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의 기술
사람마다 글이 잘 쓰지는 장소가 있겠지요. 어떤 사람은 주위에 사람들이 있고 적당한 백색소음이 있는 카페가 글쓰기에 가장 좋은 공간이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독서실처럼 조용하고 밀폐되고 독립적인 곳에서만 글이 쓰진다고 합니다. 저는 초고의 경우는 주로 출근하는 버스 안에서 많이 썼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초고를 끝내야 한다는 시간의 제약이 더욱 집중하게 만드는 것 같았어요. 버스 안이라는 공간의 제약도 있어서 노트북이나 노트보다는 휴대전화기의 메모에 글을 썼는데 초집중할 수밖에 없었지요. 물론 글은 엉망이었지요. 오타도 많았고요.
그렇게 쓴 초고를 사무실에 도착한 다음 PC에 옮기며 고쳤습니다. 고치고 또 고쳤어요. 지금은 퇴직했지만 회사 다닐 동안엔 출근시간보다 대략 두 시간 정도 일찍 출근해서 글을 썼습니다. 사실은 글을 썼다기보다 글을 쓰려고 애를 썼다고 하는 편이 정확하겠지요. 회사 일을 마치고 퇴근해 집에 돌아오면 가족이 모두 잠든 한밤중 부엌 식탁에 앉아 다시 글을 썼습니다. 역시 글을 썼다기보다 애를 썼던 거지만요. 아래 붙이는 글 역시 오래전에 부엌 식탁에서 썼던 글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기 훨씬 전에 있었던 일이므로 그 점 감안해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 사람은 식구들이 다 잠든 한밤중에 부엌으로 나온다. 부엌 불을 켜고 식탁에 앉는다. 배가 고픈 것일까? 그럴 수도 있다. 보통 때의 그는 라면이라도 하나 끓여서 김치와 함께 먹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다르다. 그는 부엌 식탁의 불빛 아래에 앉아 노트북을 펼친다.
며칠 전 그는 식당에서 고등학교 동창을 만났다. 2학년 때인가 같은 반을 했지만 그다지 친한 편은 아니라서 졸업 후에는 따로 만난 적이 없었다. 30년의 시간이 흘러간 셈인데 그는 뒷모습만 보고도 단박에 동창을 알아본다.
“혹시 **고등학교 나오지 않았어요?”
동창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런데 누구시죠?’라는 표정으로 그를 본다. 그는 동창의 기억을 돕기 위해 숱 없는 머리와 수염 난 입 쪽을 두 손으로 가린다.
“이래도 나 모르겠어?”
“아, 알겠다. 무슨 일 하냐?”
그는 대답 대신 명함을 건넨다. 동창은 그의 명함을 받아 쓱 보더니 셔츠 호주머니에 집어넣는다. 동창은 실망한 표정을 감추지 않는다.
“너 시인이 된다고 하지 않았나?”
“시인은 뭐 아무나 되나.”
“넌 시인이 될 줄 알았는데.”
그와 동창은 서로의 근황과 아이들 이야기와 각자가 연락하고 지내는 동창들 이야기를 나눈다. ‘조만간 꼭 술 한잔 하자’라는 지키지도 않을 약속을 몇 번이나 한다. 헤어질 때 동창은 또 말한다.
“넌 시인이 되었어야 하는데.”
시인이 되었어야 하지만 시인이 되지 못한 그는 식구들이 모두 잠든 한밤중 식탁에 앉아 깜박깜박하는 커서를 바라본다. 어쩌면 그는 어릴 때 글쓰기 시간에 칭찬을 받았을지 모른다. 놀러 간 친구네 집에서 친구의 누나들이 읽던 시집과 소설책을 읽으면서 자신도 나중에 그런 글을 쓰는 사람이 되는 꿈을 꾸었는지 모른다. 중학교 때 교생실습 나온 예쁜 선생님이 추천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고 그런 꿈이 결심으로 바뀌었는지도 모른다. 고등학교 때는 문예반에 들었는지도 모르고, 백일장이나 대학문학상 같은 데서 상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그런 것들이 동창의 기억 속에 그를 ‘시인이 되었어야 할 녀석’으로 새겨 놓았을 것이다. 사실 동창의 기억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자신의 마음 깊은 바닥에 꾹꾹 눌러놓은 ‘글 쓰기’에 대한 욕망이다. 그래서 그는 출퇴근 버스 안에서 책을 읽으면서 그 납작한 욕망을 책갈피처럼 만지작거리는 것이다.
"많은 처녀작은 한밤중에 부엌의 식탁에서 써진다
오늘도 그는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란 책 속에서 무라카미 하루키가 인용한 크레이그 토마스의 문장을 읽었다.
“많은 처녀작은 한밤중에 부엌의 식탁에서 써진다.”
그러고는 마치 한밤중 부엌의 식탁에 앉기만 하면 당장이라도 처녀작을 쓸 수 있을 것처럼 그는 식탁에 앉아있다. 무엇을 쓸까?
적어도 부엌에서 쓰는 글은 밥처럼 든든한 글이어야 할 것이다. 아베 야로의 만화 ‘심야식당’의 마스터가 내놓는 ‘어제의 카레’처럼 위로와 격려가 되는 글.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에 나오는, 오븐에서 막 구워낸 따뜻한 계피롤빵처럼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그런 처녀작을 써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앉아 있어도 처녀작은 쓰이지 않고 어렸을 때 그가 만났던 처녀들만 생각난다.
아내가 오줌 누러 나왔다가 부엌에 있는 그를 보고 묻는다.
“뭐 해? 안 자고.”
그는 글을 쓰는 체하며 이렇게 말한다.
“나도 처녀를 좀 써 보려고.”
위의 글을 쓸 때는 몰랐는데 지금 보니 '처녀작'이란 표현은 성차별적 말이라 다른 말로 바꾸는 게 낫겠습니다. 그런데 대체할 말로 '데뷔작'이 떠오르지만 딱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바꾸게 되면 아예 글 전체를 수정해야 할 것 같아 일단 그냥 두었습니다. 혹시 나중에 기회가 되면 바로잡도록 하겠습니다.
지금도 저는 부엌 식탁에 앉아 글은 쓰지 못하고 애만 쓰고 있답니다. 언젠가 저도 훌륭한 첫 작품을 쓸 수 있을까요? 어쩌면 이렇게 시간만 보내다 끝내 본격적인 작품은 쓰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아마 그럴 가능성이 훨씬 높겠지요. 그렇지만 어쩌겠어요. 이 시간을, 이 공간을 제가 사랑하는 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