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라 하기엔 조금 춥고 그렇다고 겨울이라 하기엔 조금은 이른 그런 날 나는 재연을 만나기 위해 제주로 향했다. 재연은 제주에는 아직도 반팔을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또 여름에 함께 갔던 새별오름에는 이제 억새가 가득하다고도 했으며, 겨울 냉기를 머금은 파도가 표선의 검은 바위에 하얗게 부서지고 낚싯바늘에는 간혹 갑오징어가 딸려 나오기도 한다고 했다. 나는 재연이 말해준 제주의 풍경과 날씨와 사람들 이야기에 가슴 설레하며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가끔 네가 제주로 떠났던 그해 겨울을 생각한다. 너는 망원동에 얻었던 전세 아파트를 정리하고 마련한 돈으로 제주에 작은 집 한 채를 샀다. 대출이 껴있었지만 생활하는 데 크게 불편은 없을 정도의 금액이라고 했다. 네가 집을 정리하고 한동안은 오피스텔에 살며 서울에서의 삶의 찌꺼기들을 조금씩 정리할 때였다. 냄비에 말라붙을 정도로 끓여 짜게 식어버린 김치찌개와 소주를 마시며 네가 말했다.
"지긋지긋해."
지긋지긋. 10여년의 서울에서의 직장 생활과 실패한 결혼, 남겨진 상처를 너는 그 네 글자로 끝내려 했다. 그리고 다음날 작은 승용차 한 대를 꽉 채울 만큼의 찌꺼기만 남긴 채 완도항에서 배에 차를 싣고 제주로 떠났다. 나는 네가 떠난 자리가 헛헛하기도 하고 마치 내가 서울의 찌꺼기라도 된 것만 같아 한동안 우울해했다. 몇 편의 짧은 생각들에 머릿속이 흐릿해질 때쯤 제주에 도착했다. 마중 나온다는 너를 찾기 위해 공항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저 멀리서 너의 모습을 발견했다. 제주에 함께 온 승용차와 그 앞에서 나를 발견하고 반갑게 손을 흔드는 네 모습에 기쁘면서도 왠지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서울은 춥지?"
"서울은 이제 막 패딩 입기 시작했다."
"어디부터 갈래"
"오름 한번 가볼까. 일단 집에 가서 짐부터 풀고 다시 나오자"
짐을 풀고 우리는 오름을 오르기로 했다. 작은 오름을 하나 오른 뒤 재연이 제주에 정착하고 알게 된 단골 횟집에 가기로 했다. 오름으로 가는 차 안에서 우리는 재잘재잘 잘도 떠들었다. 대학 생활 이야기도 하고 함께 마신 술과 함께 만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에둘러 가는 서울 이야기에 나도 굳이 그곳에서의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재연의 말대로 오름에는 억새들이 가득했다. 한여름 지독히도 짙은 초록의 빛으로 물들었던 오름이 몇 달 만에 이토록 시들어버린 것이 놀랍기도 하고 괜히 아쉽기도 했지만 잔잔한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샛노란 억새밭이 아름다워 한참을 서서 바라보았다. 빠르게 변하는 계절처럼, 금세 옷을 갈아입는 제주의 풀과 풍경처럼 그렇게 너도 금세 변하리라 생각하며 짧은 산행을 마쳤다. 재연은 바람이 좋아 파도가 예쁠 거라며 횟집에 가기 전에 표선에 잠시 들르자고 했다.
표선의 바다를 마주보며 길가에 차를 세워 두고 우리는 차 안에서 따뜻한 커피를 마셨다. 검은색 돌들 위로 부서지는 하얀 바다의 알갱이들이 안개처럼 날려 차 유리 위로 흩날리며 내렸다. 날리는 바닷물이 비가 된 것인지 원래 비가 내리기로 했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느새 하늘에서 옅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옛날에 우리 모임에서 영화 '소공녀' 같이 봤던 거 기억나냐"
뜨거운 커피를 살짝 불며 한 모금 마신 뒤 내가 재연에게 물었다.
"기억나지. 그거 보고 위스키 마시러 종로에 자주 갔잖아"
"그치, 그랬지. 근데 나는 있잖아. 그 주인공 누구더라."
"미소"
"그래 미소, 나는 그 미소의 삶이 도무지 이해가 안 갔어. 돈도 없는 애가 마지막까지 위스키 먹겠다고 그렇게 몸부림치는 게 도저히 이해가 안 되더라고. 근데 그때 네가 했던 말 듣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했지. 너 그때 했던 말 아직 기억하냐."
"내가 뭐라고 했는데?"
"네가 그랬어.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미소가 괜히 밉더래. 그래서 왜 미운가 시간을 두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그제야 어렴풋이 그 미움의 정체를 알겠다고 했지. 그때 넌 '그건 아마 내가 미소의 삶을 동경하고 있기 때문일 거야'라고 그렇게 말했어."
"아 그래. 기억났다."
기억났다는 말 이후로 너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은 채 따뜻한 잔을 들고 조용히 파도를 바라보았다. 영화 속 '미소'는 일자리도 잃고, 집도 잃고, 밥도 굶는 와중에 자신의 취향인 담배와 위스키와 남자친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돈이 궁해지면 가장 먼저 줄일 것들을 두고 자신에게 소중한 것이라며 끝까지 지키려고 노력하는 '미소'를 보며 많은 친구들이 그녀의 삶의 태도를 비난하고 비판했다. 하지만 재연만은 그런 '미소'의 삶을 동경한다고 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지도 모른다. 재연이 자신에게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 새롭게 줄 세우기를 시작한 때가. 그리고 자신의 삶이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낀 때가. 그 이후로 꽤 많은 시간이 흐르고 재연은 제주에 와 있다. 동경하던 삶의 한가운데에.
찌꺼기와 취향을 새롭게 줄 세우고 찾은 이곳에서 재연은 이제 만족할까. 아니 행복할까. 지긋지긋했던 서울에서의 삶을 버리고 아는 이 하나 없는 이 섬에 정착한 재연이 가끔은 낯선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바람도 새롭고 물도 새롭고 모든 것이 새로운 이곳에서, 나는 재연의 앞날이 샛노랗게 물든 억새처럼 살랑살랑 평온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