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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담홍 Feb 26. 2024

야근하는 삶을 다시 살면서...

2010년 12월 아이를 임신한 이후로 야근하는 직장 생활을 접고, 6시 칼퇴근할 수 있는 회사에 다녔다. 그 당시 나는 아이를 지키는 게 제일 큰 과업이었다. 야근하는 생활 속에서 나도 모르게 아이가 왔다 간 적이 있었기에 덜컥 겁부터 났었다. 그랬기에 그동안의 쌓아놓은 성과를 놓아두고, 아이를 지키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그리고 마침 나에게 딱 맞는 일이 왔다. 야근을 할 수 없는 대신 연봉은 천만 원 가까이 낮춰졌지만 불만은 없었다. 직장 생활 처음으로 칼 퇴를 맛보았으니깐.    



둘째 아이를 낳고 회사 사정상 나는 퇴직을 해야 했다. 다행히 다니던 회사에서는 출산휴가 3개월과 육아휴직 12개월, 고용보험 6개월을 해주었기에 아이를 양육하면서 차후 직업에 대해 천천히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첫째는 네 살, 둘째가 두 살이 되었을 때 보육교사를 강의를 들으면서 놀이 시터 일을 하러 다녔다. 우리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보내고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시터 일을 했다. 쉽지는 않았다. 우리 아이들의 감기는 비일비재했고, 유행하는 전염병은 다 걸렸고, 등원 거부가 허다했다. 그럼에도 나는 그때 꽤나 열정적으로 놀이 시터 일을 했다. 아이들과 교감하는 게 즐거웠다. 우리 아이들과 놀이가 즐거웠기에 선뜻 놀이 시터의 길을, 보육교사의 길을 갈 수 있었다. 놀이 시터 2년 좀 넘게 한 후 보육교사 자격증이 나온 후 보육교사의 길로 접어들었다. 고정 수입이 필요했기에 했던 선택이었다. 간혹 주말 출근이 있었지만, 정시 퇴근이 가능했다. 3년 후, 체력적인 문제와 정신적인 문제 즉 번 아웃이 오는 바람에 나는 어린이집을 그만두었다. 어린이집을 그만둔 해에 코로나19로 모든 것이 멈추는 시점이었다. 결국 번 아웃이 오지 않았어도 나는 어린이집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5년 만에 전업주부 생활이 처음에는 어색했다. 전업주부가 되자마자 내가 한 일은 둘째 아이 유치원을 옮긴 것이었다. 외벌이로 사립 유치원이 힘들기도 했고, 아이가 매일 같이 종일반이 싫다고 했기 때문이다. 때마침 집 앞 병설 유치원에 자리가 있어서 아이를 병설 유치원에 옮겼다. 아이의 하원 시간은 오후 1시 30분이었다. 첫째도 바로 돌봄 교실을 그만두었기에 둘째와 비슷한 시간에 집에 왔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당시 나는 이 시간이 꽤 길게 느껴졌다.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지?’ 아이들이 등교, 등원한 후에 집 안 청소를 싹 해 놓고, 마트 가서 장을 보고와도 헐렁헐렁 시간이 남았다. 이 시간의 공백에 나는 무엇을 해야 될지 몰라 망설이고 있다가 예전에 좋아했던 책 읽기를 시작했다. 도서관 회원증을 만들고 도서관에 가서 마음에 드는 책을 하나씩 읽기 시작했다. 그 당시 하루에 한 권 또는 이 사흘에 한 권씩 책을 읽었던 것 같다. 책을 읽고 반납할 때는 아쉬워서 노트에 필사를 하고 짧은 단상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차 손 글씨 대신 블로그에 책을 포스팅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이들을 돌보며 책 읽는 시간을 일 년 반 넘게 보낼 때쯤, 2020년 10월에 둘째 낳고 그만두었던 회사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출근할 수 있냐는 제안이었다. 그 당시 코로나19로 아이들 등교가 힘든 상황이었고, 코로나19 아니었어도 초1, 초3 아이를 두고 두 시간 넘는 거리를 출퇴근할 엄두가 안 났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사장님께 “재택근무면 할 수 있을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사장님은 흔쾌히 재택근무 괜찮다고 하셨고, 바로 컴퓨터를 집으로 보내주셨다. 그렇게 재택근무가 시작되었다.     


