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롤로 Dec 04. 2023

여행 중에 만난 인연

얕은 오르막길 좌우로 노란 빛깔의 꽃들과 옅은 초록빛의 풀들이 늘어서 있었다. 바람은 따뜻하게 불어 풀잎과 나무를 살랑거렸고, 산 아래로 보이는 작은 마을과 쪽빛 바다는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와 이제 막 떠오른 아침 햇살로 밝게 일렁였다. 오르는 것이 산인지라 쌀쌀한 바람이 간혹 불어와 봄은 아직 올 생각 말라며 겨울의 기운을 계속해서 풍겼다. 하지만 산을 오르는 동안 해가 점차 떠올라 남아있는 겨울의 자취도 곧 사라지고 말았다. 


겨울이 저 산 너머 뒤안길로 사라져 가는 것을 본다. 해가 들수록 밝아지는 산 이쪽 능선 뒤로 겨울은 짙은 그림자가 조금씩 사라지듯 산 뒤로 넘어갔다. 차가운 바람과 어두운 하늘이 겨울이라면 밝은 햇살과 연녹색 풀잎과 노란 꽃망울은 봄 같았다. 나는 그해 유독 두텁고 어두운 겨울의 터널을 지났다. 이제 막 찾아온 봄이 반가워 활짝 창을 열까 싶다가도 워낙 두터운 터널을 지났던 기억에 창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한 길로 길게 난 좁은 길을 계속해서 따라 걸을 때, 문득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딱히 돌아보거나 멈출 생각 없이 걸음을 계속하고 있을 때 등 뒤로 아주 작게 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동해사(寺) 가시나요?"


들었음에도 듣지 못했다는 듯이,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알면서도 모르겠다는 듯 가던 걸음을 계속했다. 분명 사람의 목소리를 들었음에도 따스한 봄기운을 느끼며 산을 오르는 지금 이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끝내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뒤 다시 한번 목소리가 반복 됐다. 그제야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을 뺐다. 사방 고요한 적막 속에서 너의 목소리가 '짜랑' 하고 울린다. 


"혹시 동해사(寺) 가시나요?"

"아, 네 저도 동해사(寺) 가요."

"제가 헷갈려서 그런데 이 길로 쭉 가면 되는 거 맞나요?"

"네 저도 확인해 봤는데 가는 길이 하나라 쭉 가면 돼요."

"네, 감사합니다."


낯선 사람의 사사로운 말에도 너는 가야 할 길에 대한 확신을 느꼈는지 걸음을 내 닿기 시작했다. 곧 나를 따라잡고 앞서 걸었다. 나의 걸음이 그리고 너의 걸음이 이대로라면 우린 곧 작은 점이 되고 서로의 시야에서 사라질게 뻔해 보였다. 나는 오히려 그것이 편하다. 너에게 나의 쓸모는 이제 끝이 났으니 쓸모가 다한 나는 다시 마음 편히 걸음을 걸을 수 있다. 


네가 작은 점으로 멀어지고 나서야 머릿속에 모락모락 생각들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작은 접시가 있다. 접시는 하얀색 빛깔로 만들어졌는데 언제부터인지 노란색으로 초록색으로 보라색으로 물들기 시작하더니 이내 검은 빛깔이 되어버렸다. 흰색은 초록도 되고 파란색도 되고 보라색도 될 수 있었는데, 까맣게 물들고 나니 더 이상 다른 색이 되기를 포기해 버린 것 마냥 늘 까만 상태였다. 이제는 작은 접시의 색을 바꾸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했고 바뀌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마음 한편에는 어느 순간 하얀빛이, 노란빛이, 초록의 빛이 다시 접시에 물들기를 바라고 있었다. 


접시는 내가 진학에 실패했을 때, 취업에 실패했을 때, 누군가에게 상처받았을 때 조금씩 조금씩 어두운 빛으로 물들어 갔다. 안타깝게도 어두운 빛깔로 이리저리 색을 바꾸던 접시가 검게 되고 나서야 그것이 내가 감내할 수 있는 상처와 고통과 회한과 후회의 무게라는 것을 알아 버렸다. 너무 늦은 알아차림에 어찌해야 하나 잠시 망설일 때도 있었지만 언젠가는 밝은 빛을 찾으리라는 막연한 희망 같은 것을 안고 살았다.


접시에 대한 생각을 한참 하고 있을 때 저 앞에 예정에 없는 갈림 길이 나왔다. 그리고 그 갈림길 위에 네가 서 있었다. 너는 지도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지도에는 없었지만 지금 저 앞에 갈림길이 있었다. 분명 외길이어야 하는데 뜬금없이 나타난 갈림길을 너는 지도에서 열심히 찾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너의 지도에도 나의 지도에도 이 갈림길은 보이지 않았다. 너는 당황한 듯 보였다. 그런 너를 보며 쓸모를 다한 자는 또다시 쓸모가 생기는 것이 두렵기도 하고 어색한 대화의 시간이 다가올까 두렵기도 하여 눈에 띄게 걸음을 늦추며 다가올 갈림길과 너와의 조우를 최대한 늦추고 있었다. 느린 걸음이 무색하게 갈림길 근처에 다다랐을 때 또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 어디로 가는 줄 알아요?"


경험에 의하면 너의 목소리는 작지 않다. 이어폰을 빼자 네가 재차 물어본다.


"여기서 어디로 가는 줄 알아요?"


'짜랑'거리는 목소리에 숲과 나무에 숨어 있던 새들이 솟아오를 것만 같다.


"아... 저도 갈림길 얘기는 못 들었는데, 혹시 지도에 안 나와 있나요?"

"아뇨, 지도에도 없어요. 새로 생긴 길인가 봐요."


네가 확인해 보라는 듯이 건네준 지도를 한참 살펴보았지만 사실 나도 이미 이 갈림길이 지도에 없는 길이라는 것을 안다. 난감한 얼굴을 한 채 양갈래 길을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있는 모습이 못 미더웠는지 너는 지도를 다시 가져가 요리조리 살펴본다. 하지만 답이 나올 리 없다. 따뜻한 햇살이 등 뒤로 내려쬐는 봄날의 아침에 양갈래 길을 맞이한 두 사람은 왼쪽으로 가야 할지 오른쪽으로 가야 할지 한참을 망설이고 있었다. 둘이 나눠 하나씩 다른 길로 가보자고 해볼까. 아니면 되돌아 내려갈까 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 네가 말했다.


"저희 왼쪽길로 같이 가볼래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의 작은 접시에는 '짜랑'하고 노란색 물방울 하나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매거진의 이전글 붕어빵 이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