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때문에, 네 덕분에

잔인하리만큼 싱그러운 봄

by JACOB


기어코 봄이 왔습니다. 내심 영영 오지 않기를 바랐던 봄이, 배알도 없이 또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저는 싱그러운 벚꽃 나무 아래서 한 움큼 차가운 푸념을 터놓았습니다. “결국 또 살게 하네요.” “기어코 온 봄이, 결국 또 저를 살게 해요.” 함께 걷던 어른은 조곤히 말했습니다. “원래 생이 그렇게 흘러가요.”


차가운 겨울은 죽음과 가까워 생을 쉽게 포기하게끔 합니다. 그중에도 유독 진한 겨울을 보낸 저는 이번엔 끝까지 생을 포기하기를 바랐죠. 하지만 기어코 어디선가 불어온 봄바람에, 어디선가 풍겨온 봄내음에, 어디선가 차오른 봄기운에 염치없이 마음이 간지럽습니다. 이런 제가 심히 못마땅할 만큼 말입니다. 살려달라 간절히 곡할 땐 눈길 한번 주지 않더니, 이젠 됐다 모든 걸 내려놓으니 따듯한 숨결이 다가옵니다.

얄궂은 하늘이 괘씸하여 저는 겨울에 모아두었던 시린 마침표를 툭 뱉었습니다. “별로네요.” 괜히 싱그러운 봄 따라 배알 없이 싱숭생숭한 제 마음이 실망스러워 뱉었습니다. ‘당신 참 별로예요.’ 다시 한번. 다시 한번. 또다시 한번. 너무 억울하고 원통해서 벚꽃길을 걷는 내내 뱉었습니다. ‘별로야. 별로.’ ‘당신 참 별로야.’


봄은 참 잔인하리만큼 싱그럽습니다. 봄은 괜히 자고 있는 뿌리를 온기로 흔들어 깨우고, 어둔 땅을 이불 삼아 이제야 안식에 접어든 씨앗에 눈치 없이 활기를 뿌려댑니다. 이제는 땅 속 깊은 곳에서 죽음의 평화를 맞이하며 눈을 감고자 할 때, 봄은 새삼 해맑게 다가와선 다시금 사랑을 노래해보지 않겠느냐고 우리를 깨웁니다. 다시금 세상을 초록으로 물들여 보자고. 다시금 온기를 다정히 나눠보자고. 이번엔 조금도 남기지 말고 끝까지 울어보자고. 다시금, 봄이 왔다고.


따듯한 봄바람이 불고, 향긋한 봄내음이 풍기고, 싱그러운 봄기운이 차오르니 저는 그저 떨리기만 합니다. 그 어떤 저항도 못한 채 또 무엇을 한없이 사랑하게 될까 벌써부터 떨리고, 이제는 죽음의 평화 속에서 안식하고 싶은 저를 꺼내어 또 얼마나 나뒹굴게 할지 벌써부터 떨립니다. 여러분은 죽음의 평화를 깨고 삶의 투쟁으로 이끄는 봄의 노래가 마냥 사랑스럽게 들립니까. 제겐 잔혹하리만큼 싱그러운 봄이 벌써부터 두렵습니다. 다시 배알 없이 사랑하게 될 싱그러운 봄이 과연 행복한 계절일지 잔인한 계절일지 잘 모르겠어서 저는 그저 하염없이 떨리기만 합니다.



왜 왔는지 모르겠는 날이었습니다. 왜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는 날이었습니다. 왜 버텨야 하는지 모르겠는 날이었습니다. 왜 씨름해야 하는지 모르겠는 날이었습니다.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는 날이었습니다. 많은 소리가 오갔지만 제 귀에 담기는 소리는 없었고, 많은 이유가 있었지만 여전히 답을 찾지 못하는 날이었습니다. 감히 누구도 저를 움직이지 못하는 날이었습니다. 갖은 이유와 갖은 가치와 갖은 진실 속에서도 결코 움직일 수 없었던 날이었습니다. 그 어떤 것도 저를 설득하지 못하는 날이었습니다. 땅의 질서와 하늘의 섭리도, 찬란한 영광과 흉폭한 질타도, 정해진 운명과 하고픈 욕망도, 그 어떤 힘도 저를 이끌지 못하는 그런 날이었습니다. 그날은 그리도 외로운 날이었습니다.


