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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칠일오 Jul 18. 2023

꿈: 실현하고 싶은 희망이나 이상

프롤로그


    아직 아무것도 나누지 않았지만, 요즘 저의 지향이 매우 걱정스럽곤 합니다. 제가 그리는 저의 세상은 너무나도 이상적이어서 현실과 너무나도 많이 부딪히거든요. 현실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누군가에게 저의 지향을 선뜻 이야기했다가는 아직 어려서 그런 거라고, 각박한 세상을 한 번도 제대로 살아보지 못했기에 그런 말을 하는 거라고, 누구는 그런 이상을 살고 싶지 않아서 살지 않는 거냐고 이야기할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말을 들어왔고요. 저는 그들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도 제가 아직 어려서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론 그렇기에 지금 이런 말을 서슴없이 뱉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 또한 언제 이 각박한 세상에 잠식당할지 모르지 않습니까? 비장해 보이는 지금 저의 각오는 안타깝게도 세상 앞에 그저 초라할 뿐이고, 세상의 풍조는 그 어떤 것도 집어삼킬 만큼 강합니다. 그러니 저도 모르게 잠식당하는 그때가 오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찬란한 꿈을 꾸어야겠습니다. 그저 그 꿈에서 깨야할 때가 오지 않기를 바라며 말입니다.


 사람답게 산다는 것


    저는 ‘사람’처럼 살고 싶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함께 어울리는 사회’를 꿈꿔봅니다. 사람으로 태어났는데 사람처럼 살고 싶다는 말이 무엇인가 하니, 요즘 우리가 사는 세상이 사람답게 살기 참 어려운 세상이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혹시 게오르규의 <25시>라는 소설을 아시는지요? 저는 그 책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참 잘 묘사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대우받지 못하는 사회를 그리고 있죠. 오늘날을 보면 언젠가부터 사람이 ‘기계’가 되었습니다. 효율과 실리, 이익과 쓸모의 관점으로 사람의 가치가 판단되고, 사람은 사람으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기계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서 기계의 삶을 선택합니다. 기계가 무엇인고 하니, 사람에게 이로움을 끼치는 것이 기계입니다. 그래서 기계에게 있어 효율과 실리, 이익과 쓸모는 굉장히 중요한 요소이죠.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기계는 쓸모가 없어지는 순간 가차 없이 버려집니다. 기계는 쓸모가 없어지면 금방 다른 기계로 대체됩니다. 그것이 기계입니다. 맘몬(Mammon)의 지배가 불러온 결과일까요? 오늘날의 사회는 웃음 많은 사람보다 이로움을 주는 기계를 더 원합니다. 주변을 보면, 세상의 풍조에 따라 대개 많은 사람들이 기계처럼 살고 있습니다. 사람이 기계처럼 살고, 기계처럼 취급받고, 기계처럼 버려집니다. 그것이 이상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아니, 처음엔 다들 이게 어딘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할 새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 생각에 내 손과 발을 멈추는 순간, 내가 설 곳은 없어집니다. 멈춘 기계는 쓸모가 없으니까요. 기계는 그저 하염없이 돌아가야 할 뿐입니다.


 모든 생명이 태어난 대로 살아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입니다. 개구리가 독수리처럼 살 수 없고, 독수리가 개구리로 살 순 없습니다. 행복하지 않을뿐더러 그리 살 수조차 없습니다. 사람이 기계처럼 살아가는 오늘날, 그들에게서 보이는 현상은 무엇인가 한참 잘못됐음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오늘날의 2-30대 청년들을 만나보면 무엇을 시작하기도 전에 지쳐있는 사람들이 태반입니다. 2-30대뿐일까요. 모두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울음을 가슴속 깊이 품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마저도 쉽게 내비칠 수 없는 현실을 아십니까? 그러한 지친 모습이 기계로서 마이너스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쓸모가 없으면 버려지고 대체되는 기계 세상 속 지침과 아픔은 다른 기계로 대체될 약점 요소일 뿐입니다. 이런 기계 사회 속 사랑과 배려와 공감과 존중을 기대하긴 어렵습니다. 자고로 기계란 저보다는 내가 더 훌륭해야 하니 말입니다. 내가 기계로 생존하기 위해서는 저 기계가 고장 나기를, 저 기계가 나보다 못나기를 바라야 합니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는 적자생존만이 방법이죠. 이러한 기계 세상 속 어떻게 다른 이에게 손을 내밀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기계 세상 속 어떻게 다른 이에게 나의 아픔을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2018년에 방영했던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계속해서 보기 힘들다는 사람들도 주변에 많았으나, 끝까지 보고 나면 너도나도 입을 모아 자신의 인생 드라마로 꼽는 드라마 중 하나입니다. 저는 이 드라마가 기계처럼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의 실상과 아픔을 잘 말해줬다고 생각합니다. 이 드라마를 쉽게 보기 힘든 이유는 오늘날의 우리 사회를 너무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이고, 반대로 다 본 후에 이 드라마를 인생 드라마라 말하는 이유는 그 드라마가 보여주는 메시지가 이 기계 사회 속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 모두의 바람이기 때문일 겁니다. 몇 화인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회사 상사가 어딜 봐도 쓸모의 관점에서 가치가 없어 보이는 인물 지안을 물고 늘어지면서 그 지안을 옹호해 주는 동훈이라는 인물을 압박 면접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때 상사는 동훈에게 말합니다. “여긴 회사야!” 아마 이 말은 쓸모의 관점에서 가치가 없는 지안을 옹호해 주는 동훈을 타박하는 말이겠습니다. 회사란 앞서 살펴보았던 기계로서의 가치, 곧 효율과 실리, 이익과 쓸모 즉 기계 사회를 가장 잘 나타내는 상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회사는 이로움을 추구하는 곳이니까요. 하지만 그때 동훈은 이야기합니다. “회사는 기계가 다닙니까? 사람이 다니는 곳입니다!” 어떤가요?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리나요? 이 말이 여러분에게는 어떻게 다가옵니까? 드라마의 마지막에 다다랐을 때, 쓸모의 관점에서 가치가 없었던 인물 지안은 그런 지안을 그저 인간으로서 긍정해 주고, 옹호해 주는 동훈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건넵니다. “살면서 사람이 뭔지 처음 본 것 같았어요.”


