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할머니댁에 가는 걸 좋아했더랬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고양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할머니가 기르시는 것은 아니었다, 보다는 집고양이가 아니었다고 하는 게 더 좋겠다. 어린 내가 “할머니, 저기 고양이들 기르는 거예요?” 물어보면, 할머니는 “괭이는 기르는 거 아니다!”하셨다. 할머니는 고양이들에게 ‘난 너희 하나도 신경 안 쓴다’하는 눈짓을 보내다가도 이내 하는 수 없다는 듯한 손짓으로 남은 음식물을 말아 자주색 다라이에 밥을 챙겨주셨다. 그러면 고양이들은 저만치서 기다리다가 우리가 멀찍이 사라지면 눈을 빛내며 다가와 밥을 먹었다. 그들은 인간들에게 손길을 허용하지 않았다, 눈길까지도!
그들이 집고양이가 아닌 이유는, 할머니댁에만 머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뒷동산에 오르내리는지 앞 개울에 마실을 가는지 몰라도, 밥시간이나 일광욕 시간이 되면은 할머니댁 마당에 떼 지어 모습을 보이곤 했다.
이 관계를 무엇이라 칭할 수 있을까? 기르는 것도 아니지만, 무시하는 것도 아니다. 서로에게 부담을 지우지 않으면서도 세월을 함께한다. 어쩌면 정말 이상적인 관계일진대, 어렸던 나는 고양이를 볼 때마다 기르고 싶다며 칭얼거리곤 했다. 할머니 몰래 생선전의 계란 부분을 곱게 발라내어 흰 살을 건넨 적도 있다. 뇌물만 쏙 받고 그들은 그림자만 남겼다. 이후의 명절에도 항상 내가 지는 교섭이 벌어졌다.
어릴 적 할머니댁에서 명절 밤을 쇠면 뜨락의 무성한 대나무 위로 도깨비 같은 소나무 그림자가 보였다. 마치 도깨비가 눈을 부라리며 내려다보는 것 같아서 마당으로 눈을 돌리면 그곳에는 항상 고양이들이 있었다. 한눈에 봐서는 그들을 찾을 수 없다. 세간살이와 마당 텃밭을 주의 깊게 보면은 조그맣게 몸을 웅크리고 있는 고양이, 네다리 쭉 펴고 누워있는 고양이, 흔들리는 잎사귀만이 그의 존재를 보여주는 고양이 등이 있다. 마루에 앉아 고양이들에게 눈으로 신호를 보내다 보면 그 어스름한 시골의 밤이 지나갔다. 속설처럼 살아있는 고양이들이 이리 저리 움직이며 살아있지 않은 두려움을 몰아내었다.
이제 할머니댁을 떠올리면 고양이들을 빼놓을 수가 없다. 세월이 흐르며 고양이들은 불어나서 새끼 고양이들이 오고, 또 새끼 고양이가 오고, 항상 새끼 고양이가 있고. 낯익었던 어미 고양이는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는다. 드문 드문 갈 때면 얼룩의 색깔은 묘하게 낯이 익은데, 크기가 익숙지 않다. 저번의 그 고양이의 자손인지, 본인인지. 저 뒹굴거리는 아기 고양이는 언제 태어난 건지. 고양이 가족의 모습이 우리 가족 같기도 하고.
초등학생 시절, 일기를 쓸 때면 '할머니댁'과 ‘할아버지 댁' 사이에서 어떤 단어를 고를지 한참 고민했다. ‘할머니댁’이라고 하면 괜스레 할아버지는 빼놓는 것 같아 죄송해서 둘을 번갈아 쓰기도 하고, 어느 때는 차례를 잊어 마음대로 쓰기도 했다. 두 분이 공평히 담기는 ‘조부모댁’이라는 연륜 있는 단어를 몰랐던 것이다.
기억 속 최초의 고양이를 발견했던 시간으로부터 20년, 이제 조부모댁에는 무릎과 허리가 좋지 않으신 할머니만 계신다. 할아버지는 병원에 입원하시고선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지고 계신다.
이번 휴일에 고향에 갔다. 할머니댁에 가서 누워 계신 할머니를 보살펴드리는 아빠를 뒤로 하고, 마당을 보니 언제나처럼 고양이들이 있었다. 할머니 대신 잎사귀가 처진 고추 모종들에 물을 흠뻑 주다 보니 화분 옆에 작은 털북숭이 발이 보였다. 새끼 고양이는 그림처럼 단잠을 자고 있다. 꼭 변하지 않을 것만 같은 풍경이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아주 오랜 나날을 함께 해왔을 고양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지내는지 다시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