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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엔 Nov 20. 2020

역삼역 3번 출구로 도망친 여자

25세부터 31세까지 약 7년 동안 직장에 다녔다.

첫 직장은 1년 정도 다녔는데 사장님 한 분과 나까지 직원이 두 명인 작은 무역 회사였다. 일도 셋이 했고 회식도 셋이 했다. 사장님이 나가면 둘이서 사장님 흉을 보았다.

두 번째 회사는 음악 관련 컨텐츠를 제작하는 회사로 직원이 100명 정도 되는 그래도 좀 큰 회사였다. 일개 직원이 사장님을 대면할 일은 거의 없었고, 내 또래 여직원들과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며 무려 6년이나 팀장을 욕하면서 다녔다.

전혀 관계가 없는 이 두 회사는 공교롭게도 모두 역삼동, 게다가 같은 블럭, 비슷한 골목 어딘가에 위치해 있었다. 테헤란로의 한 골목만 7년을 드나들었던 것이다. 역삼역 3번 출구로만 7년을 출퇴근 한 거다.


첫 회사를 들어가기 전 구직을 할 때만 해도 '역삼동', '테헤란로'라는 곳은 대한민국 최고로 잘 나가는 샐러리맨과 커리어우먼들이 당당하게 워킹하는 런웨이 같아 보였다. 면접을 보고 돌아가는 길에 '내가 과연 이 거리를 저들과 함께 활보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풀이 죽었지만, 그래도 면접을 위해 정장 차림을 한 나를 누군가는 이 역삼동의 멋진 직장 여성으로 봐주지 않을까 하는 약간의 기대를 안고 집으로 돌아갔던 것 같다.


기대가 현실이 되어 나는 역삼동의 커리어우먼이 되었다. 비록 나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역삼역을 빠져 나온 수천명의 다른 직장인들 중 절반은 대로변 번쩍이는 큰 건물로, 나머지는 그 다음 골목의 좀 덜 큰 건물로 들어가버리고, 서바이벌 게임 우승자라도 된 듯 나만 마지막까지 살아 남아 골목의 골목을 지나고 모퉁이를 두어번은 돌아야 나오는, 직원이 두 명 뿐인 어느 작은 건물의 사무실로 출근하긴 했어도. 빌딩숲 끄트머리 어딘가라 하더라도 그 곳 역시 내가 꿈꿔오던 역삼동이었다. 강남의 한복판이었다.

테헤란로


처음 직장 생활을 시작했을 때는 점심 시간마다 매일매일 메뉴를 바꿔 이 식당 저 식당 가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학생 식당의 균형 잡힌 식판밥이 모범생의 식사였다면 이 테헤란로에서 사먹는 점심밥은 진짜 어른들의 밥 같았다. 학생과 직장인의 차이는 '점심 메뉴'인게 틀림없었다.

오전 11시 30분이면 이미 상이 다 차려져 있던 어느 건물 지하의 동태찌개집, 드럼통 위에 둥근 쟁반을 얹은 모양의 테이블에서 먹던 생선구이집, 직원들 뿐 아니라 그 근방 회사 대표들도 자주 출몰할 만큼 짬뽕이 특히나 유명했던 중국집, 점심 시간에 가면 이미 늦어 대기줄을 서야 했던 순대국집, 손님 모두가 메뉴판도 보지 않고 제육볶음과 김치찌개를 주문하던 백반집 등.

첫 직장의 사장님과 오대리 언니는 이렇게 역삼동의 화려한 점심 메뉴의 세계로 나를 안내했다.


회식은 또 어떤가.

회사 건물에서 나와 모퉁이만 돌면 있던 바로 옆 골목의 등뼈찜 식당, 퇴근길 집에 가기 싫은 영혼들이 삼삼오오 모이던 근처 치킨집, 우리 사장님이 사실은 그 가게 사장인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참으로 지속적으로 가던 삼겹살집(심지어 점심엔 거기서 백반을 먹곤 했다)...

사장님이 큰 맘 먹고 한우를 사주신 날을 기억한다. 단 한번 뿐이었기 때문에. 오대리 언니가 내 귀에 속삭였다. 한우를 먹을 땐 공기밥도 시키지 말고, 쌈도 싸먹으면 안된다고. 테헤란로 커리어우먼은 그렇게 한우를 배웠다.


이렇게 많고 많은 메뉴들 중 어떻게 하루에 한 가지만 고르나, 하는 행복한 고민의 기간은 오래 가지 못했다. 1년도 되지 않아 그 골목 모든 메뉴가 지겨워졌다. 그 회사를 다니던 마지막 무렵엔 속이 안 좋다는 핑계를 대고 길건너 스타벅스에 앉아 카페라떼 한 잔으로 혼자 점심을 떼우던 날이 많았다.