 저는 이 드라마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린 까닭이 여기 있다고 생각합니다. 안 보신 분이 있다면 꼭 한번 보기를 권해봅니다. 기계 세상 속에서 기계로 취급받고 기계로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인간으로 대우받고 인간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아니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하게 인간으로 살기를 바라고 그리워합니다. 차가운 기계 사회 속에서 기계처럼 사는 것을 그 어떤 인간도 원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본래’ 뜨거운 피가 흐르는 생명이니까요. 저는 이제 물어보고 싶습니다. 인간처럼 살고 싶다는 저의 바람은 이상한 소리인가요? 인간이 더불어 사는 사회를 꿈꾸는 것은 허무맹랑한 바람인가요? 인간이 인간처럼 살고, 인간과 함께 더불어 살고자 하는 바람과 마음은 현실이라는 것에 가차 없이 짓눌려야 하는 건가요?


 생명과 사랑의 꿈


    하지만 앞서 말했듯 저의 비장한 꿈과 바람은 현실이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 허망할 뿐입니다. 거대한 파도가 휩쓸어간 자리에는 그 어떤 신념도 정신도 의도 남지 않습니다. 인간처럼 무엇인가를 꿈꾸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버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언제나 무시할 수 없는 것은 ‘현장성’이니까요. 현장은 책상과 다릅니다. 언제나 책상에서는 한두 가지이지만, 현장에서 실제로 일해보면 열 가지도 넘습니다. 머리는 하나지만 손과 발은 네 개나 되지 않습니까? 제가 경험한 현장도 쉽지 않았습니다. 현장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해보기는 커녕 누군가에게 이를 말하는 것조차 쉽지 않습니다. 함께하는 사람 몇이라도 있으면 좀 괜찮을 텐데 여전히 내게 돌아오는 말은 너무 어리다는 말과 너무 이상적이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요즘 저의 지향이 걱정됩니다. 무엇 하나 손 쓸 수 없음을 느끼곤 합니다. 가끔은 이대로 현실의 큰 파도가 나 또한 덮쳐주기를 기다리는 제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한달까요. 이럴 때면 오히려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이 외로운 길은 과연 옳은 길일까.’


 생명과 사랑을 향해 걸어가는 발걸음이 당당하기 어려운 오늘, 모진 폭력과 추태한 욕망 속에서도 꿋꿋하게 옳은 길을 향해 걸어가신 한 분을 떠올려 봅니다. 자신을 따르던 제자들도 죽음의 두려움 앞에선 뿔뿔이 흩어지는데, 어찌 그리 당당하게 그 길을 마저 걸어갈 수 있었던 건지요. 혹 그 길을 홀로 걸으시기에 외로우시진 않았을는지요. 참되고 의로운 그분의 삶과 그분의 걸음은 머리 둘 곳 하나 없는 여정이었고, 핍박과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괴롭고도 외로운 길이었겠죠. 그럼에도 그분은 생명과 사랑을 향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현실 앞에서 등 돌린 그 길 위에서도 담담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걸어가신 그분의 결말은 생명과 사랑은 결국 폭력과 욕망에 삼켜질 뿐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분의 결말은 우리 눈에 보기에도 처참하기 그지없었으니까요.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 시대의 모든 폭력과 모든 욕망을 투영한 잔인함의 상징 ‘십자가’가 그분의 외로운 그 걸음으로 인해 오늘날까지 세상의 모든 곳에 생명과 사랑을 싹 틔웠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의 걸음이 폭력과 욕망 속 생명과 사랑을 만들었고, 그 생명과 사랑이 세상을 살게 했습니다. 생명과 사랑이 세상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생명과 사랑이 폭력과 욕망을 집어삼키는 진리의 사건이자, 기적의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종려주일, 그분을 외롭게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분과 상관없는 자가 되지 말아야겠다고 다시 다짐합니다. 물론 여전히 현실은 막막하고, 지향은 끊임없이 흔들리며, 무엇이 실제적인 행동인지 아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지향은 있으나, 불안의 숙명을 끌어안고 갈 바를 알지 못한 채 꿈틀댈 뿐이죠. 하지만 그중에도 한 가지 큰 위로가 되는 것은, 생명과 사랑으로 향하는 이 길이 결코 틀리지 않았다는 것, 원래 이 길은 외로운 길이라는 것을 그분이 직접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홀로 걱정과 불안 속에 걸어가고 있는 줄 알았지만, 앞서 가시고, 지금 동행하시는 분이 계시다는 것을 오늘 주님의 현존 가운데 다시 느낍니다. 너무 두려워하지 맙시다. 생명과 사랑을 향해 담담히 걸어가셨던 그분을 기억합시다. 생명과 사랑을 향해 걷는 이 길은 결코 틀릴 수 없습니다. 길과 진리와 생명을 향해 가는 우리네 삶에 주님의 은총이 함께할 것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고 너희에게 말했겠느냐?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 내가 가서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나에게로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겠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도마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우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요 14:1-6)


2023년 4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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