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가 매우 작았던 우리 할머니는 매우 큰 사람이셨다. 할아버지 병환으로 서울대 병원에 입원하셨을 적에도 우리 할머니는 그 큰 병원의 병동을 돌아다니며 친구를 만드셨다. 다른 할머니들과 네가 크냐 내가 크냐 키재기도 하셨다. 병원에서도 가장 키가 작았던 우리 할머니는 목소리만큼은 제일 컸다.
우리 할머니는 이름대신 하00 덕(댁)이라 불렸다. 나는 000 덕이라고 불리는 할머니들의 커뮤니티가 참으로 신기했다. 이름을 두고 000 덕 000 덕이라고 하는데 그 말이 왜 이리 우습던지. 하여간 우리 할머니는 다른동네서 할아버지께 시집을 왔고, 그렇게 우리 아빠를 비롯하여 다섯 남매를 두셨다. 쌀농사를 지으시던 우리 할아버지 곁에서 밭일을 돕던 우리 할머니는 꽃을 좋아하고. 이미자를 좋아하고, 인근 모든 축제는 동네 할머니들을 모아 택시를 타고 그렇게 놀러 다니시길 좋아하셨다. 그리고 중요한 행사가 있는 날에는 투피스 정장을 입고 모자를 쓰는 것을 좋아하셨다.
나와 내 동생은 주말이면 엄마 아빠와 함께 그리고 방학이면 둘만 할머니댁에 보내졌다. 가끔은 어린이날에도 그리고 엄마가 바쁠 때면 소풍도 나는 할머니와 함께했다. 겨울이 되면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밥을 해주셨다. 할머니는 부지깽이로 불을 살피며 동생과 나에게 노래를 해주셨다. 들어보지 못했지만 흔히들 얘기하는 꾀꼬리 같은 목소리의 할머니 노래는 듣기가 좋았다. 노래를 듣고, 재와 함께 불씨가 남아 있던 그 모습을 기억한다. 그리고 나뭇가지와 나뭇잎이 타는 냄새는 뭐라 아직까지도 형언할 수가 없다. 집 마당에서 불멍을 할 때와는 또 다른 냄새. 밥이 되어 뽀얀 김이 올라오는 그 솥에서 퍼서 밥을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증조할머니와 함께 먹곤 했다. 식사를 마치고는 스테인리스 대야에 할머니는 아궁이에서 덥힌 물을 담아주셨고, 나와 동생은 아이보리 비누로 세수를 하고 그렇게 겨울밤을 보냈다.
시골 할머니지만 우리 할머니는 그렇게 똑똑 새가 아닐 수 없었다. 심심해를 입에 달고 사는 나와 동생을 위해 방학이면 서울 나들이를 했다, 시집간 고모집으로 서울에 취직한 삼촌 자취집으로 우리는 그렇게 놀러 다녔다. 지하철도 얼마나 잘 타시는지.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우리 할머니는 정말 똑 부러졌다.
할머니는 당시 여느 할머니들과는 달랐다. 장남인 아빠가 딸 둘을 낳았을 때에도 엄마에게 요즘은 딸들이 효도한단다라며 엄마에게 단 한 번도 아들을 요구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우리 장손녀~하며 할머니 할아버지의 잘한다 잘한다 하는 격려와 무한한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고, 어찌 보면 질풍노도의 시기를 크게 겪었던 내가 비 뚫어지지 않고 담담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살 수 있는 밑바탕이 되지 않았다 싶기도 하다.
그렇게 키는 작지만 누구보다 목소리도 크고 당당하던 우리 할머니에게 아픔이 생겼다. 아빠의 사고. 할머니는 큰 아들이었던 우리 아빠를 할아버지를 설득하여 끝내 중학교부터 유학을 보냈다고 한다. 착실히 잘 살아왔던 아빠는 사업을 했고, 결혼을 했고, 그리고 나와 동생을 낳고 그리고 우리 둘을 끔찍하게 아끼며 그렇게 살았다. 낮에는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주고, 저녁에 줄넘기와 배드민턴을 함께 치고, 그리고 만화방에 가서 아빠는 무협지 나와 동생은 만화를 보곤 했다. 그리고 서점에 나와 동생을 데리고 책을 사주고 언제 어디서나 자랑스러운 미소를 지니며 딸바보로 살아왔던 그러던 우리 아빠는 사고로 증조할머니보다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보다 더 일찍 우리 가족의 품을 떠났다.
자식을 잃은 슬픔을 어디에 비교할 수 있을까. 우리 할머니는 한참 나와 동생을 보면 눈물바람을 보이셨다, 제사 때가 되면 가끔 눈물도 훔치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우리 할머니가 크게 슬퍼하는 기억이 없을 정도이니 그렇게 감정을 자제하신 것 같다.
결혼을 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서른다섯 살을 넘기고 결혼을 하겠다던 장손녀는 외국사람과 결혼하겠다며 데리고 왔다. 할머니가 보시기에도 착한 놈 같이 보였다. 까랑까랑 까칠한 나한테 그리 나빠 보이진 않았다. 할머니댁에 있던 하리가 꼬리 치며 반기는 걸 보고는 그래 우리 사람이다 싶었다고 하셨다. 하지만 얼마 전 고모는 할머니가 생전 내 앞에서 한 번도 내색하지 않으셨지만 아빠를 빨리 잃어 우리 손녀딸이 외국인하고 결혼하게 되었다고 속상해하셨다고 한다.
그렇게 나는 외국남자랑 결혼을 했다. 증손주를 보나 했는데 나는 일한답시고 증손주는 없다며 딩크로 살 꺼라고 그렇게 할머니께 호언장담을 했다. 부모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 하지 않았던가.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내가 오래오래 효도할 기회를 주지 않으시고 내 곁을 떠나셨다. 불효녀는 나중에야 할머니와 똑같은 닭띠 아이를 할머니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날인 음력 사월 초파일 석가탄신일에 낳았다. 가끔 내가 사는 곳에 와서 아이도 봐주는 우리 고모가 보기에는 조카손주가 할머니가 참 좋아할 요소들만 갖췄는데 하며 아쉬워한다. 그리곤 증조할머니 몫까지 키위를 사랑해 주겠노라고 얘기한다.
참 우리 할머니는 보라색을 좋아하셨다. 병원에 계신 할머니께 핫핑크색 가디건을 사다 드렸더니 마다하시고 보라색으로 바꿔달라 하셨다. 할머니가 좋아하는 색 하나 모르는 못난 손녀딸이 된 날이었다.
할머니와의 추억을 얘기하자면 너무나 많아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지 모를 정도였다. 그런데 이제 생생하게 기억하던 할머니의 모습도 그리고 할머니와의 추억도 내 나이 탓인지 아니면 지난 세월 탓인지 가물가물해져 가는 것 같기도 하다.
우연히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심윤경작가의 할머니와 우리 할머니의 성격은 조금 상이하나(우리 할머니는 나에게 온 사랑을 베풀어 주셨지만 너그러움만 있기보다는 당당하고 귀여운 할머니셨다) 나는 할머니의 가장 사랑하는 손녀딸(그랬으면 한다) 그리고 할머니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리고 멋진 할머니셨다.
내가 좋아하는 칼럼니스트 중 하나인 권석천의 사람에 대한 예의에서 그는 지상에 단 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있다면, 그러한 믿음을 그에게 심어줄 수만 있다면, 그는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고 했다.
나의 가족 그리고 특히 나의 할머니는 나에게 그런 사람이셨다. 누가 뭐래도 내가 세상에서 최고라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
할머니가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