었는데, 오늘은 두 줄도 아니고 한 줄도 아니야". 친구는 사진을 확인하자마자 현란한 축하 이모티콘과 수 십 개의 느낌표를 덧붙여 임신을 축하한다는 답장을 보냈다. 아직 임신 초기라 임신 호르몬 농도가 낮아서 선이 옅어 보이는 거라는 전문적인 지식과 함께. 그러고는 영양제 챙겨 먹고 얼른 의사를 만나러 가라고 덧붙였다.
그렇게 순식간에 낯선 나라에 도착하자마자 예비 엄마가 되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이곳에서 말이다. 머리가 새하얘졌다. 선물같이 찾아온 아기가 놀랍고 고마웠지만, 불안정한 상황에 잘 챙겨주지 못할 것 같아 미안한 마음과 조금은 원망스러운 마음도 들었다. 아직 이곳에 집도 직업도 없는 데다, 의료 시스템도 모르는데 조금만 더 기다려왔다 찾아와 주지.. 무엇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눈앞이 캄캄해지다 문득 두려움이 엄습했다. 임신 극초기라 가족이나 남편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소식이기에 한참을 넋 놓고 있다, 위축된 상태로 친구의 조언을 따라 먼저 약국으로 향했다.
그날 무지와 혼돈 속에서 나를 구해준 건, 이름 모를 낯선 이들의 축하와 친절이었다. 쭈뼛쭈뼛 영양제를 사러 간 약국에서 환하게 축하 인사를 건네던 약사. 호주 의료 시스템에 대해 자세히 알려준 교민 온라인 커뮤니티 회원들, 남편을 위한 깜짝 임신 소식을 준비하기 위해 들린 아기 옷 매장 직원의 축복까지. 어떤 영양제가 좋은지, 호주의 임신 검진 시스템은 어떠한지, 지금 해야 하는 것들은 무엇인지 등 자신의 일인 마냥 진심 어린 축복과 조언을 주신 분들 덕분에, 갑작스러운 변화로 인한 두려움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균열이 생긴 빈틈으로 낯선 변화를 마주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 남편에게 임신 사실을 알리기 위해 작은 이벤트를 준비했다. 마침 남편이 부탁한 쇼핑 물품이 있어 테스트기를 그 안에 숨겨 두었다. 무심히 쇼핑백을 열던 남편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오는 테스트기를 보고 놀라고 흥분하는 눈치다. 그의 흥분 역시 혼란으로 금세 바뀌었지만. "두 줄이어야 임신인데, 이 테스트기는 한 줄은 선명하고 한 줄은 희미해. 이건 무슨 뜻이야..? 반만 임신이라는 건가..?".
아침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은 마음에 웃음이 나오다가도, 정말 무지한 초보 엄마 아빠구나 싶어 살짝 걱정이 됐다. 임신 준비를 시작했으면서, 테스트기조차 읽을 줄 모르다니... 특히 무엇이든지 분명하고 명확한 규칙이 있어야만 납득을 하는 남편은 테스트기 위의 애매한 선을 보고, 기뻐해도 되는 건지 아니면 너무 섣부른 판단인지 혼란스러워했다. 그가 함박웃음을 지은 건 내가 준비한 작은 아기옷과 편지를 발견하고 나서다. 그의 두 눈엔 맑은 액체가 차올랐다. "아빠가 된 걸 축하해". 내가 나지막이 건넨 이 한마디에 감정이 격앙된 남편은 연신 밑을 수 없다는 말을 내뱉었다.
생각지도 못한 시점에 도움을 줄 사람도 없는 곳에서 부모가 될 준비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망망대해에 떨어진 것 같았던 하루. 다행히도 남편은 나와 달리 꽤나 현실적이고 안정적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급격한 삶의 변화에 걱정되지 않냐 물으니, 걱정은 하나도 안되고 마냥 행복하단다. 지금의 행복을 만끽하며, 불안해하기보다 현실적으로 나아가는 남편 덕분에 안심이었다. 남편과 함께라면 우리가 도착해야 하는 목적지에 안전히 도착할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생겼다.
새로운 삶의 터전에서 혼란과 기쁨이 공존한 하루. 우리에게 주어진 엄마 아빠라는 새로운 역할이 어색했지만, 조금은 아주 조금은 나아갈 동력이 생겼다. 겁에 질린 내게 선뜻 손을 내밀어 준 이름 모를 존재들의 따뜻한 마음과, 나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진심으로 경청해 주고 온 마음을 다해 아기를 환영해 준 남편 덕분이다. 그렇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우리는 낯선 곳에서 새로운 가족을 맞이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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