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모는 뭐가 되고 싶은 걸까
제 초등학교 5학년, 당시 선생님은 종례 시간에 항상 주의 사항과 지시 사항을 전달하신 후에 노래 한 곡을 꼭 틀어주셨습니다. ‘체리필터의 오리 날다’, ‘동방신기의 풍선’, ‘얼굴 찌푸리지 말아요’, ‘자두의 김밥’, 그리고 ‘네모의 꿈’. 이 다섯 가지의 노래를 날마다 번갈아 틀어주셨죠. 당시에는 이 노래 시간이 친구들과 인사하고 얘기하는 시간이었던지라 노래의 가사를 따로 볼 겨를이 없었지만, 지금에서야 다시 이 노래들을 들어보니 역시 기억에 남아 있는 대로 당시 제 선생님은 참 선생(先生)이셨습니다. 먼저 사신 삶으로 우리를 지도하고, 우리가 자신보다 더욱 빛나기를 그토록 소원하셨죠. 20년이 가까이 지난 오늘 이 노래들을 다시 되새겨 들으며 저는 다시 정겨운 교실 벗겨진 나무 의자에 앉습니다. 당시 우리를 밤하늘 세차게 반짝이는 별로 바라봐주셨던 우리 선생님은 지금 다시 벗겨진 나무 의자에 앉아 있는 저에게 어떤 주의 사항과 어떤 지시 사항을 전해주실까요.
주위를 둘러보면 모두 네모난 것들 뿐인데
노래는 우리가 네모난 침대에 네모난 방, 네모난 버스와 네모난 건물, 네모난 책과 네모난 컴퓨터, 곧 네모난 세상 속에서 의식도 하지 못한 채 숨만 쉬며 살아간다고 야단이지만, 살아 보니 온통 네모난 풍경과 네모난 환경 아래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 살아가는 데에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우리 안에 있는 네모난 마음이 너와 나 함께 살아가는데 더 큰 문제로 야기되고 있진 않을까요. 선을 만들어 구분하고 각을 만들어 뾰족하고 자신을 지키지만 타인은 배척하는 우리 안의 네모난 마음. 타인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다가오지 못하게 하고, 나 또한 내가 그은 선을 넘어 타인을 향해 굳이 내 발을 내딛지 않을 우리 마음속의 그 경계, 그 기준, 그 공간, 그 분절, 그 벽, 그 네모가 우리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더욱 차갑고 삭막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사실 인간의 뇌는 구조적으로 네모가 편하다고 합니다. 네모는 정리하기도, 쌓아두기도, 운반하기도, 이해하기도, 계산하기도, 보기에도 쉽고 편안합니다. 어떠한 기준도 없고, 불규칙적이고, 짝지을 것도 없는 곡선과 동그라미보다야 ‘상하’, ‘좌우’, ‘위아래’처럼 분명한 기준과 그 대척점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는 직선과 네모가 어떠한 경우에서도 안정적입니다. 하지만 그 네모 양 끝의 변들은 철저히 이분법에 의거하고, 자연스레 분절을 수반하기 쉽습니다. ‘선과 악’, ‘내 편과 네 편’, ‘옳음과 그름’, ‘위와 아래’, ‘거짓과 진실’, ‘좌파와 우파’ 등 기준을 세우고, 그것을 나누고, 결국엔 그 사이를 가르게 되죠. 그리고 그 갈라진 사이에는 시나브로 적대적인 거리가 스며들게 됩니다. 물론 앞서 말했듯 이러한 선, 벽, 명확한 기준이 있는 공간은 그 안에 있는 것을 안정적으로 보호해 줄 수 있지만, 어쩔 수 없이 그 안의 것을 제한하기도 합니다. 자신이 세운 선, 벽, 기준, 공간, 사고, 네모 안에 갇히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공간이든 시간이든 경험이든 배움이든 생각이든 제한된 것은 전체를 보지 못하고 한 부분에만 국한되어 폭력적이고 비논리적인 성향을 만들어냅니다. 그렇게 결국은 네모끼리의 부딪침이 잦아지게 되는 것이죠. 어쩌면 우리는 깔끔하고 정갈하고 명확하다는 명목하에, 또 자신을 안정적으로 보호할 수 있다는 명목하에 우리 안에 네모난 마음을 차츰 만들어내는 것이겠습니다. 나와 대척점에 있는 너는 내게 맞추지 않는 한 절대로 내게 다가올 수 없는 그 네모난 마음을 온통 네모난 풍경들 속에서 말입니다.