싫었습니다. 그저 싫었던 것뿐이지만, 그토록 싫었던 적도 없었습니다. 덩달아 억울하게 더러워지는 것이 싫었습니다. 아프지 않아도 되는데 끔찍이도 아파야 하는 것이 싫었습니다. 추한 모습으로 이곳저곳에 손가락질을 당하는 것이 싫었습니다. 분명 지지 않았는데 지는 것처럼 보여야 하는 게 싫었습니다. 이 모든 걸 한꺼번에 짊어져야 한다는 게 그리도 싫었습니다. 그보다 더 큰 것을 보장한대도 싫은 건 싫었습니다. 하물며 옳다 해도 싫었습니다. 싫었던 겁니다. 그저 싫었던 것뿐이지만, 그토록 싫었던 적이 또 없었습니다. 그래서 씨름이 끝나지 않는 날이었고, 그래서 종일 물을 쏟아내며 ‘왜’로 읍소했던 날이었습니다.


‘결국 당신도 나를 설득하지 못하는군요.’ 씁쓸한 감정과 함께 시선과 마음의 발이 씨름의 장소에서 멀어졌을 때, 이제는 쏟을 데까지 다 쏟았다 하여 쓸쓸히 못난 제 모습을 받아들이고자 할 때, 어쩌자고 봄바람이 생뚱맞게 불어왔습니다. 남의 속도 모른 채 곤히 자고 있는 한 아이의 얼굴에서 말입니다. 자면 안 될 시간에 늘어 자고 있는 한 아이의 얼굴에서 말입니다. ‘너 때문인 걸 아니.’ ‘내가 이렇게 씨름하고 있는 게 너네 때문인 걸 아니.’ ‘알고도 태평히 자고 있니.’ 마땅히 억울해 한껏 뒤틀린 속으로 분통을 터뜨리고 싶었지만, 따듯한 봄바람은 약빠르게 차가운 겨울을 녹였습니다. 자고 있는 아이의 얼굴이 한없이 싱그러워서, 자고 있는 아이의 얼굴이 가히 사랑스러워서, 자고 있는 아이의 얼굴이 옹골차게 생명을 노래하고 있어서, 저는 저항할 새 없이 봄을 맞았습니다. 아이의 자는 얼굴 위에 포슬히 앉은 봄잎 하나는 냉혹하고 단단한 겨울을 녹이기에 충분했습니다.


‘살아야겠다.’ ‘가야겠다.’ ‘버텨야겠다.’



그렇다고 봄으로 살게 된 삶이 과연 즐거웠을까요. 그렇게 봄 때문에 걷게 된 길이 과연 따듯했을까요. 그랬으면 좋겠지만, 봄 때문에 걷게 된 삶은 이내 극히도 맞이하기 싫었던 것들을 마주하게 했습니다. 조롱의 손가락, 억울한 누명, 쌉싸름한 배신, 비루한 패배, 외로운 상실, 투쟁의 시간. 봄기운 따라 홧김에 옮아 들어온 생은 생각보다 평화롭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평화는 차디찬 겨울, 죽음의 냉기가 맴도는 깊은 땅속에 존재했을지 모르죠. 삶은 연명(延命)이었고, 봄은 다가올 때와는 다르게 잔인했습니다. 봄은 이따금 온기를 풍겼지만, 봄은 언제나 강렬하리만큼 짧을 뿐입니다.



하필 봄은 그토록 싱그러워야 했을까요. 하필 아이는 그토록 사랑스러워야 했을까요. 괜히 억울하지만서도 분이 차지는 않습니다. 하필 또 그토록 사랑스럽기 때문입니다. 어느 시인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보며 ‘괴롭지만 행복한 존재’로 표현했습니다. 십자가가 죽을 만큼 괴로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 죽을 만큼 괴로운 것을 감히 감당할 만큼의 사랑하는 대상이 예수에게 있었다는 것이 예수가 행복한 존재인 이유였죠. 그게 사람이 되었건, 사명이 되었건 말입니다.


