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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담홍 Oct 24. 2024

연민하는 대상은?

<마음사전, 김소연>을 읽으며...

연민하는 사람은 타자를 통해 내 자신도 그것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결핍감을 느낀다. (중략) 연민은 동질감을 사무치게 형상화한다.

- 김소연의 <마음사전>, 66쪽


연민은 대상에 대한 합일과 몰입이 진행된 후, 연민하는 대상과 자기 자신을 한꺼번에 이 세상에서 격리시킴으로써 생긴다.

- 김소연의 <마음사전>, 80쪽



질문) 연민하는 대상은?



엄마를 사랑하지만 미웠던 시절이 있었다. 왜 나만 차별하고, 왜 나만 미워하고, 왜 나만 덜 사랑하냐며 투정했던 어린 날이 꽤 오래 지속되었다. 결혼하고 나서도 이 부대낌이 쉬이 멈추질 않았다. 사랑받지 못했던 헛헛함이 나를 계속해서 괴롭혀왔다. 아이들을 낳고도 엄마의 사랑을 그리워했던 어리디 어린 나이기만 했다. 이런 내 마음이 힘들어 엄마를 이해하려 나섰는지도 모른다. 내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 말이다. 엄마를 이해하려고 바라보자 엄마의 어린 날과 엄마의 젊은 시절 삶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른 엄마가 지금의 엄마로 살기까지의 세월은 쉽지 않았다. 누구인들 살기 쉬웠겠냐마는 내 엄마이기에 유난히 더 고단해 보이는 삶이었다. 그렇다고 한순간에 엄마가 이해가 되고, 엄마를 안아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엄마를 이제는 품고 싶다는 말을 감히 내뱉었다. 그 말을 뱉은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나는 여전히 엄마 앞에선 철부지 아이일 뿐이다.



지난주 수요일 엄마가 허리 수술을 받았다. 수술을 마치고 입원실로 온 엄마의 몸은 축 늘어져있었다. 손등에 꽂힌 바늘이 두어 개, 거기에 피 주머니와 소변 주머니도 주렁주렁. 엄마의 눈에 눈물이 맺혀있었다. 내가 살면서 엄마의 눈물을 본 적이 몇 번이었던가. 오른쪽 다섯 손가락을 접어도 손가락이 남는다. 접혀있는 손가락이 몇 개 없다. 늘 알아서 척척, 강인하기만 하던 엄마였는데, 3시간 수술 후 지금껏 보지 못한 맥 빠짐이 보였다. "이렇게까지 해서 살아야 되나 싶다."라는 엄마의 한 마디가 가슴을 무겁게 슬프게 했다. 엄마의 이 한마디에 목구 멍에서부터 눈물이 차 올라왔다. 그러나 엄마는 곧 괜찮아질 거라는 마음에 눈물을 꼭 삼 켰다. 나의 눈물이 괜한 부정의 기운이라도 가져올까 겁이 났다.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고생했다며 이제 좋아질 일만 남았다면 엄마 손을 쓸어주었다. 간호사는 우리에게 다가가와 전신마취가 깨는 2시간 동안 환자가 자면 안 되는 정신이 들도록 계속 대화를 나눠줘야 한다고 했다.



고통 속에 있는 엄마에게 우리 딸들 이야기, 엄마 손녀들 이야기를 했다. "엄마, 우리 윤이 요즘 선풍기 틀어놓고 자잖아. 왜 그런 줄 알아? 글쎄 학교 가기 싫어서 감기 걸리려고 그러고 있어." 엄마는 이 말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어머, 꽤 웃기네. 공부는 좀 하고?"라며 아이들 근황을 묻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가래를 뱉어내고, 수술 부위 통증에 인상을 찌푸리긴 했지만 아이들 이야기는 들어도 들어도 좋은가 보다.  "엄마 민이가 어제 나보고 뭐라는 줄 알아? 엄마 괜찮아? 이렇게 묻는 거 있지. 할머니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엄마 마음 괜찮냐고." 엄마는 이 말에 슬며시 웃는다. "민이가 속이 깊지."라고 말하며. 그러면서도 아이들 곁에 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엄마 곁에 있는 게 내내 신경이 쓰이는가 보다. 자신의 고통을 이겨내기도 힘들면서 "애들한테 가봐야지. 그만 가봐. 나 괜찮아." 하며 나를 자꾸 집으로 보내려고 한다. "엄마 괜찮아. 애들 이제 어지간히 다 컸어. 그리고 김서방 퇴근하고 와서 애들 챙기고 있어. 걱정하지 마." 하며 엄마를 다독였다. 그래도 차 끊길까 봐, 밤 길 가는 게 위험할까 노심초사 걱정이다. "엄마 나 20대 때는 매일 새벽에 택시 타고 다녔어. 걱정도 팔자야. 요즘 세상이 얼마나 잘 되어 있는데. 걱정하지 마. 깔린 게 차야." 엄마는 2시간이 지나자 기운이 다 떨어졌는지 간호사가 살피러 오자 자도 되느냐고 물었다.  간호사가 두 시간 정도 자고 나서 걸어보자고 했다. 엄마는 자기는 이제 잘 테니 그만 가보라고 나를 자꾸 떠밀었다. 엄마의 떠밀림에 엄마의 고통을 애써 모른 척하면 나는 병원을 나왔다.



엄마 병원에 오기 전 아이가 아파서 조퇴하고 집에 일찍 왔다.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갔다 오기는 했지만 아이가 신경 쓰였다. 집에 들어오는 밤 11시가 넘어 12시가 되어가는 시간이었다. 다행히 아이는 많이 좋아졌다.



다음날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는 걱정이 가득 실린 나의 목소리를 듣고. "걱정하지 마, 괜찮아질 거야." 하며 오히려 나를 위로했다. "면회도 안되니깐 주말에도 오지 말고." 면회가 안된다니. 면회가 안되다고 했지만 토요일에 엄마를 보러 갔다. 정말 아주 잠깐 엄마에게 필요한 물건만 전해주고 왔지만 그럼에도 그 잠깐을 통해 안심했다.  



돌아오는 토요일에는 엄마가 퇴원을 한다고 한다. 아직 병원에서 더 쉬었으면 좋겠는데, 집에 가면 또 일한다고 나설 텐데 이를 어쩌나 걱정이 앞선다. "엄마 재활병원 알아봐야 하는 거 아니야?"라고 묻는 말에 "내가 필요하면 다 알아보고 갈 테니깐 걱정하지 마. 별걱정을 다한다."이 말에 나는 너털웃음을 나왔다. 그렇다 지금껏 3번 수술하는 동안 한 번도 엄마가 알아서 안 한 적이 없다. 엄마는 자기가 갈 병원과 자신이 받을 수술을 다 찾아보고, 어느 병원이 좋은지, 어느 재활병원으로 갈지 다 알아보고 주도적으로 움직이셨다. 이번에도 역시 엄만 씩씩하게 행동하겠지. "맞아, 우리 엄마 엄청 씩씩하지! 걱정 안 할게."



엄마를 보면 짠하지만 엄마에게 무엇을 해드려야 될지는 잘 모르겠다. 엄마는 아마 우리 삼 남매가 사이좋게 지내는 것, 자주 얼굴 보여주는 거 이것 말고 더 바라시는 게 없겠지? 이 두 가지가 쉬우면서 참 어렵다. 엄마의 마음의 소리를 잘 듣고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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