스물다섯살의 내 여리여리한 식도는 40대 후반의 사장님을 따라다닐만큼 얼큰한 국물을 원하지 않았다. 젊다못해 새파랬던 내 위장은 역삼동 커리어우먼에게 어울리는 세련되고 산뜻한 점심을 원했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점심메뉴에 지쳤던 게 아니라 전직원 셋의 조그만 회사, 엘리베이터도 없는 건물, 4층 사무실을 걸어서 오르내리던 그 작은 회사의 초라함에 실망했던 게 아닌가 싶다. 내가 설 자리는 역삼동이라는 삐까뻔쩍한 무대 뒷편인 것 같아 기가 죽었던 것 같다.


그렇게 첫 회사생활이 지루해지고 역삼동 뒷골목에 따분해 질 때 즈음 두번째 회사로 이직하게 되었다. 대로변은 아니었지만 역삼역 3번 출구로 나와 한 번만 꺾어 들어가면 되는 꽤 큰 건물이었다. 이제서야 진짜 테헤란로에서의 직장 생활다운 직장 생활을 하게 됐구나 하는 기대에 들떴었던 것 같다. 도대체 어떤 직장 생활이 진짜 직장 생활이라고 상상했던 건지 잘 기억이 나진 않지만 적어도 9층 사무실까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고, 직원카드로 삑- 소리를 내야 문이 열리는 입구가 있고, 여러 종류의 음료가 갖추어져 있는 데다가 커피까지 내려마실 수 있는 탕비실이 따로 있다는 것은 나의 직장 생활의 새로운 제2막이 올라간 거라 확신했다.


하지만 그 확신의 기쁨은 잠시, 새 회사 사람들 역시 그 동태찌개 집에 열광하고, 그 생선구이집에 우르르 몰려가며, 그 순대국집에 줄을 선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그 때 느낀 허망함은 몇 년 째 같은 색연필을 생일 선물로 받았다고 실망하는 어린 아이 같은 마음이었다.


큰 회사로 옮기고도 같은 점심 메뉴, 뻔하디 뻔한 회식 장소에서 6년을 더 먹고 떠들었는데 그 지루함을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땐 중간중간 탈출을 시도하기도 했다. 기회가 되면 몇몇 여직원들과 당시 스타타워(후에 '강남파이낸스센터'로 명칭 바뀜) 지하에 새로 생겼다는 샐러드바에 가서 비싸고 우아한 점심을 먹었고, 큰 길 건너 고급진 베이커리 카페에서 커피와 케이크로 밥을 대신하기도 했다. 소화제 한 알로 고비를 겨우겨우 넘기는 만성 소화불량 환자처럼.


퇴사할 때 즈음엔 테헤란로에 아무런 로망도 미련도 남아있지 않아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역삼역 3번 출구로 쌩하니 들어가버렸다. 나는 그렇게 역삼동을 떠났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남편의 회사는 역삼동이다. 코로나로 재택 근무한지 10개월이 된 남편이 가끔 불가피하게 회사로 출근해야 할 때가 있다. "오늘 점심은 회사 앞에서 수제비 먹어야지!"라며 뒷모습 마저 신난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나도 휴대폰을 들고 역삼동을 검색해본다. 지도앱을 열고 로드뷰로 찾아가본다. 그 동태찌개집을, 그렇게도 벗어나고 싶어했던 역삼동의 골목골목을..

하지만 분명 주5일을, 7년을 지겹도록 가던 그 식당이, 회사 사람들과 나누었던 그 무수한 이야기들이, 로드뷰로는 도저히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그 이유는 그 때 먹던 점심 한끼에도 온전히 마음을 다하지 못해서였던 것이 아닐까.


직장 생활이라는 것은 타이트 스커트에 하이힐 신고 멋진 빌딩숲을 또각또각 잘난 척 하며 걸어다니는 것이 아니다. 매일 같은 시간에 한 건물로 들어가 어제 했던 일과 다를 바 없는 일거리들을 끝도 없이 마주하고 견뎌내는 것이 직장 생활인 거다. 15년이나 지난 지금 이걸 깨달았다니 나의 배움이란 이렇게 늘 한 발씩 늦다. 그 때 그걸 알지 못하고 '흥, 알고보니 여기 별거 없네!'하고 도망치려만 했던 철없던 내게 이야기 해주고 싶다.

"앞으로도, 어딜가도 별 것인 곳은 없어."라고.


엄마를 찾는 아이들 아우성에 정신 못차리고 밥해주고 먹이고 청소를 하고 학원에 데려다주고 씻기고 책읽어주고 또 밥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는 지금의 이 생활을 나는 또 벗어나고 싶어 하고 있다. 십 몇년 전 역삼동을 벗어나고 싶어했던 것처럼.

하지만 그 때와 다른 것은 지금은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언젠가 출구로 이 곳을 빠져나가게 되는 날은 분명히 올 거고, 그보다 시간이 더 지나면 지금 이 시간을 그리워하면서 사진을 찾아보고 동영상을 찾아보게 될 날이 온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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