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아름다워서 눈물이 나는
30대 중반에 들어선 나는 결혼도, 출산도 하지 않았다. 지금으로서는 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우선 나는 나 자신이 행복하게 잘 지내는 일에 굉장히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 다른데 그 관심을 돌릴 여유가 없다. 기존의 가족들, 혹은 혼자 사는 데에 익숙해져 있는데 이 일상에 누군가가 들어오는 일이 버겁게 느껴지기도 한다. 심지어 한국 사회에서의 결혼은 배우자의 기존 가족까지도 받아들이는 일이라는데, 내 가족도 힘든 마당에 상대방의 가족까지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다. 배우자나 자녀가 생기면 그만큼 나의 부분을 양보해야 하는데 그럴 자신도 들지 않는다. 또 어떤 생명을 책임지는 일이 너무 무겁게 느껴지기도 하고, 심지어 내 마음대로 한 인간의 탄생을 결정하는 일은 두렵게 느껴질 정도다. 유전의 강력한 힘을 잘 알기 때문에 나의 병약한 몸과 정신을 물려주고 싶지도 않았다.
이런저런 이유로 결혼과 출산에 흥미가 없었기 때문에, 주변 친구들이 하나 둘 결혼을 할 때도 그저 축하만 하고 그만이었다. 행복하게 잘 살면 그만이겠지. 나는 자주 만날 수 있는 친구들을 하나씩 잃어가는 슬픈 기분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결혼 한 친구를 예전처럼 자주 만날 수는 없었다. 사는 곳이 멀어지기도 하고, 두 집안의 사람들을 만나고 가족 행사에 참여하려면 친구들의 영역은 줄어들기 마련이었다. 최대의 관심사 또한 달라지는 법이라, 정작 만나서도 공감이 되지 않는 말들도 많이 들었다. 조금씩 멀어지기도 했다. 결혼하지 않은 친구들을 더 자주 만나게 됐지만, 아, 그마저도 하나둘씩 줄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친구들만이 서로를 의지하게 됐다.
‘결혼러시’가 지난 지 몇 해가 지나니 이제는 친구들의 출산 소식이 들렸다. 누구는 딸을 낳고, 누구는 아들을 낳고. 몇 개월이 됐고, 벌써 걸어 다니기 시작했고……. 물론 육아를 시작한 친구들을 만나기는 더 어려웠다. 특히, 혼자 아이를 돌보는 엄마의 시간은 오롯이 아이에게 할애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물론 그들의 고충을 모르지 않았다. 육체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그들은 지쳐있었고, 아이와 함께 고립된 기분이 든다고도 했다. 하지만 그들을 이해한다고 해서 쉽게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저 이렇게 삶의 갈래가 나뉘는구나, 나와는 더 먼 일이 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제일 친한 친구 E가 결혼을 했을 때도 그런 기분이 들었다. 스무 살에 만나 같은 대학을 같은 시기에 졸업하고, 취업도 비슷하게, 회사에서 느끼는 고충마저 비슷했던 친구였다. 여태까지는 비슷한 인생을 살았는데, 결혼을 기점으로 인생이 많이 달라지리라 생각됐다. 축하한다는 말의 뒤편으로 씁쓸한 마음을 숨겼다. 누구보다 친구의 앞날을 응원했지만, 남겨지는 내가 초라하다고도 생각했다. 그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친구도 나에게 신경을 많이 써줬다. 서운하지는 않을지, 외롭지는 않을지 사려 깊게 관찰했다. 시간을 쪼개 나를 만나기도 했다. 친구의 노력 덕에, 당장 결혼을 했더라도 우리의 사이는 달라지지 않았다고 느꼈다.
결혼까지는 그랬다. 임신과 육아는 또 다른 일이었다. 우리의 길이 갈라진 건 그때부터였다. 임신 후에는 혹시 유행 중인 코로나에 감염되지는 않을지 걱정돼 친구는 바깥 활동을 최소화했다. 사람들을 만나는 일도 쉽지 않았다. 뭐든지 조심하는 것이 좋을 시기였다.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은 냄새를 맡기도 힘들었다. 몸이 무거워지고 기분 조절이 어려웠다. 동시에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기회도 줄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정일보다 훨씬 일찍, 어제 새벽에 아이를 낳았다는 연락을 받았다.
메신저로 보내온 사진에는 수척해 보이는 친구와 함께 품에 안긴 작은 아이가 있었다. 실눈을 뜨고, 작은 입술을 다물고 있었다. 몸 전체가 작은 손수건 같은 천에 쌓여있는, 정말 작은 아기. 어쩌면 어릴 때 가지고 놀던 아기 인형 같다고도 생각했다. 친구가 진짜 아기를 낳았다니! 믿기지 않았다. 친구 자신도 믿기지 않는다고 했다. 어떤 이름을 지으면 좋을지 같이 고민도 했다. 내가 좋다고 한 이름이 아이의 엄마, 아빠 마음에도 들어서 이제 태명이 아닌 그 이름으로 부르기로 했다. 똑똑하고 야무진 인상을 주는 이름이었다.
