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버스에서 눈을 감고 있자면, 눈을 떴을 때 다른 곳에 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이변이 없는 한 앞으로의 삶에서 매일 아침 8시 30분까지 와 있기로 약속한 그 건물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말이다.
갈매기들이 끼룩대는 부산이나 고즈넉한 군산 또는 파릇한 춘천.
이를 테면 여기서 300km는 족히 떨어진 고향 집이라던가.
지하철을 탈 때는 그런 상상을 하지 않았는데 버스에서는 이런 상상이 떠오르곤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핸들을 쥔 기사님이 있고, 승객들이 다 함께 정면을 바라보는 좌석 배치와 구조가 꼭 어릴 적 부모님의 승용차와 비슷한 모양이어서일까.
부모님께서는 주말이면 꼭 하루는 남동생과 나를 태우고 어디론가 드라이브를 가서 바다든, 영화든 보고 오려고 하셨다.
“아, 휴대폰 게임해야 하는데!”
“가기 귀찮은데... 친구 만나러 가려고 했는데.”
“지난주에도 바다 봤잖아! 왜 또 가?”
남동생과 나는 커가면서 주말의 드라이브에 대해 투정을 부리기도 했지만,
지금의 나는 그 무수한 테이크 샷이 결국엔 눈 감아도 그려지는 고향의 모습을 안겨주었다고 생각한다.
타향살이, 어른살이 중인 이들에게는 고향, 부모님, 어린 시절이라는 단어가 주는 울림이 남다르게 다가올 수 있다.
특히나 지쳐 있을 때면, 그 울림은 콘서트장 1열에서 듣는 대형 스피커의 둥둥거림처럼 세게 우리의 가슴을 강타한다.
그러나 어쩌나, 이곳에서 고향까지의 거리가 버스 4시간이 걸리는 나의 경우에는 단어의 실체를 확인하러 가기까지가 쉽지 않다.
힘이 들 때마다 매번 내려갈 수도 없고, 현실적인 시간 여유가 없을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꾸려온 삶의 모습에 지친 느낌이 들 때면, 버스에서 조용히 눈을 감는다.
그리곤 버스에 타는 동안은 버스 기사님께 내 인생의 핸들을 잠시 맡겨놓는다.
핸들을 꽉 붙잡고 있던 두 손을 내려놓고는 창밖의 풍경을 하염없이 관찰하는 데 열중이던 어린 때로 돌아가 보는 것이다.
바퀴가 도로를 치닫고 돌아가고, 차체는 나와 우리를 싣고 달려간다.
주말이 되면 어린 나와 남동생, 어머니를 태우고 근교로 운전해가던 아버지의 자동차와 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