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어머니의 발톱을 깎아 드리며, 이승하> 시를 필사하며
늙은 어머니의 발톱을 깎아 드리며 / 이승하
작은 발을 쥐고 발톱을 깎아드린다
일흔다섯 해 전에 불었던 된바람은
내 어머니의 첫 울음소리가 기억하리라
이웃집에서도 들었다는 뜨거운 울음소리
이 발로 아장아장
걸음마를 한 적이 있었단 말인가
이 발로 폴짝폴짝
고무줄놀이도 한 적이 있었단 말인가
뼈마디를 덮은 살가죽
쪼글쪼글하기가 가뭄못자리 같다
굳은살이 덮인 발바닥
딱딱하기가 거북이 등 같다
발톱 깎을 힘이 없는
늙은 어머니의 발톱을 깎아드린다
가만히 계셔요 어머니
잘못하면 다쳐요
어느 날부터 말을 잃어버린 어머니
고개를 끄덕이다 내 머리카락을 만진다
나 역시 말을 잃고 가만히 있으니
한쪽 팔로 내 머리를 감싸 안는다
맞닿은 창문이
온몸 흔들며 몸부림치는 날
어머니에게 안기어
일흔다섯 해 동안의 된바람 소리 듣는다
- <인간의 마을에 밤이 온다> (문학사상사, 2005)
그날 어떤 이유로 내가 할아버지 발톱을 깎아드린 걸까. 할머니 또는 아빠나 엄마가 할 수도 있는 일이었고, 아마 그동안은 어른들이 했었을 터인데, 그날은 왜 내가 할아버지 발톱을 깎아 드리게 됐는지 모르겠다.
어린 시절 둘째라는 이유로 심부름을 제일 많이 시킨다고 늘 심통이 나있던 나였다. 둘째의 서러움에 피를 토하는 아이, 마음속에 억울함으로 가득 찬 아이, 그게 나였다.
내가 일곱 살 때 할아버지는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사고가 났고, 그 이후 누워서 생활하셔야 했다. 그러니깐 15년 동안 침상에서만 있다가 돌아가셨다.
할아버지 발톱을 처음 깎아드린 건 고등학생 때였다. 그때 나는 내가 사는 삶이 꽤 힘겹다고 느꼈고, 친구들과 다른 환경에 있는 나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면서도 누구보다 버거워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할아버지의 삶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작은방에 있는 창문 하나로 밖을 보고, TV로 세상 소식을 듣는 게 전부였던 사람이었다. 자기 손으로 할 수 있는 것도, 자기 발로 갈 수 있는 곳도 아무 데도 없는 사람 있었다. 15년 동안 꽁꽁 묶여 사람을 불러 자신의 요구 상황을 말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의 비애를 그때는 몰랐다.
학교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길이 싫었다. 내 발소리를 듣고 "정은아~"부를 소리가 끔찍했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내 코를 찌를 쿰쿰한 냄새에서 멀리 달아나 버리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차마 이것을 외면하지 못하고 꼬박꼬박 집으로 향해 부름에 응답했고, 냄새를 기꺼이 맡으며 숨을 쉬었다.
할아버지 발톱을 처음 깎아드린 날, 앞에 시처럼 뭉클하지 못했다. 역했다. 나는 올라오는 구역질을 참느라 배와 목에 힘을 꽉 주고 있어야 했다. 오래도록 방치된 굵은 발톱 안은 거뭇거뭇 때가 껴 있었고, 언제 씻었는지 모를 발에선 악취가 올라왔다. 코로 숨을 쉬지 못하고, 입으로 겨우겨우 숨을 내뱉으며 할아버지의 발톱을 깎았다. 내가 할아버지 발톱을 깎는 사이, 할아버지는 나를 어떻게 보고 계셨을까? 그때 나는 할아버지의 시선을 느끼기는 했을까?
돌아보니 긴 세월 병자를 케어하느라 우리 가족은 모두 지쳐있었다. 할아버지의 위생 상태는 어땠을까? 아마 제대로 챙기지 못했을 것이다. 7 식구를 부양하기 위해 맞벌이를 해야 했던 부모님과 류머티즘으로 힘들어했던 할머니에겐 힘에 부치는 일이었을 테니깐. 그럼에도 왜 이 모든 것을 다 한 집에서 책임을 져야 했을까? 왜 집에서 모시는 것만이 효도라 생각했을까? 이런 많은 의문이 이제야 든다. 이게 그냥 그때 그 시절엔 그랬다는 말로 끝내야 할까. 우리 부모님은 이 세월을 어떻게 견디셨을까? 우리 부모님은 어떤 것을 우리에게 기대할까?
이렇게 지치도록 할 수 있는 만큼 할아버지를 돌봤다고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후회된다.
나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당일에만 자지러지게 할아버지를 붙잡고 울었다. 가지 말라고, 할아버지 가지 말라고, 내가 잘하겠다고. 그러나 그리곤 난,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그다음부터 자유로움에 정신이 팔려 헤헤거리며 남은 20대를 시원하게 보냈다. 그 얼마나 철없던 나였는지, 그게 이제야 보인다.