아이는 자주 운다고 했다. 악을 쓰고 울고, 잘 달래 지지 않았다. 항상 먹어야 하는 분유 양에 못 미치는 양을 먹었고, 아이 울음만 듣고는 배가 고픈지, 아픈 건지, 어디가 불편한 건지 친구는 알 수 없었다. 잠을 못 자는 것은 물론이고, 화장실에 가고 씻고 밥을 먹는 기본적인 일도 해내기가 어려웠다. 친구는 점점 기운을 잃어갔다. 하루는 아이가 정말 달래지지가 않아서, 친구도 소리치며 울었다고 했다. 너를 낳아서 정말 미안하다고, 이런 괴로움을 줘서 정말 미안하다고 했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은 그 아이의 괴로움마저 부모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친구를 통해 깊이 느낄 수 있는 말이었다.
아이가 원망스러웠다. 내 친구가 힘드니까. 울지 않고 밥을 잘 먹을 수는 없을까, 그저 순하게 지낼 수 도 있는데 왜 이 아이는 그러지 않을까 생각도 했다. 친구는 왜 아이를 낳았을까. 육아의 고충을 모르지도 않았을 텐데 굳이 이 힘든 길을 가려고 했을까.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으며 아이에게 매달리는 나날을 택했을까. 아이의 울음 말고, 말 통하는 상대와 대화하고싶다는 친구 말에 짬을 내어 전화 통화를 하기도 했다. 옹알거리는 아이의 소리가 전화기 너머 들려왔다. 언제나 돼야 엄마 손을 타지 않고 지낼 수 있을까, 생각했다.
아이가 태어난 지 백일이 조금 지나 처음으로 아이를 보러 갔다. 나는 조금 긴장했다. 면역력이 없을 텐데 나 같은 외부인이 만나도 되는 건지, 친구가 너무 얼굴이 상했으면 속상하지는 않을지. 아이가 잠들었다고 해서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오랜만에 보는 친구의 품에는 조용히 잠든 아이가 있었다. 하얗고, 작고, 따뜻해 보였다. 속눈썹이 길었다. 입술은 올망졸망했다. 친구와 안부를 나누는 소리를 듣고 이내 잠에서 깬 아이는 나를 한번 쳐다보더니, 환하게 웃어줬다. 나는 울어버렸다.
왜 눈물이 났는지는 모르겠다. 어떤 것들은 너무 아름다워서 눈물이 나게도 한다더니, 그 아이가 그런 아름다움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친구가 그렇게 힘든 육아를 견딜 수 있었던 이유는 아이를 보고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세상에 내가 전부인 이 작은 아이를, 소중히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이 작고 소중한 아이를 만나보지도 않고 원망했다니. 엄마가 되어보지 못한 자의 섣부른 생각이었다. 아이는 나를 보고 유난히 잘 웃었다. 품에 안았더니 내 목에 얼굴을 묻었고, 우유 냄새가 풍겼다. 그날 나는 목덜미에서 풍겨오는 듯한 그 뽀얀 냄새를 밤늦게까지 잊지 못했다.
며칠 전에도 친구와 아이를 보러 갔다. 그새 많이 컸는지, 백일 때 가누지 못했던 목에도 스스로 지탱할 수 있었다. 여전히 잘 운다고 했으나, 나를 보고서는 자주 웃었다. 그 웃음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마음속에 노란 꽃이 팡팡 피어나는 느낌이다. 아이가 조금 크면서 친구도 기운을 얻었다. 여전히 육아는 힘든 일이지만, 이제는 엄마라는 역할에 적응을 한 느낌이다.
이제 5개월에 접어든 아이는, 여전히 손발이 작다. 작은 모래알만 한 손톱을 보며 생각한다. 이모라는 이름을. 언젠가 네가 나를 이모라고 부르게 될 날을. 친구가 엄마의 역할을 얻은 것처럼, 나는 동시에 이모라는 역할을 얻었다. 어쩌면 가볍고, 멀어질 수 있는 그 이모라는 이름을. 하지만 이모는 언제나 바랄 거야. 너의 세상은 나의 것처럼 울퉁불퉁하지는 않기를. 너의 태명 햇살처럼, 따듯한 날들이 최대한 많기를. 하지만 언젠가 세상이 울퉁불퉁해지면, 너의 손을 잡아줄 사람이 아주 많다는 사실을 깨우치기를. 그 중에 나의 손이 있다는 것을 알아주기를. 너무 아름다워서 나를 울게 했던 네가, 팔 벌리며 내 품에 뛰어올 날을 기다려. 네 눈에 잘 보이지 않을 때도 나는 거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이모라는 이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