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육의 기술
글쓰기에는 여섯 개의 발이 필요합니다. 물론 이 말은, 걷기에는 두 개의 발이 필요하고 글쓰기에는 여섯 개의 발이 필요하다, 라는 뜻은 아닙니다. ‘발’로 시작하는 여섯 개의 단어가, 단어가 가리키는 개념이, 과정이, 작업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용어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체로 글쓰기 과정은 계획, 생성, 구성, 표현, 수정의 5단계로 설명합니다. 저는 글쓰기 과정을 여섯 개의 발로 한번 설명해 보겠습니다. 기존의 설명과 일부 겹치는 내용도 있겠지만 다른 정의와 새로운 주장을 시도해 보려고 합니다.
글쓰기에는 6개의 발, 즉 발동, 발췌, 발달, 발설, 발작, 발효가 필요합니다. 발 하나하나를 제대로 설명하려면 별도의 글 여섯 편이 필요합니다. 그건 앞으로 시간을 갖고 차차 하나씩 쓰도록 하고 이번 글에서는 최대한 간략하게 소개하는 정도로 설명하겠습니다.
우선 발동이 필요합니다.
발동은 글쓰기에서 가장 먼저 필요한 과정이면서 가장 중요한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발동을 건다는 것은 작가 모드로 전환하는 일입니다. 작가를 자처하는 일입니다. 작가가 되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글을 쓰기 위해 먼저 작가가 되어야 합니다. 작가로서 세상과 나를 마주 보고 돌아보는 거죠. 작가라는 자의식의 스위치를 켜고 호기심과 비판의식의 예리한 안테나를 세웁니다. 마치 민감한 짐승처럼 신경을 곤두세우고 오감을, 자신의 존재 전체를 활짝 여는 거죠.
소설가 배수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을 작가로 조성하는 일, 이것은 작가의 일생의 일이며, 글을 쓰고 있지 않더라도 계속해서 진행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어떤 점에서는 글 쓰는 행위 자체보다도 작가적인 것이다.”
다음은 발췌입니다.
사전에는 발췌를 책이나 글에서 중요하거나 필요한 부분을 가려 뽑아내는 일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저는 좀 더 넓게 사용하고자 합니다. 책이나 글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에서 중요하거나 필요한 것을 가려 뽑아내는 작업을 발췌라고 하고 싶습니다. 가령 발췌를 전제하고 책을 읽으면 좀 더 꼼꼼하고 깊게 읽을 수 있듯 발췌를 전제하고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의 표정, 몸짓, 말 하나하나에도 집중하게 됩니다. 그의 눈가의 희미한 흉터나 속눈썹의 그림자, 웃을 때 생기는 외보조개, 햇빛에 반짝이는 주근깨를 알아보게 되겠지요. 그의 사소한 버릇, 말투, 태도와 자세도 알게 됩니다. 그가 말하는 것은 물론 끝내 말하지 못하는 것까지 알아차립니다. 그러니까 발견과 발굴은 발췌의 결과입니다. 인용도 마찬가지고요.
세 번째는 발달입니다.
발췌한 것을 발달시켜 봅니다. 하나인 것을 둘이나 셋으로 나누기도 하고 전혀 관련 없는 것들을 연결하기도 합니다. 축소도 하고 확장도 해봅니다. 마치 찰흙처럼 마음껏 주무르는 거죠.
얼마 전에 지바 마사야의 <공부의 철학>을 읽었는데 글쓰기에 참고할 내용이 많았습니다. 특히 공부의 방법론으로 제시한 아이러니와 유머는 글쓰기 발달에 적용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간략히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일본의 ‘만자이’는 ‘츳코미’와 ‘보케’ 역할을 각각 맡은 두 사람이 콤비가 되어 만담을 하는 코미디입니다. 지적하는 ‘츳코미’가 아이러니를, 바보인 ‘보케’가 유머를 담당하는데, 아이러니가 깊게 파고들어 아예 판 자체를 뒤집는다면, 유머는 다른 시각, 엉뚱한 발언으로 이야기를 겉돌게 만듭니다. 이처럼 깊게 파고드는 아이러니와 전혀 엉뚱한 곳으로 눈을 돌려보는 유머는 글쓰기를 성장시키고 새롭고 풍부하게 만들 것입니다.
네 번째는 발설입니다.
혹시 성대모사의 달인 쓰복만 선생을 아시나요? 쓰복만 선생은 원래 성우인데 성대모사를 아주 잘한다고 합니다. 한 번은 방송 진행자가 쓰복만 선생에게 “그렇게 성대모사를 잘하려면 역시 관찰력이 필요하겠지요?”라고 물었어요. 그때 쓰복만 선생이 이렇게 말합니다. “관찰력도 분명히 중요하죠. 그런데 무엇보다 많이 뱉어봐야 돼요.”
글쓰기 역시 많이 뱉어봐야 합니다. ‘뱉는다’를 다른 말로 하면 외부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니까 내 안의 생각과 감정을 ‘바깥으로’ 내어놓는 일이죠. 낙서나 메모를 하는 것, 리스트를 작성하거나 무엇인가 그리는 것, 혼잣말을 해보는 것, 사람을 만나 대화하는 것이 모두 외부화입니다. 저는 외부화를 발설이라고 부릅니다.
매기 넬슨은 발설의 효용을 이렇게 말합니다. “실제로 쓰지는 않으면서 블루에 대한 책을 쓴다고 말하고 다니는 게 즐거웠다.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하면, 이런저런 사람들이 블루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실마리를 쥐여주거나 선물을 준다.” 나아가 매기 넬슨은 그런 사람들을 현장에서 블루에 관한 리포트를 전해주는 자신만의 블루 특파원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그는 블루에 관한 240편의 아름다운 에세이로 이루어진 <블루엣>을 썼습니다.
다섯 번째는 발작입니다.
초고를 쓴다는 건 마치 발작을 일으키듯 집중해서 단숨에 파죽지세로, 글을 쓰는 자신도 어쩔 수 없는 무시무시한 기세로 써버리는 걸 말합니다. 발작할 때 그 순간만은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그 무엇의 간섭도 받지 않습니다. 아니, 볼 수도 받을 수도 없습니다. 이런저런 규범과 도덕과 법도 따라오지 못합니다. 제가 초고 쓰기의 기술에 대해 쓴 ‘사흘 만에 독창적인 작가가 되는 법’이란 글을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https://brunch.co.kr/@kimidada/20
레이먼드 카버는 ‘글쓰기에 대해’라는 글에서 이렇게 썼어요. “시작하고, 끝낸다. 어슬렁거리지 않는다. 앞으로 나아간다.”
마지막은 발효입니다.
글을, 글쓰기를 고요의 시간 속으로, 망각의 서랍 속으로 밀봉해 넣어둡니다. 스스로 발효되어 글맛이 익을 때까지.
실제 글쓰기의 과정은 명확하게 구분되지도 않고 또 순차적이지도 않습니다. 가령 첫 번째 발동은 글쓰기 과정 전체에 걸쳐 필요하며 네 번째 발달은 여섯 번째 발효 후에 다시 필요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여섯 개의 발은 글쓰기 과정 처음부터 끝까지 수시로 혹은 동시에 모두 작동되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또 어쩌면 글쓰기의 과정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각 과정을 이렇게 분리해 놓는 일은 글쓰기의 생명을 빼앗는 어리석고 끔찍한 짓인지도 모릅니다. 그런 의심과 두려움을 안고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