자연스럽게 이별을 맞이하는 날, 저는 아이에게 편지를 적었습니다. “덕분에 행복했어. 내내 죽을 만큼 아프고 억울했지만, 그것도 다 괜찮을 정도로 사랑하는 사람이 내게 있었다는 게 나는 그저 행복했어.” 아이는 울었지만, 저는 덕분에 웃었습니다. 잔인하리만큼 싱그러운 봄. 하필 봄은 그토록 싱그러워서 잔인합니다. 하필 생은 그토록 아름다워서 잔인합니다. 하필 사랑은 그토록 강렬해서 잔인합니다.



다시, 기어코 봄이 왔습니다. 내심 영영 오지 않기를 바랐던 봄이, 배알도 없이 또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잔인하리만큼 싱그러운 봄이 왔으니, 다시 살아야겠죠. 다시 초록을 얘기해야겠죠. 다시 온기를 나눠야겠죠. 다시 사랑의 노래를 힘차게 불러야겠죠. 분명 괴롭겠지만, 더없이 행복하게 말입니다.



다시금, 봄이 왔습니다.

잔인하리만큼 싱그러운 봄이 왔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고 하는 곳에 가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하는 동안에, 너희는 여기에 앉아 있어라. 그리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서, 근심하며 괴로워하기 시작하셨다. 그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머무르며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 예수께서는 조금 더 나아가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서 기도하셨다. 나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주십시오. 그리고 제자들에게 와서 보시니, 그들은 자고 있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너희는 한 시간도 나와 함께 깨어 있을 수 없느냐?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하여라.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구나! 예수께서 다시 두 번째로 가서 기도하셨다. 나의 아버지 내가 마시지 않고서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는 것이면, 아버지의 뜻대로 해주십시오. 예수께서 다시 와서 보시니, 그들은 자고 있었다. 그들은 너무 졸려서 눈을 뜰 수 없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그대로 두고 다시 가서, 또 다시 같은 말씀으로 세 번째로 기도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와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남은 시간은 자고 쉬어라. 보아라, 때가 이르렀다. 인자가 죄인들의 손에 넘어간다. 일어나서 가자. 보아라, 나를 넘겨줄 자가 가까이 왔다."(마26:36-46)

: 예수는 선택의 가능성을 의미하는 단어(δυνατον)를 사용하시면서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을 자신에게서 피해가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예수가 근심(λυπεισθαι)하여 괴로워했다는 표현 역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마음의 상태를 잘 보여주고 있죠. 예수는 거뜬히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 아니, 어쩌면 예수는 꽤나 실패했습니다. 예수가 처음부터 성공했다면, 처음부터 거뜬히 잔을 받을 수 있었다면 같은 기도로 세 번이나 치열하게 씨름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첫 번째도 두 번째도 실패했기 때문에 같은 기도가 세 번째까지 이어졌던 것이죠. 치열하게 기도했지만, 예수 스스로는 알았습니다. 그 잔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음을요. 그럼 무엇이 다시 예수를 그 치열한 씨름의 장소로 다시 이끌었을까요? 실패의 찜찜함을 가지고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가자 사랑스런 제자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보입니다. 내 제자들, 내 아이들, 세상 사랑스러운 얼굴로 자고 있는 우리들. 그래서 예수는 다시, 싸우러 갑니다. 왜냐하면 우리라는 존재는 비록 자고 있을지라도 하필 그토록 사랑스럽기에 다시 씨름할 이유가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예수가 십자가를 감당할 수 있었던 힘은 예수 본인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예수는 실패했습니다. 2번이나 말입니다. 예수도 부자 청년처럼 갈팡질팡 결단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도 싫었습니다. 하지만, 그 예수를 움직이게 한 봄과 같은 존재들이 있습니다. 그 죽기보다 지기 싫은 십자가를 감히 예수 스스로 지게 할 만큼 사랑스러운 존재. 자력이 아닌 타력으로 지게 된 고통의 십자가는 예수를 행복하게 만들었습니다. 하필 그토록 사랑스럽고 싱그럽고 존재들이 예수에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