우린 언제나 듣지 “세상은 둥글게 살아야 해”
옛적부터 어른들은 웬만한 대립 없이 그저 포용하는 순한 사람을 표현할 때 ‘둥글둥글하다’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제 경험상 그런 사람들은 외적으로도 둥글둥글함이 묻어 있더군요. 직선이 날카롭다면 곡선은 부드럽고, 직선이 빠르다면 곡선은 느립니다. 직선이 효용을 나타낸다면 곡선은 포용을 나타내고, 직선이 만들어내는 네모는 각을 만드는 반면, 곡선이 만들어내는 동그라미는 그저 완만(婉娩)합니다. 곡선과 동그라미는 직선과 네모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동그라미는 꺾이는 곳 하나 없이 그저 순환하기 때문에 시작도 애매하고, 끝도 애매하고, 기준도 애매하고, 한계도 애매합니다. 불규칙적이고 불확실하고 불안정해서 불편한 것투성이 일 수 있겠지만, 확실하고 명확해서 생기는 날카롭고 뾰족한 구석도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날카롭지 않고 둥글둥글합니다. 날카롭고 뾰족한 부분이 없으니 자신도 타인도 안을 수 있습니다.
직선과 네모는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과는 다른 타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타자를 밀어내며, 타자를 규정하고, 타자와 싸웁니다. 끝끝내 자신의 기준 안에 타자를 맞추어 냅니다. 자신에게 맞추지 않은 타자는 자신과 함께할 수 없습니다. 이분법적인 직선과 네모가 타자를 받아들이는 경우는 타자가 자신의 기준 안에 들어왔을 때뿐입니다. 역시 직선과 네모에게는 포용과 공존보다는 지배와 흡수가 더 어울립니다. 하지만 곡선과 동그라미는 직선과 네모와는 다르게 다양성을 인정합니다. 자신과 다른 타자를 있는 그대로 포용합니다. 때문에 타자와 공존할 수 있고, 타자와 함께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애매하다 느낄 수 있지만, 애매해서 모든 것을 받을 수 있습니다. 직선과 네모처럼 뚜렷하고 날카로운 마음이 아니라, 부드럽고 온순한 마음입니다. 사람만큼 다양하고 복잡한 존재에는 더욱이 이런 둥그런 마음이 필요하겠습니다. 사람은 모두 제각기 다양하고, 복잡하고, 변덕스럽기 때문입니다. 이때 저때, 이리저리, 이 경우 저 경우 모두 제각각입니다. 이런 변덕스러운 사람에게 날카로운 직선과 각진 네모는 너무 모질고 혹독합니다. 네모난 마음을 가득 품고는 각기 다르고, 때에 다른 서로가 더불어 살기 어렵습니다. 우리보다 먼저 사셨던 대대의 어른들은 자신들의 삶을 통해 이미 알았던 것이겠죠. 그래서 타자에 대한 존중 없이 지배와 흡수로만 이뤄진 네모난 사회에 그들은 계속해서 동그란 조약돌을 던졌던 건 아닌지 싶습니다. “세상은 역시 둥글게 살아야 해”
지구본을 보면 우리 사는 지구는 둥근데
네모난 세상 속 네모난 것들만을 나열했던 노래의 가사와는 정반대로 사실 자연 세계에는 네모난 것이 전혀 없습니다. 자연에서부터 내려오고 자라오고 솟아난 모든 것은 하나같이 곡선을 띠고 각진 네모보다는 완만한 동그라미에 더 가깝습니다. 아무리 곧은 나무라 한들 온전히 직선적인 나무가 없고, 직선적인 꽃과 풀이 없으며, 직선적인 생물이 없습니다. 구름도 곡선이고, 사람의 얼굴도 곡선이고, 우리가 발을 디디고 있는 땅도 사실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이상 완벽한 직선보다야 완만한 곡선에 더 가깝습니다. 생명으로부터 나오고 자연으로부터 나온 것은 어느 구석을 봐도 완만합니다. 직선으로, 사각형으로 된 부분을 찾기 어렵습니다. 인간의 손을 타고나서야 곧게 직선이 생길 뿐이죠.
