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5 (열다섯 번째 서평)
시내의 약속 장소에 일찍 도착하여 약속한 시간까지 무료하게 보내야 할 때면, 가장 반갑게 눈에 띄는 간판은 역시나 서점이었다. 스마트폰 속 세상이 나를 수시로 이끌어 그 안으로 빠뜨려 버리기 전까지는 늘 그랬다. 하지만, 책을 읽는 것과 가까이하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다. 읽는 것은 일종의 패턴과 리듬이 있어서, 미친 듯이 글자에 빠져있을 때는 일주일에 네댓 권씩 읽기도 하지만, 대략 한두 달 간의 그 흐름이 지나면 한 달에 한 권 읽기도 힘든 아주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온다. 확실히, 지난 5,6월에 내 독서량이 그랬고, 지금 12월에 와서 아직 한 권도 완독 하지 못한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누군가가 나에게 전한 말이 더 생각나는 날이다.
맨날 그런 재미없는 책만 보니 그렇지.
잠시 그 누군가가 전한 조언(해답? 원인 분석? 치료법?)대로 재미없는 것들을 잠시 멀리한다.
(나에게는 여전히 가장 재미있는 것들이지만) 경제, 역사, 정치, 인문 따위의 책을 잠시 멀리하고, 그 누군가가 건네준 표지가 이쁜 책을 들어본다.
좋은 글이란 뭘까?
좋은 글이 차고 넘치는 이 세상에, 그리고 딱 맞는 근사한 이미지까지 더해 친절하게 설명까지 해주는 글이 넘치는 이 세상에, 이런 원초적인 질문이라니..
배려를 받는 느낌에 미소가 그려지는 그런 책이다. 이해하지 못할 어려운 말이 없고, 설령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어서 이해하라고" 강요하지도 않는다.
따뜻한 온기가 남아있는 그런.. 생각해보면 편지는 늘 따뜻하다. 편지를 통해 미움과 분노를 표현하는 적은 거의 없다. 있다 해도, 그 미움과 분노는 종이가 채워질 때면 늘 그렇듯 눈 녹듯이 사그라져 있다.
디지털이라는 속도와 익숙함을 전제로 구현되고 있는 지금 우리의 언택트 세상에는 이런 따뜻함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진실과 거짓의 차이에서 누가 더 자극적인지에 의해 분노가 모이고, 그 분노가 좋은 연료가 되어 여기저기서 팡~팡~ 터진다. 터지고 난 후에는 터지기 전의 진실과 거짓의 증명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고, 비난과 미움만이 남아서 또 다른 연료를 만들어 낸다.
SNS에서의 댓글이 소통이 전부가 되고, 팔로워 숫자가 내 전부가 된다. 팔로워 숫자가 내 인간관계와 나란 사람의 프로필이 되는 풍족한 세상이지만, 정작 내가 필요로 할 때 내 주변엔 아무도 없음을 느낀다.
그런 세상이기에.. 그런 시대이기에..
"타인에게 별생각 없이 건넨 말이 내가 그들에게 남긴 유언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그래서 사람을 만나고 헤어질 때, 마지막 말을 기억하려는 습관이 있다는 박준 시인의 그 따뜻함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