집에서 일을 하기란 쉽지 않지만, 아이들을 돌보면서 할 수 있었기에 감사했다. 더군다나 충분히 쉬었기 때문일까, 내 수중에 오랜만에 돈이 들어온다는 기쁨일까. 처음에 뛸 듯이 기뻤고,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그리고 처음 시작은 1년~2년 정도를 이야기한 터였기에 그 이후가 불안하면서도 쉼이 또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좋기도 했다. 그러나 2024년이 된 지금, 아직도 나는 그 회사에 소속되어 재택근무 중이다.  

    

재택근무도 아침 9시에 시작해서 오후 6시에 마무리된다. 때에 따라서 일의 양은 조금씩 변화가 있지만 빡빡한 날은 별로 없었다. 그러다가 작년 여름쯤부터 일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종종 야근하고, 종종 주말 근무를 했다. 그렇다고 해서 추가 수당이 있는 건 아니었다. 이런 달이라고 월급을 더 주지는 것도 아니었다. 야근을 하는 날이 늘수록, 나의 여가시간과 아이들 돌봄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회사에 불편한 점을 말했지만 미안하다는 말뿐 일의 양은 줄지 않았다. 결국 회사를 그만둘 마음으로 연말에 사장님과 통화했을 때 월급 올려준다는 말과 약간의 보너스를 지급해 주고, 휴가를 주겠다고 말씀하셨다. 2주 정도 편하게 쉰 것 같다. 이렇게 대략 일이 마무리되고 나서 문득 야근하는 삶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임신하고 지금까지 야근하는 삶을 살지 않았다. 임신하기 전까지는 야근을 내 인생에서 뺄 수 없을 정도였다. 정시 퇴근보다 야근한 날이 더 많았으니깐. 여가 시간은 생각할 수도 없었고 자기 계발은 먼 이야기였다. 그러다가 임신을 하고 아이를 캐어하면서 칼퇴근에 젖어있었다. 아이들이 커 갈수록 손이 덜 가 나의 시간이 조금씩 늘어났다. 그 시간에 책 보고, 글 쓰는 시간이 즐거웠다. 배우고 싶은 것이 있으면 온라인 스터디에 참여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야근하는 삶이 시작되자 삶의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참여했던 스터디 과제가 구멍 나기 시작했고, 줌 미팅도 하기 힘들어졌다. 이뿐인가 아이들 밥이 제일 문제였다. 배달도 하루 이틀이지. 정말 야근이 주는 중압감은 생각보다 컸다.  


그러다 문득, 내 옆에 살고 있는 남자를 보았다. 이 남자는 매일 야근이다. 그리고 툭하면 장기 출장간다. 이 사람은 자기 여가 시간이 있는가? 집에 와서 게임하고, 넷플릭스 보는 게 다다. 한동안 나는 이런 남자의 모습을 한심스러워했다. ‘아니 책이라도 좀 보던지, 앞으로 어떻게 살지 생각 좀 하지 왜 매일 멍하게 게임만 하고 영화, 드라마만 보고 있어.’ 했다. 이런 내 마음의 옹졸하게 느껴졌다. 아침 일찍 나가서 늦게까지 일하고 온 후에 다시 무언가를 할 에너지가 남아있을까? 그 에너지에 대해서 생각하지 못했다.     



작년에 야근하는 삶을 살게 한 건, 어쩌면 옆에 있는 남편을 좀 보라는 뜻이었던 것 같다. 매일 야근하고 오는 남편 눈 그만 흘기고, 그 사람의 고충에 대해, 그 사람의 노고에 대해, 그 사람의 끈기를 알아봐 주라고.      


야근하는 삶을 살면서 매일 야근하고 있는 사람의 꿈이 궁금해진다. 꿈을 물을 때, 남편은 음식점 차리는 거라고 늘 말한다. 이 말에 난 속으로 말로만 꿈꾼다고 뭐라고 했는데, 그가 요리할 수 있게 지원해주고 싶다. 그럼, 나도 맛있는 음식 먹을 수 있으니깐! 그가 꿈을 펼칠 수 있는 여유를 안겨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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