한국으로 들어오기 전, 스페인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 (故)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i)의 작품을 적지 않게 보게 되었습니다. 건축도, 디자인도, 미술도 문외한이지만,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은 가우디의 건축 작품에 곡선이 참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저 ‘효율적인 새로운 건축양식을 발견한 것일까’ 싶었지만, 가우디의 건축 철학은 확고했습니다. 가우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직선은 인간의 선이고, 곡선은 신의 선이다” 정말 가우디는 철저히 인공적인 직선의 건축을 최대한 피하고, 하늘과 자연의 곡선만을 사용하기를 힘썼습니다. 직선이 나타내는 효용, 빠름, 날카로움의 인공적인 인간의 속성이 아니라, 곡선이 나타내는 포용, 느림, 부드러움의 하늘과 자연의 속성을 건축을 통해 나타내고자 했던 것입니다. 가우디의 건축을 보고 주변을 둘러보니 둥근 지구 곳곳에 하늘의 마음이, 생명의 속성이 퍼져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여기도 하늘의 ‘포용’, 저기도 생명의 ‘느림’, 여기저기 하늘과 생명의 ‘부드러움’. 정말 하늘에서 내려오고 자연에서 솟아나는 생명에 날카로운 직선과 각진 네모는 없습니다.
어쩌면 그건 네모의 꿈일지 몰라
‘네모의 꿈’이라는 노래는 결국 세상에 만연해 있는 모든 네모가 어쩌면 지구처럼 동그라미가 되는 꿈을 꾸고 있을지 모른다며 끝이 납니다. 정말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는 대목입니다. 분절과 경계, 기준과 가름, 벽과 네모로 인해서 차갑고 삭막해진 세상 속에 살아가고 있지만, 분명 우리는 이런 차가움을 바라지 않습니다.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삭막할 수밖에 없는 이 세계가 전혀 반갑지 않습니다. 우리 역시 네모의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동그라미가 되고 싶은 ‘꿈’을 꾸고 있습니다.
하늘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그 꿈을 꿔야 합니다. 하늘을 바라보며 계속 우리 안에 있는 네모난 마음을 조금씩 조금씩 둥글게 깎아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늘로부터 주어진 생명으로 태어난 이상, 우리가 자연의 것으로 길러진 생명인 이상, 우리 안에는 동그란 마음이, 동그라미가 되고 싶은 열망과 꿈이 분명 존재합니다. 그 꿈을 가지고 하늘의 포용을 배우고, 생명의 느림을 배우고, 그 안의 부드러움을 함께 배워야 합니다. ‘사람’이란 글자의 ‘ㅁ’(네모)을 ‘ㅇ’(동그라미)으로 깎아내면 ‘사람’은 ‘사랑’이 됩니다. 분절하고, 구분하고, 배척하고, 지배하고, 가르고, 선을 만드는 ‘사람’에서 끌어안고, 포용하고, 공존하고, 환대하고, 섬기는 ‘사랑’이 되는 것이죠. 그리고 ‘사랑’은 언제나 ‘생명’을 키웁니다.
그 꿈을 품고 사는 사람들, 그 꿈을 보여주는 사람들, 그 꿈에 동참하는 사람들, 그 꿈을 소망하는 사람들로 인하여 세상은 더 아름다워질 것이라 믿습니다. 함께 꿈을 꿉시다. ‘사람’에서 ‘사랑’이 되고자 하는 네모의 꿈을. 사랑은 완전하게 묶는 띠입니다.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이 새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져서, 참지식에 이르게 됩니다. 거기에는 그리스인과 유대인도, 할례받은 자와 할례받지 않은 자도, 야만인도 스구디아인도, 종도 자유인도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사랑 받는 거룩한 사람답게, 동정심과 친절함과 겸손함과 온유함과 오래 참음을 옷 입듯이 입으십시오.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용납하여 주고, 서로 용서하여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는 띠입니다."(골3:10-14)
2024년 8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